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마이너] 63빌딩 안과 밖, 어느 쪽이 장애인의 권리를 외치는가
63빌딩 컨벤션센터 ‘제43회 장애인의 날’ 기념행사
국무총리 축사, 거주시설장 ‘올해의 장애인상’ 수여
건물 밖에선 ‘제22회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기념식
420공투단 “총리 면담과 장애인권리예산 약속하라”
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63빌딩 컨벤션센터 안팎에선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건물 안에서는 ‘장애인의 날’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가 열렸고, 건물 밖에서는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외치는 장애인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63빌딩 안에서는 말쑥한 차림의 정관계 인사들이 ‘차별은 없이, 기회는 같이, 행복은 높이’라는 공허한 약속을 주고받았고, 거리로 나온 장애인들은 ‘당당한 병신이길 원한다’라며 시민권이라는 절박한 요구를 세상에 알렸다.
- ‘장애인의 날’ 한덕수 축사 “차별과 편견의 문턱 넘자”
이날 오전 11시 컨벤션센터 2층 그랜드볼룸에서는 보건복지부 장애인의날행사추진협의회 소속 28개 단체가 공동 주관한 ‘제43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다양한 행사가 이어졌고, 한덕수 국무총리, 이경혜 한국장애인개발원장 등 주요 인사가 자리를 지켰다.
현장에 참석하진 않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올해 3월 장애인정책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는 개인예산제,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최중증발달장애인을 위한 통합돌봄, 입원과 경조사 시 최대 일주일간 24시간 돌봄을 제공하는 발달장애인 긴급돌봄 등을 통해 실생활과 맞닿아있는 복지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가수 바다와 장애인 교향악단인 한마음병원 오케스트라, 룩스빛 시각장애인 무용단 등의 축하공연이 펼쳐졌다. 뇌병변장애인 김대근 시인의 시 ‘그 집 모자(母子)의 기도’를 배경으로 한 연극이 끝난 뒤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상영되기도 했다. 주간활동서비스를 받는 발달장애인 준우 씨 가족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장애와 역경을 극복한 세 사람에게 ‘올해의 장애인상’을 수상했다. 장애인 복지 증진에 이바지한 17명에게는 국민 훈장, 대통령 표창 등 유공자 포상이 주어졌다. 그중에는 보호작업장 시설장, 중증장애인거주시설 원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 총리는 “여러분의 헌신으로 장애인의 삶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었다.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 수준은 그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척도다. 오늘 행사가 우리 사회의 차별과 편견의 문턱을 넘어 모두가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했다. 건물 밖에서 장애인들이 요구하고 있는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탈시설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구영광학원 장애학생 5명은 장애인인권헌장을 낭독했다. 장애인인권헌장은 1975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장애인권리선언에 근거해 1998년 12월 우리나라 국회에서 선포된 것으로, 장애인의 존엄한 권리와 행복추구권을 명시하고 있다. 13개 항에는 장애인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등이 포괄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장애학생의 입을 빌려 장애인 권리를 위하는 말이 행사장을 가득 채웠지만, 정작 헌장에 반하는 장애인의 현실은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았다. 2020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 달에 한 번도 외출하지 않는 장애인의 비율이 8.8%, 월 1~3회 외출이 12.9%에 이른다. 장애인의 32.1%는 일상생활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답했지만, 일상생활 지원서비스 이용 경험률은 13.5%에 그치는 게 현실이다.
장애인 앞에 놓인 차별의 벽이 굳건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날 정부는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사회 구조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았다. 매년 축사를 하고, 기념공연을 하고, 장애인인권헌장을 읽는 형식적이고 비슷비슷한 행사에 가려진 장애인 권리의 현주소다.
- 장애인 200명 “정부 약속 파기… 내일부터 지하철 시위”
같은 시각, 컨벤션센터 밖에 모인 ‘2023년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아래 420공투단)’은 ‘장애인의 날을 거부하는 자들의 제22회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기념식을 열었다. 장애인 200여 명은 시혜와 동정의 ‘장애인의 날’을 거부하며, 인권과 평등을 노래했다. 이들은 정부를 향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준수하고 장애인권리예산을 보장하라고 외쳤다.
