[주간경향 | 오늘을 생각한다] "탈, 탈정치"
최근 한 평화 잡지와 인터뷰에서 이런 마지막 질문을 받았다. “정치하는엄마들의 10년 후 목표는?” 10년? 매일 새로 닥치는 현안에 대응하느라 허덕이는 나에게 ‘10년’은 너무 낯설고 긴 호흡이었다. 대번 “일단 (우리 단체가) 안 없어지는 거요”라고 답했지만, 긴 ‘음…’이 이어졌다. 10년 후에는 ‘공존’이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경쟁과 공존’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할지 저울질할 수 있을 만큼 공존에 대한 담론을 확장하고 싶다고 결국 대답했다. 경쟁 일변도의 사회를 하루아침에 뒤집을 것처럼 ‘함께 살자’라는 우리의 주장을 더 명확하고 확고하게 드러내 보지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에게 ‘공존’은 얼마나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까? 아니 경쟁에서 ‘내가 살아남는 방법’ 외에 무슨 말이 들릴까?
과거 20여 년 동안 우리는 매일 함께 살자고 부르짖었다. 2001년 오이도역 참사 이후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대한 사회적 연대가 확장되고, 활동가들은 20년 넘게 길바닥에서 굳건히 운동을 이어오고 있다. “버스 타자. 지하철 타자”라는 당연한 권리 주장에 수십 년을 바치고 온몸을 내던져야 하는 것도 기가 막히는데, 서울시장이라는 사람이 장애인 인권 단체와 활동가들을 사회적 강자·테러리스트로 왜곡하고 장애인 혐오에 앞장을 선다. 오세훈 시장이 서울시민을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갈라치고 대놓고 약자를 혐오하는 배경에는 탈정치가 있다. 경쟁은 심화하고 개인주의는 팽배하고, 사람들은 제도권 정치만 혐오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인 것 자체를 혐오하기에 이르렀다. 그게 탈정치다. 탈정치는 사회적 약자뿐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한다.
탈정치의 시대에 ‘정치하는+엄마들’을 하려니 빡세다. 가만있어도 엄마는 진상인데, 정치까지 한다니 더 꼴 보기 싫은 모양이다. 어린이를 (입시)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적인 사람으로 키우려고 하니 무책임·방임·세뇌·주입식이라는 낙인이 덕지덕지 붙는다. 완곡하게는 “아홉 살 어린이와 사회문제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건 너무 빠르다. 어린이답지 않다”라고 말한다. (다섯 살 때부터 이야기했는데 어쩌라고….) 적어도 2050년까지 지속될 핵오염수 해양 투기 문제를 1960년대생들끼리 결정하고, 2000년대생들은 입도 뻥긋 못하는 게 공정한가? 그게 동심을 지키는 길인가? 경쟁을 맹신하는 사회에서 탈정치는 상식이 됐다. 함께 살자고 아무리 외쳐봤자 탈정치라는 장벽에 부딪혀 되돌아온다. 10년 후 ‘공존’이 엄연한 선택지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탈정치에 균열을 내야 한다. 인간의 권리에 대해, 국민의 의무에 대해, 민주적 헌법 국가를 운영하는 일에 대해, 정치에 대해 잊힌 모든 것을 소환해야 한다. 그게 정치하는엄마들의 숙명이 아닐까? 핵오염수 투기가 시작된 지 일주일 지난 오늘, 긴 호흡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기고 전문 보기:
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202309011055401&code=124#c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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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하는엄마들이 궁금하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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