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난 널 사랑하는데, 왜 매일 같이 있으면 힘들까 (윤정인활동가)
난 널 사랑하는데, 왜 매일 같이 있으면 힘들까
- 칼럼니스트 윤정인
[엄마 과학자 생존기] 사랑은 사랑이고, 노동은 노동이다
감염병의 시대다. 치료제도 백신도 없이 그저 버티며 살아남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집엔 마스크가 많다. 우리 부부가 실험 노동자인 덕이다. 기침할 때 옷소매로 가리라는 것 또한 감염병 유행 이전부터 아이에게 일러두었다. 아이는 손도 잘 씻는다. 아이 맡길 곳이 유치원뿐인 우리는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다.
코로나 덕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남편은 딱히 달라진 게 없다고 한다. 어차피 늘 실험실에서 마스크와 방독면을 쓰고 사니 말이다. 아, 물론 요즘엔 실험하다가 시약 냄새에 콜록거리면 대표님이 무척 빠르게 뛰어나와서 소리를 지른다곤 하더라. 많은 변화를 체감한 건 나와 우리 아이 땡그리다.
◇ 이 시국에 유치원… 보내야겠다, 안 그러면 내가 죽겠다
올해 봄, 땡그리가 다니는 유치원은 긴 휴원 끝에 비로소 개학을 결정했다. 개학 전에 살벌한 설문조사도 이뤄졌다. ‘꼭 이 시국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야겠냐’는 뉘앙스였다. 나는 ‘보낸다’에 체크했다. 스트레스로 죽을 것 같았다. 아이가? 아니, 내가. 물론, 나름 이성적인 이유도 있었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라 인간과 교류가 필요하다. 어차피 이 감염병의 시대가 빨리 끝나지 않을 것이라면, 이 시대에 맞춰 바깥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엄마에겐 어른 사람이, 아이에겐 아이 사람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긴 고민 끝에 아이를 유치원에 보냈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면서부터 나는 ‘돌봄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처음 코로나19가 유행하던 무렵에 모든 공공기관이 문을 닫았다. 때마침 아이의 유치원 겨울방학 기간이었다. 그때 마침 또 회사가 알맞게 폐업해준 덕분에 나 역시 딱히 불편함이 없었다. 유치원이 쉬더라도 내가 쉬고 있으니 아이를 돌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무섭게 변해갔다. 아이의 겨울방학이 끝나질 않았다. 처음엔 1~2주 미뤄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대충 어디 놀러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공공기관이 문을 닫았다는 거다. 갈 곳이 없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이러스의 전파력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전파력은 결국 야외보단 실내에서, 그리고 사람의 밀집도가 높을수록 올라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코로나19의 가장 큰 특징은 건강한 사람보다 기저 질환자에게 더 큰 데미지를 입힌다는 것이었다.
즉, 바이러스에 감염된 나는 안 아프거나 혹은 덜 아프고 지나갈지라도, 내 주변의 기저 질환자이거나 노인이면 사망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시 설명하면, 이 바이러스는, 민폐를 끼칠 수 있는 바이러스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적 배경은, 내가 아이와 함께 집에서 ‘셀프 유폐’를 결정하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그리고 나름, 그래도 이런 분야에 아주 기본적인 지식을 가진 과학자인데, 바이러스 보균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때 우리 땡그리는 뉴스를 보다가 코로나19에 걸리면 아주 큰 일이 난다고 생각해 엄마 아빠를 집 밖에도 못 나가게 했다.
◇ 까다로운 ‘상사’ 모시고 ‘퇴근’도 못하고… 그야말로 지옥이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지 않아 생긴 변화는 돌봄 노동의 강도가 엄청나게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번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경험한 돌봄 노동을 지옥이라 칭하고 싶다. 이 정도면 화탕지옥이나 돌봄 지옥이나 내가 느끼기엔 그게 그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돌봄 노동의 강도는 올라가야 했던 것인가? 아이가 유치원에 가고 나면 대략 나의 하루 스케줄은 이랬다. 아침에 아이를 등원시킨 후 한 시간 정도 산책할 수 있었고, 때로는 노트북이나 책을 들고 근처 카페에 가서 글을 쓰거나, 혹은 창업지원과제를 서치하고 거기에 맞춰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며 보냈다. 중간에 배가 고프면 밥을 먹었고, 그렇지 않으면 간단하게 빵과 커피로 대체할 수 있었다.
아이가 없는 동안 아이 방을 비롯해 집안을 치울 수 있었고, 가사노동을 하면서도 크게 힘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가사노동의 범주가 내가 쉽게, 또 가볍게 해결할 수 있는 범주의 설거지, 요리, 빨래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이가 유치원에 가지 않으면서 발생했다. 아이가 나가지 않는다. 나도 혼자 산책이 불가능하다. 조용히 글을 쓰거나 사업계획서를 쓰겠다고 노트북을 켤라치면 애가 성질을 부린다.
아이와 함께 있을 때, 내 밥만 먹을 수 없고 5대 영양소를 신경 쓰며 아이의 밥을 해줘야 한다. 물론 아이의 요구에 맞춰 오므라이스, 규동, 돈가스 등 특식도 만들어야 했다. 땡그리는 심지어 늘 끼니때마다 국을 찾아서 더 힘들었다.
