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 ‘한국식 공정담론’ 불공정은 NO, 불평등은 OK?

[미디어오늘] ‘한국식 공정담론’ 불공정은 NO, 불평등은 OK?

<2021. 4. 22. 손가영 기자>

- “52개국 중 52위, 르완다보다 낮은 사회관용”…전문가들, “능력주의만 남은 ‘한국식 공정’ 실질적 평등으로 채워야”

각자도생 경쟁을 전제로 기회의 평등만 강조한 공정담론은 사실상 차별논리로 귀결된다며 실질적 평등을 지향하는 논의로 바꿔내자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문제의식을 공유한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모여 현재 고착화된 공정 담론에 대응할 방향을 모색 중이다. 



가칭 ‘공정담론의 공공적 재구성을 위한 대책회의’(대책회의)는 지난 20일 “공정담론, 무엇이고 무엇 때문이며 해결방향은?”이란 주제로 토론회를 열어 현재 공정담론의 내용과 문제 및 필요한 대응 방향 등을 논의했다. 지난달 활동을 시작한 대책회의는 민주노총 산하 공공운수노조, 서울본부, 전국교육공무직본부 등과 정치하는 엄마들,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등 단체까지 현재 13개 단체가 모였고 계속 확대 중이다. 



공정담론

▲‘공정담론의 공공적 재구성을 위한 대책회의’(가칭)가 20일 민주노총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왼쪽부터 이상윤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차장, 김동근 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 이가현 활동가,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활동가, 박권일 평론가, 공성식 공공운수노조 정책기획실장. 사진=대책회의

 



한국은 사회적 신뢰와 소수자에 대한 관용이 낮은 사회다.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s Survey)’ 결과가 대표 지표다. 2015년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의 결과 분석에 따르면 한국은 ‘관용성’ 평가에서 52개국 중 52위를 차지했다. ‘자녀에게 가르칠만한 내용’을 묻고 독립성, 성실성, 절약 등 11개 덕목에서 복수로 선택하게 했더니 ‘관용성과 타인 존중’을 한 번이라고 꼽은 사람이 45.3%밖에 되지 않았다. 1인당 GDP가 1807달러에 불과한 르완다(56.4%)보다 낮다. 



박권일 평론가는 토론에서 세계 가치관 조사 결과를 전하며 “(한국은) 경제성장과 안보에 집착하면서도 사회적 신뢰와 소수자와 이방인에 대한 관용이 지나치게 적은 사회”라고 말했다. 이어 “조사 결과를 보면 통상 국가 경제적 수준이 높은 만큼 사회 관용성도 같이 오르는데, 한국은 아무리 경제 수준이 올라가도 사회적 신뢰나 관용이 나아지지 않았다”며 “1981년 조사 이후 거의 40년 간 요지부동”이라고 지적했다. 



박 평론가는 지표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 가치관에 대해 “노력과 능력에 따른 차등 분배는 극단적으로 선호하지만 평등은 불호한다”고 지적했으며 “장애인·동성애자 등 소수자에 대한 차별, 효율성·가성비·순위에 대한 집착, 공공선에 대한 냉소, 생태위기에 대한 무관심” 등을 열거하며 “가치의 위계서열이 명확하고 모두가 서울대와 강남 아파트를 열망하는 사회” “약자에게 지옥보다 가혹하고 승자에게 천국보다 안락한 사회”라고 비유했다.



‘민주주의 지수’ 지표도 20년간 정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2006년부터 167개국의 민주주의 제도, 문화 등을 분석해 발표하는 지수다. 박 평론가는 “한국은 최근 20년 동안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 최하위(23개국 중 23위) 또는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 최상위(52개국 중 1~2위)를 시계추처럼 오갔다”며 그 이유로 “제도 면에선 중간 수준에 해당하지만 정치문화 면에서 다른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에 크게 뒤진다”고 설명했다. 



