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대통령님 출생률 말고 자살률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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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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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
2021. 03. 08. 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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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
사무국 |
010-2540-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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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포 |
2021. 03. 08. 월 |
총 6매 (별첨 0건) |
3.8 세계 여성의 날 기자회견 ‘여성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대통령님 출생률 말고 자살률을 보십시오! |
<페미니즘당 창당모임+정치하는엄마들 공동기자회견 취지>
살기 위한 연대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 다른 성별, 세대의 자살률이 미미하게 감소하는 가운데 20대 청년 여성 자살률만이 43% 급증했다. 가정 내 아동학대 사망 사건과 어린이집 등 돌봄기관 안에서 자행되는 아동학대 사건 보도가 말 그대로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 성소수자 인권운동가들의 잇단 죽음으로 우리 사회 만연한 차별과 혐오를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2020년은 재난이었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며 의료진의 헌신은 착취와 구분하기 어려워졌고, 소상공인의 희생은 피눈물이 되었다. 아이들은 함께 이야기 나누며 밥 먹는 게 무엇인지 잊게 되었고, 엄마들은 고용불안정과 돌봄노동 사이에서 비명을 질렀다. 경제적, 정서적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청년 여성들은 죽음을 택했다. 죽음을 택했으나 실패한 사람들은 고립감과 우울을 호소하며, 살기 위한 연대를 모색한다.
함께 모여 목소리를 내는 행위가 일제히 중단된 지금, 여성의날을 맞이하여 우리는 여성의 세대 간 연대를 도모한다. 기혼과 비혼, 엄마와 딸, 기성세대와 청년이 서로의 입장을 공유하고 공통의 문제의식을 말하고자 한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에,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 그리고 함께, 이 연결된 고통을 직시하기를 요구한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말한 것들은 새롭지 않다. 모두 알려진 사실이다. 알기 때문에 듣지 않고 보지 않는 것, 알고 있지만 하지 않는 것, 알고 있지만 ‘나중에’ 하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 나쁘다. 이 땅에 태어난 생명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지금, 태어날 생명의 수를 말하는 것은 시민을 보호하고 인권을 수호할 정부의 의무 외면이자 책임 방기이다. 다음 세대와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지금 여기의 고통을 들여다보고 경청하는 것이다.
우리는 3.8 여성의 날을 맞아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에게 고한다. 지금은 국가가 감히 출생률 운운해서는 안 될 때라고, 20대 여성의 죽음에 주목하고 죽음의 행렬을 막기 위한 노력부터 해야한다고 요구한다.
<기자회견문>
대통령님 출생률 말고 자살률을 보십시오!
무엇을 문제로 볼 것인가 - 페미니즘당 창당모임
국가의 관점에서 저출생과 ‘비혼 트렌드’는 늘 문제였다. 그러나 청년 여성의 관점에서 저출생이나 비혼은 문제가 아니라 인과관계를 포함하는 현상이자 자구책에 가깝다. 여기서 ‘청년’ ‘여성’ ‘문제’를 둔 당사자의 목소리와 사회/국가의 해결책 간 괴리가 시작된다. 무엇을 문제로 볼 것인가, 부터 부딪히는 것이다.
한국은 사회복지의 많은 영역을 가정과 개인에 미루어 국가를 유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굳이 통계를 대지 않아도, ‘개천 환경을 바꾸자’는 말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익숙하고, 평범한 사람도 잘 살도록 사회구조를 바꾸자는 말보다는 자수성가 신화가 환영받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회복지가 자라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정서적, 물리적 지원은 모두 가정의 몫이 되었다. 자녀가 어릴 땐 부모의 양육 의무에, 자녀가 성장하면 부양 의무에 포함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출산, 육아, 가난, 폭력의 문제는 ‘집안일’로 불리는 사적 영역이 된다. 그렇게 남아선호사상, 독박가사, 독박육아, 가정폭력, 빈곤의 대물림 같은 사회적 문제는 꾸준한 이슈화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국가의 영역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국가 차원의 노력과 발전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당사자들이 체감하기엔 여전히 부족하다.
