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던전’ 같은 실험실, 엄마도 공부하다 죽을 뻔했어 (윤정인활동가)
‘던전’ 같은 실험실, 엄마도 공부하다 죽을 뻔했어
- 칼럼니스트 윤정인
[엄마 과학자 생존기] 시한폭탄 안고 사는 실험실에서
누군가 나에게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좋았던 시절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학원생 때라고 말할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더럽게 힘들었던’ 시절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주저하지 않고 대학원생 시절이라고 말할 것이다.
엄마의 삶과 학생의 삶을 비교하자면, 학생으로 살던 시절이 세상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굳이 이 시절을 가장 좋은 시절이라고 생각했을까? 내가 가져야 했던 ‘책임’이라는 무게가 가장 적게 나갔던 시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되어 한 생명을 보듬어야 하는 책임보다는, 그저 배우기만 하면 되는 학생 시절이 훨씬 편했다.
◇ 스승 같은 부모는 선택할 수 없지만, 부모 같은 스승은 선택할 수 있다
이공계 대학원이라고 하면 가운 입고, 고글 쓰고, 멋지게 실험하는 모습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글에서 밝혔듯이, 이공계 실험실은 청소와 정리의 연속이다.
실험과 연구를 배우는 과정은 가사노동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가사노동을 부모에게 배우듯, 실험도 스승에게 ‘실험 노동’의 노하우를 배우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 업계에서는 ‘어떤 스승’에게서 배우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부모는 선택할 순 없어도, 그래도 스승은 나름 선택권이 존재한다. 이공계 대학원생뿐만 아니라 모든 대학원생들이 그렇겠지만…. 하여튼 대학원생들이 학위 과정 동안 배우는 것들은 그저 그런 지식이 아니다.
우리는 독립된 연구자로서, 훗날 수행하게 될 주 업무인 '연구를 하는 방법'을 배운다. 학계마다 연구의 범주가 다르겠으나, 이공계에서의 연구란 ‘벤치 사이언스’라 불리는 실험(=테크닉)과 이론의 결합이다.
의학 드라마에서 레지던트 혹은 인턴들이 교수님께 매번 혼나면서 배우는 거랑 비슷하다 보면 된다. 그분들은 그 과정을 통해 의학이라는 것을 배우는 거고, 나 같은 사람들은 이를 통해 연구라는 것을 배운다.
의학 드라마를 보다 보면 우리는 간혹 심각한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대개 경험이 미숙한 탓에 잘못된 판단을 내린 레지던트, 이 때문에 생사를 넘나드는 환자, 그러나 곧 ‘대가’가 나타나 이 문제를 해결하고, 참된 가르침까지 선사하신 뒤 발걸음 총총총 떠난다.
이공계 연구자들도 비슷하다. 다만 우리가 생사의 길 위에 세우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실험 결과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마찬가지로 ‘멘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대가(=지도교수님)가 나타나시고, 우리에게 참된 가르침을 가르쳐 주신다.
도제식 교육은 스승의 노하우를 제자가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성공적인 도제식 교육의 전제는 스승의 품성이 너그럽고, 지식이 풍부하며, 제자 육성에 매우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과, 제자는 스승을 존경하고, 그의 노하우를 물려받겠다는 의욕이 넘쳐야 한다.
도제식 교육 시스템의 단점도 물론 많지만, 이 글에선 우선 단점은 패스하고, 이 도제식 교육의 포인트를 한 가지 언급해 보자면, 학생은 스승의 소관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 덕에 나는 출산휴가를 썼고, 복귀 후엔 출퇴근 시간도 조절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학생이니까 잘 몰라도 괜찮았고(공부하면 되니까), 학생이니까 실수해도 괜찮았다(다음에 안 그러면 되니까). 그리고 학생이라서 우리는 실험실의 업무를 담당할지라도, 실험실 안전관리 문제는 우리의 책임이 아니었다.
◇ 아이템 잘못 쓰면 자폭하는 게임처럼… 시한폭탄 안고 사는 실험실
유기합성 실험실은 위험하다. 유기용매라는 것들은 증기에도 불이 붙을 정도로 불과 친분이 두텁다. 사용하는 시약에는 금속이 첨가된 일도 있다. 금속 덕분에 반응성이 높아 불이 잘 난다.