정기열 경기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1년에 한 번 기억되는 ‘장애인의 날’을 거부한다. 장애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건 1년 내내 차별받지 않을 수 있는 권리 보장”이라며 “이를 위해선 장애인권리예산이 보장돼야 한다. 정부는 기념식만 하지 말고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권리를 예산으로 보장하라”라고 강조했다.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윤석열 대통령의 ‘장애인의 날’ 기념 발언을 비판했다. 오 시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서울시는 결핍을 가진 분들께 극복의 지지대가 되어 드리고 싶다”고 썼다. 윤 대통령은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다름없는 공정한 기회를 갖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했다. 이 회장은 이들의 발언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3살 때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됐습니다.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았습니다. 오 시장은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장애를 극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비장애인은 뭐든 할 수 있었지만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불평등한 사회를 바꾸고 싶습니다.
윤 대통령은 공정을 위해 어떤 일을 했습니까? 공정을 위해 장애인권리예산을 외면한 겁니까? 더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더는 차별하지 마십시오. 정말로 공정을 위한다면 장애인권리예산을 보장하십시오.” (이형숙 회장)
20일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가 정부의 이동권 예산 보장과 한덕수 국무총리와의 면담 약속을 기다리겠다고 고지한 날짜이기도 하다. 그러나 20일 오후 1시 기준으로 아직 정부의 예산 보장 약속도, 한 총리의 면담 약속도 없는 상태다. 한 총리는 건물 안에서 열리는 복지부 기념식엔 참석했지만, 420공투단의 기념식엔 나타나지 않았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당장 21일 오전부터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재개한다고 밝혔다.
“장애인권리예산 중에서도 특히 이동권 예산, 이동권 예산 중에서도 특히 특별교통수단(장애인콜택시) 예산이라도 20일까지 약속해 준다면 지하철 시위를 하지 않겠다고 (정부에) 얘기했습니다. 한 총리 면담 약속도 20일까지 답변 달라고,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산 약속도 없고, 면담도 추진되지 않았네요.
아직 오늘(20일)이 좀 남았습니다. 한덕수 국무총리님, 이곳(컨벤션센터)에 오셨지요? 우리(420공투단) 이야기 들으셨지요? 빨리 오늘이 가기 전에 답을 하십시오. 답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내일부터 적극적으로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겠습니다. 장애인들 놀기 좋은 날을 골라 ‘장애인의 날’을 만들었다는 치욕을 잊지 않고 내일부터 다시 지하철 탈 것입니다.” (박경석 대표)
- 제1회 장애인권리보도상, 성기연 MBC PD·박지영 한겨레 기자
이날 420공투단 기념식에서는 김포장애인야학(아래 김포야학)에서 공부하는 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이 공연을 선보였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야 말로 ‘공정’을 위해 만들어진 일자리다. 노동자들은 ‘중증장애인은 노동을 할 수 없다’는 편견에 저항하며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홍보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공연을 마친 엄소현 김포야학 부학생회장은 정부를 향해 “저상버스와 장애인콜택시를 많이 만들어라”라고 요구했다. 이경민 학생은 “정부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왜 안 지키나? 그리고 박경석 대표를 체포하지 말아라. 체포하면 나한테 혼난다”고 말했다. 체포됐다가 풀려난 박 대표는 이경민 학생을 향해 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제1회 장애인권리보도상 시상식도 진행됐다. 420공투단은 방송 부문에 성기연 MBC PD를, 신문 부문에 박지영 한겨레 기자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성기연 PD는 지난해 4월 26일, ‘PD수첩-우리가 장애인을 볼 수 없는 이유’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420공투단은 “성 PD는 20년이 넘는 기간, 장애인이 계속 목소리를 외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알리고 모든 장애인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사회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방송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박지영 기자는 지난해 2월부터 올해 3월까지 장애인운동 관련해 81건을 보도했다. 420공투단은 “이동권, 권리예산,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 등 사회 전반에 필요한 장애인 권리를 보도했다. 현장에서 장애인이 어떤 주장을 했고 어떤 인권침해를 당했는지 상세히 기록했다”고 말했다.
시상식에 참여한 박 기자는 “상을 받게 돼서 민망하고 감사하다. 기사 방향을 잡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많이 던졌다. 왜 계속 지하철 시위를 하는 걸까,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걸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기사에 쓰려고 노력했다. 질문을 던질 때마다 정부와 정치권의 역할이 크다는 걸 많이 느꼈다”며 “한겨레에 주신 이 상은 앞으로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의 권리보도에 앞장서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정부와 정치권을 비판하고 책임을 묻는 보도를 이어가겠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420공투단은 대통령실 청사와 가장 가까운 4호선 삼각지역 야외무대에서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결의대회를 이어갈 예정이다.
📰[비마이너 | 기자 하민지·복건우] 보도 전문 보기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4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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