그렇다. 이것은 쌓인 체감의 문제다. 국가를 위해 결혼하고 출산하란 말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시대에, 대부분의 청년 여성에게 한국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지 않거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나라이다. 취업시장에 발들이는 순간부터, 여성은 채용과 승진의 단계마다 ‘유리문’과 ‘유리천장’에 가로막힌다. 이런 상황에서 추후 닥쳐 올 여성의 고용단절 위험을 줄이는 가장 빠르고 개인적인 방법은 일단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당장 내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시대다. 평균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사람에게도 ‘내 집 마련’은 로또에 가깝다. 노동소득만으로 미래가 감당이 안 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며 ‘수저론’, ‘조물주 위에 건물주’를 지나 주식이나 ‘로또 청약’이 각광받고 있다. 이것들의 공통점을 단순하게 보자면 불로소득이다.
단발적인 지원 정책들은 이 중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때문에, 많은 청년 여성들에게 비혼과 비출산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으로 얻은 교훈이자 자구책이다. 그 청년 여성으로서 힘주어 말하자면, 우리가 체감하는 지금/여기의 문제는 코로나19 재난 시대에 닥친 ‘조용한 학살’이다.
보건복지부 자살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0년 남성 자살자 수는 8.9% 감소한 데 비해 여성 자살자 수는 4.8% 늘었다(한겨레, 2020.12.13일자). 그 중 2020년 상반기 20대 여성 자살사망자 수는 전년 대비 43% 증가하였다(한겨레, 2020.12.03일자). 이 증가폭은 모든 세대와 성별을 훨씬 웃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자살의 전조증상이 되기 쉬운 우울증 비율 역시 20대 여성의 증가폭이 가장 컸다(한겨레, 2020.12.13일자). 전체 자살률만 봤을 때 남성이 여성보다 높고 노인이 청년보다 높은데도 20대 여성 자살률에 집중하는 이유다.
이것이 개인의 우울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임을 이미 각 분야 전문가가 지적했다. 코로나19로 장기화된 재난 시국은 노동시장을 중심으로 젠더화되고 계급화된 사회 실태를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2020년 초, 고용한파에 직격타를 맞은 것은 비정규직과 서비스업에 가장 많이 분포한 20대 여성이었다. 페미니즘 리부트가 물 위로 띄운 젠더화된 폭력과 위협 역시 좀 더 치밀해졌다. 있을 곳이 집뿐일 때 폭력에 가장 쉽게 노출되는 것은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여기에, 국가도 가정도 해주지 못하던 정서적 지원이 비대면을 부른 재난 앞에 끊겼다. 서로 마주보고 끌어안고 다독이는 시간이 사라졌다. 사회적 안전망의 사각지대에서 각자도생하며 버티어 오던 청년 여성들이 재난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
궁지에 몰린 목소리가 숫자로 드러나자 정부에서 급하게 내놓은 대책의 효과는 아직 체감하기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끊임없이 통계로, 정책으로, 공약으로 소환되는 저출산 대책은 여전히 국가의 입장만 말한다. 2021년, ‘서울시 임산부 가이드’는 출산을 위해 입원하기 전에 가족의 생필품을 점검하고 옷을 정리해두며 밑반찬도 준비하기를 권장했다. 공영방송 뉴스는 사상 첫 인구 자연감소라며 호들갑을 떨고 ‘90년대생 부모’들이 ‘희망’인데 가치관 변화와 코로나19의 경제적 타격이 악재라고 했다(케이비에스, 2021.02.24일자). 이 시국에 이런 관점은 조금 더 꼴같잖다.