이공계 실험실은 학생들에게 게임의 ‘던전’같은 곳이다. 엄청난 함정이 곳곳에 숨어있는 던전. 뭐 하나 잘못 건드리는 순간, 실수는 불꽃을 타고 실험실을 불태울 수 있다. 실험 중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는 게임에서 한순간 아이템을 잘못 쓴 실수로 자폭하는 것과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그러니 도제식 시스템은 연구실에 잘 맞는 방식일 수 있다. 게임 잘하는 사람이 많은 길드에 있으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듯이, 유능한 사수가 많은 연구실에 소속돼있으면 얻어갈 것이 많다. 논문을 얻을 수 있고, 실험 기술도 더 배워갈 수 있고, 반대로 여차하면 죽을 수도 있다. 심지어 혼자 죽는 게 아니라 길동무깨나 데려갈 수 있는 위험한 곳이다.
따라서 시약을 버리는 행위 등 위험한 정리 행위 자체는 화학물질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경험 없인 진행해선 안 된다. 숙련된 경험과 화학물질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다면 무슨 짓을 하건 위험한 곳이 바로 실험실이다.
나의 대학원 시절을 통틀어놓고 봤을 때, 나는 박사과정에 이르러서야 처음 시약을 버렸다. 나의 지도 박사님들이 나를 믿고 시약을 버릴 수 있었던 시기는 내가 박사과정에 들어가 나의 내공이 쌓였음을 증명한 이후였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나는 책임자가 가장 마지막에 퇴근한다고 배웠다. 실험실 책임자란 그만큼 내공이 있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하기에, 다른 사람들의 실험 세팅만 놓고 봐도 위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래서 책임자가 마지막에 실험실을 점검하고 불 끄고 가야 한다고 배웠다. 당연히 시약을 버릴 때도 나는 버리기 전 직원들이나 후배들에게 시약 정보를 확인하고 버리라고 훈련시켰다. 내가 훈련받은 그대로다. 그래서 나는, 실험실에서 시약을 버리다 왜 사고가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애가 다치면 부모 책임, 학생이 다치면 누구 책임인가
실험실에서 불이 붙는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안전교육을 받는 이유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이 사고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실험실에선 시약을 버릴 때 혼자 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불이 났을 때 불을 낸 사람 대신 불 끌 사람이 필요해서다.
시약을 버릴 때 박사님들이 우리와 같이했던 이유는, 우리가 혹시라도 실수하려고 할 때, 실수를 저지르기 전 말리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의 교육뿐만 아니라, 능력을 고취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다쳤을 때 병원에 보내는 일 또한, 그것이 스승의 몫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다치면 부모 책임이라고 한다. 그런데 학생이 다치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학생은 누군가의 자녀이자 제자다. 특히, 학교는 가장 안전해야 하는 곳인데도 학생이 다치면 서로에게 책임을 묻느라 너무 바쁘다. 이공계 대학원생이 다치면 사건이 정말 커진다. 연구 특성상 ‘다쳤다’의 개념이 좀 다르다. 심각한 화상, 자상, 혹은 그냥…사망.
일반적인 학교에서 학생의 상해사고 시 지급해야 하는 금액의 범주를 훌쩍 넘는다. 살아도 장기간의 부상, 사실상 진로를 변경해야 하는 정도의 심각한 후유장해. 사고가 일어난 학교, 담당 교수, 그리고 사고 당사자와 가족들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공계 던전에서 여러 번의 자잘한 사고(죽지 않을 만큼의 사고)를 피해 살아남은 1인이기에, 간혹 나오는 실험실 사고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래서 좀 더 촘촘한 실험실 안전 규약이 생기길 희망한다.
필자가 배운 것처럼 실험실 안전 담당자가 단순한 기술직이 아닌, 연구원 출신의 경험 많은 분들로 대체되길 희망한다. 이공계 던전의 특성을 부디 잘 이해하시어, 이공계 학생들의 상해보험 가입 시 보장 좀 크게 고려해주시길 희망한다.
실험하던 이가 다친 후, 후유장해를 얻는 경우 이 학생의 진로를 함께 고민해줄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하길 희망한다. 나는 비록 과도기에 배웠던지라 간혹 죽을뻔한 고비를 넘기며 그나마 다행히 공부했지만, 우리가 돈 주고 학교에 연구를 배우기 위해 들어갔는데, 굳이 죽을 고비까지 넘겨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칼럼니스트 윤정인은 대학원생엄마, 취준생엄마, 백수엄마, 직장맘 등을 전전하며 엄마 과학자로 살기 위해 '정치하는엄마들'이 되었고, ESC(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에서 젠더다양성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프로불만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은 회사 다니는 유기화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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