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보통합활동공유] '유보통합' 약속한 대통령 후보가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대선마이크 특별기고] 13. 강미정 정치하는엄마들 공동대표
올 3월 9일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 중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 사람은 누구일까? 우리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평등한 출발과 공정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통합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 왜 유보통합은 필수적인 과제인지, 보육 분야와 교육 분야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이번 기고문은 「대선마이크 특별기고」를 읽은 학부모의 입장을 전하는 글로, 강미정 정치하는엄마들 공동대표가 보내왔다. -편집자 주
묻고 싶다. 공교육이 붕괴된 현실에서 영유아기 교육 불평등 해소를 외치는 유보통합이 지향하는 ‘교육’은 대체 무엇인가. 모든 아동에게 동등한 지원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유보통합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질문이다. 즉, 교육 불평등의 ‘불평등’에 방점이 아니라 ‘교육’에 방점을 두고 묻는 것이다. 「베이비뉴스 대선마이크 특별기고」를 통해 보육·교육 현장과 학계의 고견을 살펴봤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유보통합이 현실화하기 위해서 관리 부처, 대상 연령과 이용 시간, 시설기준, 교사 자격과 양성체계, 재정 문제, 공사립과 민간의 균형발전 등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하다는데 양육자인 내가 보기에 이 ‘어떻게’에 해당하는 방법론은 차후의 문제인 것 같다. ‘무엇이’ 문제인가, 라는 본질적인 물음은 다음과 같다.
‘평등한 출발선과 공정한 기회를 통해 생애 초기 교육 불평등을 해소한다.’ 유보통합의 당위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교육 불평등을 우려하는 사고의 전제는 무엇이란 말인가.
대한민국 교육이 입시를 위한 장시간, 고강도 학습 노동으로 전락한 것은 기정사실이다. 동네에서 마주친 예닐곱 살 남짓한 아동이 자신의 등을 덮는 책가방을 메고 들어가는 어느 영어학원의 이름도 ○○○ 교육이다. 자본주의적 삶의 가치가 공동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까지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학교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이에 순응하기를 요구하였는가, 아니면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저항하기를 요구하였는가. ‘나중에 대학 가서 해’, ‘공부 못하면 저렇게 된다.’ 학창 시절에 이런 언사들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유보통합을 추진해온 집단에서 말하는 ‘미래 역량을 함양하는 교육’이란 과연 무엇인가. ‘어서 와, AI 학습은 처음이지? 영유아 학습을 책임질 ○○○ AI 학습!’ 모 광고문구처럼 아동들이 패드 앞에 앉아 화면 터치를 하며 한글을 떼는 것이 미래 세대의 교육일까. 낯선 미래라는 미래 담론은 끊임없이 불안감을 자극해 이윤을 창출하는 자본의 속성과 닿아있다. 기술이 결합된 교육시장은 AI 스마트 학습 플랫폼을 기반으로 대여섯 살은 물론 이제는 서너 살을 대상으로 교육의 적기론, 불안마케팅을 펼친다.
교육의 기회가 부족해서 아동들이 교육권을 그토록 침해받았는가? 아니면 오히려 교육의 요구들이 넘쳐나서 아동들이 놀 권리를 침해당했는가? 유보통합의 당위는 능력주의와 공정 이데올로기의 아동판 연장선이다. ‘평등한 출발선과 공정한 (경쟁) 기회를 통해 생애 초기 교육 불평등을 해소한다.’ 어차피 가혹한 각자도생 경쟁 사회에서 생애 초기라도 평등한 출발선을 깔아주고 공정한 경쟁에 참여하면, 공정한 경쟁에서 이기면 행복할까? 공정 담론은 경쟁이 문제라는 점을 은폐한다.
교육 조건이 평등해진다 해도, 모든 아동이 나중에 공부를 잘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애당초 공부라는 기준이 한 가지인 것이 문제이다. 유아·놀이 중심 누리과정을 기관 형태나 운영 주체에 상관없이 제대로 실현시키는 게 아동 중심의 유보통합이라고 본다. 유아기에 돌봄과 교육은 분리될 수 없고 이 시기는 놀이가 가장 중요한 교육이다. 교육과 돌봄이 나누어지는 순간 아이들의 놀이권은 학습으로 위협받을 것이 명약관화다.
누가 유보통합을 말하는가. 거기에 양육당사자가 있는가. 영유아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과 불안감에 의한 사교육비 지출 규모를 근거로 교육의 질 향상과 교육비 부담에 대한 확신을 주는 정책이면 환영할 것이라는 접근은 정책 주체를 수혜 대상으로서 관념적이고 납작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이를 주장하는 집단 내에 정작 양육당사자가 없다는 증거다. 양육당사자를 우리 아이 뒤처지지 않기 위해 교육열에 목메는 표본 집단으로만 인식하면 오산이다.
그렇다면 유아·놀이중심이 누리과정을 어떻게 제대로 실현시키고 발전시킬 것인가. 필자의 자녀가 다녔던 어린이집의 사례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어느 봄날,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리러 가는 길 발걸음을 재촉하며 도착한 어린이집 대문 밑으로 흙물이 계단을 적시며 새어 나왔다. 마당을 청소 중일 것이라 짐작하며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마당이 온통 진흙탕이 되어 있었고 아이들이 장화를 신고 마음껏 옷을 더럽히고 있었다. 그중 질퍽한 진훍에 몸을 던진 한 아이가 유독 눈에 띄었는데 그는 그저 구르고 넘어지고 하는 자신의 행위 자체에 집중하고 있었다. 씻어야 하는 불편함이라든지 더럽혀진 옷의 세탁 등 다가올 미래에 대한 염려 따위는 없이 현재 그 순간만을 살아내고 있었다. 행위의 수단과 목적이 일치할 때만이 놀이이다. 놀이에 목적이 개입하면 그 순간 노동이 된다. 이 아이는 한마디로 제대로 놀고 있었고 담임 교사는 호스로 연신 물을 뿌리며 그 아이가 느낀 창조적 즐거움에 함께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입을 벌린 채 쳐다보다 문득 아이들이 제대로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낯선 나 자신을 발견했고 이렇게 흐드러질 수 있는 권리가 존중되는 아이들이 극소수일 것이라는 생각에 고민이 깊어졌다.
물론 이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그리고 모든 기관이 마당에서 흙 놀이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아니다. 아이들의 놀이를 어떻게 지킬 것이냐 점이 결코 만만치 않은 문제이고 교육이란 미명하에 행위의 수단과 목적의 일치를 본질로 하는 놀이가 학습이나 교사 중심 활동 중심으로 훼손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제대로 노는 모습이 그토록 낯설었던 것은 아이들의 놀 권리가 침해당하는 사회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해당 기관은 더는 원아 모집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 문을 닫았다. 대문 밖으로 흘러나온 흙물이 마르지 않고 멀리 퍼져 이 어린이집이 실현해왔던 유아·놀이중심의 돌봄이 지역사회 안에서 확장되었으면 했던 기대는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동의 놀 권리가 실현되는 방향의 유보통합이 되기 위해 이 어린이집 마당의 진흙탕은 생각의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열려있다.
유보통합에 의지가 있는 대통령 후보라면, 아이들의 놀 권리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고민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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