문제 해결은 문제를 직시하는 데서 시작한다. 저출생도 국가의 관점에서 문제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 먼저 문제로 삼아야 하는 것, 주목해야 하는 것은 태어난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청년 여성들의 목소리다. 청년 여성들의 누적된 고통을 국가가 결자해지의 문제로 여기고 있냐는 질문이다. 노동시장과 주거로 대표되는 삶의 질, 출산할 권리도 하지 않을 권리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재생산권, 일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력 등 광범위한 문제가 청년 여성 앞에 쌓여 있다. 문제의 크기만큼 국가에 쌓인 서러움 역시 해결되지 못한 채 자꾸만 커진다. 이것은 코로나19가 불러온 인재이며 심각한 문제다. 이것이 문제다. 무엇이 문제인지, 국가는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살기 싫은 사회, 낳기도 싫을 수밖에 - 정치하는엄마들
유례없는 감염병 사태로 모두가 힘들다. 20대 청년 여성 자살률이 전년 대비 43%나 늘었다고 한다. 감염병 사태 이전에도 대한민국 청소년(9~24세)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었다.(시사저널, 2020.5.25일자)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8년 자살위험 학생은 2만3324명이었으며 이는 2015년과 비교했을 때 약 270% 폭증한 수치다. 2019년 10대 남자 청소년 자살 시도율이 1.9%, 같은 기간 10대 여자 청소년 자살 시도율은 4.0%였다. 자살·자해의 원인을 하나로 단정할 수 없지만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각박한 삶이 버거운 청소년들이 급증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와중에 정부는 여성들에게 왜 애를 안 낳느냐고, 출산율이 떨어졌다고, 인구절벽이라고 나라 걱정이 우선이다. 도대체 살아있는 이들은 안중에 없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영유아·아동·청소년·청년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소식이 이어지는데, 정부는 무슨 염치로 출산을 장려하는가? 고도의 입시경쟁에 매몰된 교육환경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신자유주의라는 정글에서 각자도생하라는 가르침밖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손에 잡히는 행복감이 과연 있을까? 밟고 밟히는 게 자연스러운 사회 속에서 그 구성원들은 과연 행복에 이를 수 있을까?
국가가 그렇게 장려하는 결혼과 출산을 선택한 여성들의 삶은 어떤가? 멀쩡히 다니던 직장에서 배제되고, 선택의 여지 없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도, 국가를 비롯하여 그 누구 하나 ‘출산한 여성’의 박탈당한 권리를 옹호하지 않는다. 그리고 생존의 기반이 되는 출산·육아·가사·돌봄 노동의 가치를 천시하고 ‘아줌마’라 불리는 계층은 차별과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과연 잘살고 있는가? 국가가 애지중지하던 ‘출생아’들이 공적 돌봄의 부재로, 즉 국가의 방임으로 하염없이 죽어간다. 이 땅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단지 생모·생부가 돌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외 입양 길에 오른다. 국가는 입양 업무마저 민간에 위탁하여, 입양아동들을 매몰차게 나라 밖으로 내쫓는다. 수많은 아이들이 어린이집·유치원에서 아동학대의 희생자가 되고, 관련 보도가 끊이질 않는데 국가는 CCTV 설치 외에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 가정 내 아동학대로 분리조치 되어도 단기·장기보호시설을 전전하는 동안 상담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2~3년 뒤에 원가정 복귀되어 또다시 맞아 죽는다. 교육당국과 학교를 믿지 못한 학생들이 SNS로 학교성폭력을 고발해도 가해교사들은 교단으로 돌아오고, 학생들에게 ‘너도 페미니스트냐’며 조롱한다. 만들어진 자동차 수보다 훨씬 적게 ‘태어난 아이들’이 길에서 다치고 죽어도 법은 사람이 차를 피하라고 한다. 햄버거병에 걸린 아이는 매일 10시간씩 투석을 하는데 대장균에 오염된 패티를 납품받아 판매한 햄버거 회사는 처벌받지 않는다. 학교는 ‘교육’만 하는 곳이고 ‘돌봄’은 학교의 역할이 아니라면서 아이들을 학교 밖으로 내몰면 아이들은 보호자가 퇴근할 때까지 ‘학원 뺑뻉이’를 면치 못한다. 아이들은 입시몰입 경쟁교육을 이기지 못하고 병들거나 죽음을 택한다. 현장실습이라는 명목으로 학교 밖에서 일하던 학생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착취되다가 다치고 죽는다. ‘노키즈존’을 ‘영업의 자유’라며 방조하는 국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어디서도 존중받지 못하고 어리다는 이유로 차별당하고, 배제당하고, 혐오의 대상이 되고, 행복과는 멀리, 죽음과는 가까운 거리에서 전혀 잘 살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태어날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 출생률이 세계 최저일 때는 이유가 있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이 안전함을 느끼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나이가 적든 많든, 홀로 살든 함께 살든, 아이가 있든 없든, 장애가 있든 없든, 성정체성이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살고자 하는 방식을 존중받아야 한다. 정부는 모든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동권과 주거권, 의료권, 돌봄권을 보장해야 한다. 출생률을 올리려고 하기 전에, 자살률을 낮추려고 노력하라! 온갖 부당한 죽음을 막는 데 집중하라!