아이는 간식도 먹어야 한다. 집에 우유, 두유, 과일 등을 비치해놓고 아이의 요구에 맞춰 제공했다. 종일 아이 수발들고 나면 신랑이 온다. 그럼 또 저녁을 먹고, 치우는 것 또한 내 몫이다.
하루를 바쁘게 살았지만, 머릿속에 남는 건 아들 녀석이 점심을 남겼냐, 안 남겼냐 뿐이었다. 그냥 있는 반찬에 먹어주면 좋겠는데, 꼭 생선을 구워 달라는 둥, 고기를 달라는 둥, 계란은 꼭 계란말이로 만들어 줘야 먹고, 최근엔 아침 댓바람부터 군고구마와 구운 달걀을 찾아대서 얼마나 혼났는지 모른다.
만 5세, 땡그리의 요구가 힘들었던 이유는, 이 요구에 온전히 자신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요구에 맞춰 노동해야 하는 엄마를 배려하지 않는, 온전히 자신의 원초적 본능에만 충실한 이 요구가, 아침부터 오므라이스를 해달라거나, 고구마를 구워달라는 이 요구가, 차분하고 냉정하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이과 엄마를 분노하게 했다.
그래서 무기한 개학 연기 발표가 났을 때 내 기분은 마치 돌봄 노동 지옥 구덩이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바이러스만 아니라면 사 먹었겠는데, 밖에서 사 먹는 것에도, 시켜 먹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시켜줄 순 있는데 그걸 차려주고 치워주는 건 온전히 또 내 몫 아닌가. 그 와중에 아이가 심심하니 나에게 함께 놀자고 한다. 엄마는 너 하나 먹이겠다고 아침부터 진이 다 빠졌는데!
그래서 나는, 새삼 돌봄 노동 종사자들의 위대함과, 아이들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조리사 선생님들과 식단 짜는 영양사 선생님들의 위대함, 현장에 계신 많은 분들의 위대함을 몸소 깨달았다.
아이와 관계에 슬슬 파국이 일어날 것 같다는 걱정이 들 즈음, 다행히 유치원이 다시 문을 열었다.
◇ 돌봄이 지옥인 이유,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나는 분명 아이를 사랑하는데, 왜 종일 아이를 돌보는 일은 지옥에 버금가게 힘든 걸까? 생각해본 결과, 아이 돌보는 일은 그저 ‘돌본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노동이기 때문이란 결론을 내렸다.
아이를 오너라고 생각해보자. 종일 오너를 모시고 퇴근 없는 회사에서, 오너의 지시 사항을 쉬지 않고 수행해야 한다. 이러니 많은 양육자들이 아이 돌보는 일을 ‘돌봄 노동 지옥’이라 일컫는 것 아닐까.
유치원, 어린이집 등 많은 돌봄 노동자, 영유아 교육과 관련한 노동자들이 계신다. 이런 전문 돌봄 노동과 달리, 집에서 양육자 한 명이 온전히 해결해야 하는 돌봄 노동을 지옥에 비교하는 이유는 뭘까?
근로시간이 그나마 체계화된 돌봄 노동자들과는 달리 집에서 양육자가 하는 노동은 근로시간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교대할 사람이 없고, 오너인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요구하는 것은 알아도, 상대방의 감정은 읽을 줄 모른다. 그리고 양육자를 퇴근 시켜 주지 않는다. 퇴근도 못 하고 장시간 야근하는 회사에 다니는 격이다. 그러니 독박육아가 힘든 거고, 돌봄 노동을 지옥이라 칭하는 것이다.
배우자가 함께하면 된다고? 애초에 ‘독박육아’라는 말이 왜 나왔을까. 배우자가 돌봄 노동 교대를 안 해줄 때 우리는 독박육아라고 말한다. 배우자가 제때 교대해 주지 않으면 그때 독박육아가 시작되고 육아 지옥이란 말이 나온다.
아이의 사랑스러움은 노동의 강도를 줄여주지 않는다. 그저 아이의 사랑스러움을 통해 아주 잠깐 노동의 시름을 잊는 것이다.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지옥이 아니라, 대체 인력이 없는 장시간 노동의 현장이 지옥이라는 소리다.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이 된다. 적기에 백업 인력이 나타나서 노동을 이어가 주면 된다. 이런 대체 인력 프로세스가 잘 진행된다면, 돌봄 노동이 지옥으로 비유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끝은 결국 어른들의 노동시간과 연결된다. 양육자의 장시간 회사 근로가 없어야 집에 돌아가 돌봄 노동을 수행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결국, 돌고 도는 이야기다. 퇴근을 제때 해주면 된다.
*칼럼니스트 윤정인은 대학원생엄마, 취준생엄마, 백수엄마, 직장맘 등을 전전하며 엄마 과학자로 살기 위해 '정치하는엄마들'이 되었고, ESC(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에서 젠더다양성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프로불만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은 회사 다니는 유기화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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