공정담론

▲출처 = '이중위험사회의 재난과 공공성: 한국, 일본, 미국, 네덜란드, 독일의 비교',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장덕진 외, 2014)

 



대책회의는 이 같은 실태가 한국 특유의 능력주의 중시와 연관됐다고 본다. 한 사회의 가치관과 민주주의 성숙도는 밀접히 연관됐다는 점에서다. 박 평론가는 한국 능력주의의 특징으로 “특정 시험을 통과한 이에게 지나치게 큰 특혜가 주어지는 지대효과”를 꼽았다. “어떤 생산적인 기여 없이 시험 합격이란 사실만으로, 불합격자는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교육→취업→소득→계급’ 불평등 세습, “능력주의는 허구”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상임활동가는 “능력주의는 개인 능력에 따른 분배와 인정의 시스템인데, 과연 가족이나 신분 등이 아닌 개인이 홀로 만든 귀속된 능력이 존재하는가? 그런 개인 능력을 시대와 사회를 초월해서 측정할 수 있는가”라고 물으며 “오늘날의 능력주의는 허구”라고 주장했다. 



특히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과정에서 불거진 공정 논란에 “1998년 파견법, 기간제법이 제도화된 후 비정규직이 확산되기 전까지 (해당 일자리는) 학력·시험과 관계없이 ‘정규직’이었다. 안정된 일자리가 ‘능력자의 자리’가 된 건 경제체제의 변화, 신자유주의 확산에 따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안정된 일자리라는 노동권은 학력이 높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니다. 안정된 일자리에 대한 권리는 모두의 보편적 권리”라고 덧붙였다. 



공공기관 정규직 청년들의 반발이 어떤 조건에서 비롯됐는지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동근 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은 “정규직이 예외적 일자리로 자리매김한 가운데, 문재인 정부 정책으로 공공부문의 정규직화가 ‘예외적으로’ 열린 것에 가깝다”며 “민간으로 확산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분석·토론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차별 해소는 ‘모두가 정규직이 되는 길’이기보다 ‘예외적인 일자리를 둘러싼 갈등’으로 인식됐을 수 있다”고 짚었다. 



김 조직국장은 사회 분배 정의를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 △필요에 따른 분배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분배 △평등한 분배로 나눈 뒤, 지금은 능력주의에 기반한 ‘응분의 몫에 따른 분배’에 지나치게 치우쳐있는 게 문제라고 진단하며 “능력에 따른 분배격차를 줄이는, 즉 평등한 분배와 필요에 따른 분배 원칙을 조화시키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근본적으로는 “개인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고, 교육과 노동의 재구성을 통해 능력의 격차를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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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회사 전환을 거부하다 해고된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요급수납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서울톨게이트 캐노피에 올라 농성하는 모습. 사진=민주노총 세종충남지역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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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전동차 경정비 업무를 맡았던 용역업체 소속 노동자들 모습. 노동존중을 표방한 서울시는 용역노동자들을 2017년부터 직접 고용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서울교통공사 정규직원들이 불공정하다고 반발했다. ⓒ민중의소리



공채 폐지·누진세 강화부터 소선거구제 개혁까지



박권일 평론가는 능력주의가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매김했기에 당위적으로 평등만 강조해선 효과가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능력주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교육은 필수적이고, ‘지나친 특권’을 겨냥해 특권을 약화시키고 권력을 분점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공채 시험 폐지, 누진세 강화나 최저임금에 연동한 최고임금제 등 전면적인 재분배 정책의 도입도 강조했다. 



공성식 공공운수노조 정책기획실장은 노동의 측면에서도 평등과 필요의 분배 원리를 복원하자고 제안했다. 한국사회는 동일가치노동-동일임금 원칙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지만 이것만 강조하면 ‘다른 노동에 대한 차등 임금’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용자는 직무 분할·조정을 통해 차별을 합리화할 수 있다”며 “존엄성을 보장하는 최저 생계의 확보(필요의 원리)와 다른 노동이라 해도 임금 차가 너무 커서는 안 된다는 평등 원리가 필수”라고 강조했다. 



거시적인 구조 개선도 강조됐다. 박 평론가는 권력이 소수에 집중된 한국의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 개혁을 강조했다. 사회 전체의 분권이 이뤄져야 평등주의적 제도와 정치 문화가 싹 틀 수 있다는 취지다. 그는 “무력화된 비례대표제 취지를 살리고, 보수 양당의 경제 정책과 제한적인 정치적 대표성을 극복할 유력한 진보정당이 출현해야 한다”고 밝혔다.



<출처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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