2021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페미니즘당 창당모임, 정치하는엄마들
<발언1> 이가현 페미니즘당 창당모임 공동대표
나는 살고 싶다
요새 여초커뮤니티를 들어가보면 죽고싶다는 이야기가 많이 보입니다. 정말 여성들의 자살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실감납니다. 맨날 집에만 있으니 우울하다는 말은 기본이고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소득이 확 줄어서 생활 반경이 좁아졌다고 합니다. 일상에서 여성혐오적인 발언과 성희롱 성추행에 노출된 여성들이 그나마 몇 년간 페미니즘을 만나고 거리에 나오면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위로를 받고 일상을 살아갈 힘을 냈다면 지금은 그것마저도 사라진 느낌입니다. 2019년 설리와 구하라의 자살 이후 여성들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일이 이어집니다. 기운이 쭉 빠집니다. 여성들을 살리기 위해 여성인권 운동을 시작했는데, 요새는 계속 떠나보내고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성자살율이 높아진다고 아무리 기사가 나와도 정부에서는 이렇다할 대책이 없습니다. 여성 취업률이 남성에 비해서 급감하고 여성들의 소득이 낮아지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가정폭력에도 취약해진다는데 정부는 엉뚱하게 인구절벽이니 출생률이 0점대로 떨어졌느니 90년대생 부모들이 희망이라느니 하는 말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취약해지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거나 가정폭력에서 구출해낼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들을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로 갈아치우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 주위에서는 어차피 안정된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습니다. 이렇게 일자리가 없고 가난한 여성들은 죽어서 점차 사라지고 좋은 일자리를 가진 여성이나 좋은 일자리를 가진 배우자가 있는 여성들만 아이를 낳아서 대를 잇습니다. 자살율은 신경도 쓰지 않고 출생율만 따지는 정부를 보면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은 멸종시키고 부유한 사람들만 생존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최근 영화 승리호에서 오염된 지구는 멸망시키고 부유한 사람들만 데리고 화성에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음모처럼 말입니다.
보궐선거에 나온 후보들은 죄다 부동산 공약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부동산 정책에도 코로나 상황에 취약해져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자리는 없습니다. 평당 천만원의 아파트, 누군가는 그 정도 집값이 적정집값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은 단 한 평의 아파트에서도 살 수가 없습니다. 이미 집을 가지고 있고 집을 구매할 능력이 있는 안정된 일자리의 중산층까지가 부동산 정책의 수혜대상이 됩니다. 이러니 우리는 각자도생하는 것밖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혼, 비출산이 엄청 좋아서 한다기보다는 내 삶에 위험이 되는 요소는 최대한 없어야 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 여성들의 대책인 것입니다.
청년들의 비혼과 비출산은 절대 허공에서 생겨난 경향이 아닙니다. 결혼과 출산을 한 윗세대 여성들의 증언과 청년 여성들이 살아오면서 목격한 것들을 토대로 개개인들에게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한 것입니다. 생존이 보장되어야 생존보다 더 나아간 자아실현과 관계에 대한 욕망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개인들이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윽박지르는 시대에 왜 출산율을 운운하면서 여성들에게 죄책감과 부담감을 심으려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입니다. 여성의 생존권과 인권을 상징하는 빵과 장미이지만, 자살율과 출생률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숫자로 사는 삶에는 빵도 장미도 없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페미니스트 정부를 자임했습니다. 수많은 다른 인권에 나중에를 외치면서 페미니스트만은 약속했던 대통령 당신이 저는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정부로서 해야할 최소한의 역할마저도 저버리고 있는 청와대를 규탄합니다. 자살율 뒤에 있는 사람을 보고, 여성들을 살려내십시오. 저는 살고 싶습니다.
