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뒤로가는 아동콘텐츠 <1>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에 빠지다
연필까지 남녀 구분…숨막힐 것 같은 '여성=분홍' 용품들
<1>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에 빠지다
편집자주
아이들의 우주는 무한합니다. 여기에 알록달록 다양한 빛깔을 더해줘야 할 동화책과 교과서, 애니메이션이 되레 이 세계를 좁히고 기울어지게 만든다면요? 한국일보는 4회에 걸쳐 아동 콘텐츠의 '배신'을 보도합니다.
유아 애니메이션 '로보카폴리'를 토대로 출판사 로이비쥬얼이 만든 책 '날아라 킥보드'의 한 장면.
케빈(파란색 옷을 입은 아동)이 동생의 분홍 킥보드를 가지고 나온 것은 내내 놀림감이 된다.
킥보드와 인라인스케이트 중 어느 게 빠른지 시합하기로 한 두 남자아이. 이 중 한명이 동생의 분홍색 킥보드를 타고 나오자 친구가 비웃는다. “우하하! 너는 이렇게 웃기게 생긴 킥보드로 나랑 시합을 하겠다는 거야?” 책의 문구에는 '두기가 케빈의 분홍색 킥보드를 보고 웃으며 말했어요'라고 비하의 대상이 '분홍색'임을 분명히 했다. 애니메이션 로보카폴리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책 ‘날아라 킥보드!’(로이비쥬얼)에 담긴 내용이다.
색은 죄가 없다. 분홍은 여러 아름다운 색깔 중 하나이다. 그러나 여성을 분홍색에만 묶어두고, 그 색에 열등성을 부여하면서 색깔은 권력관계가 됐다. 어린이 콘텐츠의 여성 캐릭터는 숨막힐 정도로 분홍에 종속된다. 남성 캐릭터의 색깔은 더 다양하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 중에 요즘은 크레파스도 남녀 구분을 한다고 하면 깜짝 놀랄 것이다. 사회의 성평등 의식은 높아지고 있는데 어린이 콘텐츠와 용품의 남녀 구분은 불필요한 영역까지 확대됐다. 시계가 거꾸로 가는 영역이다. 2차 성징이 나타나기도 전에 어린시절부터 여자와 남자의 다름을 강조하며 사고의 확장을 억압하고, 서로를 타자화하도록 하는 사회는 올바른 것일까. 어린이 세계를 점령하고 있는 색깔 권력을 들여다봤다.
남자와 여자가 쓰는 크레파스가 따로 있다고요?
온갖 캐릭터들부터 기저귀, 노리개 젖꼭지, 색연필, 크레파스, 공책, 스케치북, 연필, 칫솔, 킥보드까지…. 어린이 용품과 콘텐츠 중 남녀 구분이 없는 것을 찾기가 더 어렵다. 상품 정보에 명시적으로 남아용, 여아용을 구분한 것도 있었고, 분홍색과 파란색 두 가지 제품만 만들어 성별에 따라 한 가지만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경우도 많았다.
과거 어린이들이 썼던 크레파스(위 사진)는 성별 구분이 없었다.
하지만 요즘 판매되는 크레파스(아래 사진)는 만들 때부터 분홍은 여아용, 파랑은 남아용으로 만든다.
한국이 특히 심하다. 온라인 쇼핑몰 ‘네이버쇼핑’의 주간(4월 7~13일) 인기 브랜드에서, 크레파스와 색연필 상위 각 5개(국내외 제조사 혼합) 회사의 제품을 조사한 결과 동아, 모나미 등 국내 업체만 남녀를 구분했다.
국내외 기저귀 제조사의 남녀 구분. 그래픽= 강준구 기자
수입 기저귀는 상위 10개 브랜드 중 1개만 남녀를 구분했지만 국내 기저귀는 10개 중 6개 회사가 남녀를 구분했다. 수입 기저귀 중에선 일본의 ‘군’ 기저귀만 남녀를 구분했고 미국 유럽 등에서 만든 기저귀는 남녀 구분이 없었다. 하기스, 보솜이, 마미포코 등 국내 브랜드 대부분은 남녀를 구분해 판매하고 있었다. 여아용에는 분홍색 계열, 남아용은 푸른색 계열의 그림이 프린트돼 있다.
국내 기업인 LG유니참이 만든 '마미포코' 기저귀(위 사진)는 분홍색 바탕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아기 그림이 여아용, 파란색 바탕에 두 팔을 든 아기 그림이 남아용이다. 반면 국내에 수입 판매되는 스웨덴의 '리베로' 기저귀(아래 사진)는 여아, 남아의 구분이 없으며 그림 역시 성별 구별이 없다.
또한 한국일보가 조사한 인터넷TV와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의 인기 애니메이션 21개 중 16개(76%)가 여성 캐릭터는 분홍 혹은 보라색 계열, 남성 캐릭터는 파랑이나 초록색 계열로 표현됐다.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이 지난해 EBS에 방영된 애니메이션 19개 프로그램 70편을 분석한 결과도 비슷하다. 총 720명의 캐릭터 중 여성은 61.4%가 분홍 등 붉은 계열로 표현됐고, 푸른색으로 표현된 것은 3.6%뿐이었다. 남성은 푸른색이 28.6%로 가장 많았지만 붉은 계열(24.1%) 등 다양한 색깔을 가진 인물로 표현됐다.
