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장하나의 내 인생의 책]④날개 - 이상
[장하나의 내 인생의 책]④날개 - 이상
그 시절, 우울했고 안도했다
‘대체 언 놈이야!’ 소리 없이 외치는 동시에 내 자취방을 수시로 드나들던 친구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동재, 동화, 경원이, 영인이, 용재, 대웅이 그리고 정현이. ‘229쪽부터 244쪽까지, 그러니까 <실락원>하고 <오감도>만 누가 감쪽같이 떼어간 거냐고? 나 지금 <오감도>가 읽고 싶다고!’ 하면서, 그립다. 20년 전 친구들 그리고 20대의 내가.
‘내 인생의 책’ 쓰기를 수락하면서, 십수년간 거들떠보지 않던 서가를 들락거렸다. 이렇게 많은 책이 나를 스쳤던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많은 장소와 시간이, 웃음과 눈물이, 잊힌 줄만 알았던 기억들이 이렇게나 많이 살아있었나?
다섯 권을 고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한때 열광했던 소설가의 책도 지금은 설레지 않는다. 유독 책싸개로 덮여 있던, 겉으론 제목을 알 수 없는 문고판을 하나 뽑아 들었다. ‘이상의 날개, 빙고!’ 나도 참 고리타분한 게, 다섯 권 중 적어도 한 권은 한국 책을 꼽고 싶었는데 바로 이거다. 이상과 내가 같은 언어를 쓴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다른 장르로 대체할 수 없는 이 ‘글다운 글’로부터 쾌감이 밀려온다. 이상은 1936년 단편 ‘날개’를 쓰고 1년 뒤 죽었다. 28세, 박제가 되어버린 젊음.
내 20대는 너무 우울해서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지 않는 게 상책이다. 그 시절 나보다 더 우울하고, 더 꼴통이고, 누구보다 더 천재적인 이상을 읽노라 하면 반가웠고 또 안도했다. 특별한 사건도 계기도 없이 왜 그다지도 우울했을까? 하지만 우울한 게 당연하다. 삶이란 게 왜 시작돼서 나는 어떻게 살라는 건지, 알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 노자는 무(無)와 유(有)가 둘 다 현(玄)에서 나왔다고 했다. 우리가 아는 검은색은 현이 아니고 흑(黑)이다. 현은 우주의 색이자 시궁창의 색이다. 형언할 수 없는 색이며 ‘알 수 없음’을 뜻한다. 알 수 없기에 두렵고 우울한 것이다. 시궁창 같은 청춘이여, 괜찮다. 우리는 지극히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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