<발언2> 김정덕 정치하는엄마들 공동대표
우리는 ‘인구’이기 전에 ‘인간’입니다
제 속엔 곤히 잠든 아이의 발을 잡고 울었던 수많은 밤들이 맺혀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아동 성착취물로 돈을 번 범죄자가 가볍게 풀려난 날, 텔레그램 디지털 성착취로 청소년들이 검거된 날, 성폭력을 고발한 학생들이 가해교사가 학교로 돌아왔다며 익명으로 다시 고발하기 시작하던 날, 저는 마치 시커먼 구덩이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과연 이 아이가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되지 않고 온전히 자랄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에 늘 체해 있습니다.
저는 요즘 아이와 차마 뉴스를 볼 수 없습니다. 교사가 씨씨티비 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일이 벌어집니다. 어린이집에 돌봄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양육자들이 ‘당장 다 그만두고 진작 아이를 보듬지 못해 미안하다’며 가슴을 치며 흘리는 눈물에 억장이 무너집니다.
코로나 위험으로 공적돌봄이 끊긴 자리마다 아이들은 생사의 기로에 놓여있습니다. 지역에서 아이들을 물리적 정신적으로 보듬는 공간인 학교가 감염병을 이유로 문을 걸어 잠궈, 많은 아이들이 마음과 허기를 채울 수 없게 됐습니다.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야할 교육권과 돌봄권은 이기적인 어른들의 편의대로 망가졌습니다.
대체 양육자들은 언제까지 아이들에게 죄책감을 가져야 합니까? 왜 자기를 낳았냐고 책망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왜 죽지 못해 산다며 자조해야 합니까? 대체 이 사회는 언제까지 어린 이와 그들을 돌보는 이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을 모른 채 할 겁니까?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엄마아빠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 돌봄기관이든, 지역아동센터든, 어린이집이든, 유치원이든 그 어떤 기관에 다니든 대한민국 모든 어린이들은 서울시청 직장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들처럼 6천원어치 밥 좀 먹이면 안 됩니까?
대한민국 아이들 27만명 태어날 때 자동차가 351만대 생산되니까, 애들보다 차가 더 많으니까 교통사고로 다치고 죽는 거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잔인한 말할 자유’, ‘노키즈존’ 딱지 붙이며 ‘장사할 자유’를 내세우는 이들을 왜 내버려두는 겁니까? 그건 ‘자유가 아니라 명백한 아동 혐오이고 차별이다’ 국가는 왜 제재하지 않습니까?
‘여자는 군대 안 갔으니까 월급 덜 받는 거 어떠냐’,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아이는 언제 낳을 거냐’ 아직도 핵쓰레기 같은 질문을 하는 2021년 대한민국 회사들에게 ‘성차별’ 인권 침해로 당장 패널티 주지 않는 겁니까?
연약한 권리를 빼앗고 무기력을 심으려는 국가는 들으십시오.
세 치 혀로, 손가락질로, 거대한 침묵으로 쌓아올린 배제의 정치로 인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잃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배울 의무가 있습니다.
정부와 국회는 여성을 ‘자궁’으로만 보고, 아이를 ‘머릿수’로만 보는 국가관 당장 버리고, ‘조용한 학살’, ‘죽음의 행렬’을 멈추라는 ‘살려달라’는 절박한 사람들의 외침을 새겨 들으십시오.
우리는 셀 수 있는 <인구>이기 전에 살려야 할 <인간>임을 잊지 마십시오.
아이들과 함께 지금, 여기, 살아있는 <사람>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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