동화책에서도 상상 속 동물인 용조차 엄마는 분홍색, 아빠는 파란색(노래하는 꼬마 용 리노)이고 로봇도 붉은 계열은 여성, 푸른색 계열은 남성이다.
마케팅에서 시작된 굴레, 아이들 가능성 제한
런던대 버크벡칼리지 조교수인 개빈 에번스의 책 ‘색깔 인문학’ 등에 따르면 1950년대까지만 해도 분홍은 남자의 색깔이었다. 1897년 뉴욕타임스는 ‘아기의 첫 번째 옷’이라는 기사에서 “분홍은 대개 남자아이의 색으로, 파랑은 여자아이의 색으로 간주되지만 어머니들은 그 문제에서 자신의 취향을 따르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화장품 회사가 ‘분홍은 여성스럽다’며 분홍과 여성성의 연관을 강조하는 마케팅 등을 하며 분홍이 남성 색깔에서 여성의 색깔로 바뀌었다. 에번스는 책에서 “여자아이들의 분홍 선호 취향은 매우 최근의 현상이었을 뿐”이라며 “분홍에 대한 여성의 선호는 유전자가 아니라 문화와 관계 깊다”고 지적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데이비스대(UC데이비스) 사회학 박사 엘리자베스 스위트의 분석 결과, 1970년대 2%였던 성별 구분 장난감이 1990년대 이후 50% 이상으로 급증했다. 이는 "육아용품과 장난감을 성별이 다른 동생이 물려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이 많다.
제조사가 만들 때부터 '여아용'으로 만들었거나, 유통업체가 온라인 상품 소개에 '여아용'이라고 명시하며 팔고 있는 제품들.
이런 색깔 구분은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도 제한한다. 정경운 가톨릭관동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과 개성, 능력을 알아가는 유아가 특정 색깔이나 성 역할에 계속 노출되면 '나는 이걸 좋아하면 안 되나 보다'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고 제한하게 될 수 있다"며 "아이가 다양한 것들을 탐색하고 선택권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개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업계의 인식은 안이하다. 분홍색 비버 ‘루피’ 캐릭터로 자주 비판받는 ‘뽀롱뽀롱 뽀로로’를 제작한 최종일 아이코닉스 대표는 “일상적으로 분홍색 계열의 옷은 여성들이 입는 현실을 애니메이션에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애니메이션 ‘콩순이’를 제작하는 영실업 측도 송이의 분홍 드레스에 대해 “실제 현실에서 분홍색 공주풍 옷을 좋아하는 여아가 많다는 점을 반영한 것”이라고 밝혔다. 동아연필 관계자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성별에 따라) 핑크색을 좋아하고 파란색을 좋아하는 시기가 있다”라고 말했다. 색깔 구분의 환경이 아이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간과한 것이다.
'엉뚱발랄 콩순이와 친구들'의 등장인물인 콩순이(맨 오른쪽)와 송이(오른쪽 세 번째)는 각각 보라색,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남성 캐릭터인 범이(두 번째)는 파란색 모자와 신발, 빨간색 점퍼 등 더 다양한 색의 옷차림을 하고 있다.
다행히 변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기업들도 있었다. 문구업체 모나미는 “그동안 관행적으로 색깔을 사용했다”며 “향후 모나미에서 출시하는 모든 제품에 성별 표기를 제외하고 성 역할 고정관념을 연상할 수 있는 색상 구분을 지양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책 ‘노래하는 꼬마 용 리노’의 출판사 스마일북스 관계자는 “성별 고정관념의 의도를 갖고 표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의견이 있다면 추후 (부모 용의) 색을 변경하겠다"라고 말했다.
하기스 기저귀를 만드는 유한킴벌리는 “남아와 여아의 생식기 위치에 따라 소변을 빨아들이는 흡수체 분배가 다르다”고 광고해왔으나, 하기스 고객센터에 문의하니 “여아용, 남아용 둘 다 흡수체가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흡수력에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결국 기저귀에 그려진 그림 외에 기능상 차이가 없는데도 남녀를 구분했다는 얘기다. 유한킴벌리 측은 "최근 디자인, 콘셉트 측면에서 남녀 구분이 없어야 한다는 소비자의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내부적으로 이를 보완해가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기업 마케팅이 만들어낸 색깔 구분 세상의 결과는 이렇다. 2007년 캐나다에서는 전학 온 남학생이 분홍색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친구들로부터 괴롭힘과 폭행을 당했다.
'정치하는 엄마들'은 지난해 "제품 생산, 유통업체의 남아용, 여아용 성별 구분이 대한민국 아이들에게 '성역할 고정관념'을 강요하고, 원하는 색상 및 원하는 일을 선택할 자유를 현저히 침해하고 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1년 넘게 답변을 미룬 인권위는 4일 의견을 표명할 예정이다. 정부에서 색깔 구분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것은 처음으로, 인권위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바꾸기 위해 의미 있는 내용을 담을 것으로 알려졌다.
<글 싣는 순서> 뒤로 가는 아동콘텐츠
<1>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에 빠지다
<2> 모욕을 주는 성교육
<3> 재미로 포장된 외모 비하
<4> 차별 없는 아동콘텐츠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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