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 신호등은 초록색인데, 아이들이 길 건너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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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아직 길 위에서 사람의 안전보다 자동차의 흐름이 더 중요한 나라다. 한국 운전자들은 이제껏 차도 주변 환경을 고려하며 속도를 감각하고 통제해본 경험이 없다.

 

부산시 한 초등학교 횡단보도 앞에 쓰인 문구. ‘신호가 바뀌어도 잠시 기다려주세요.’ⓒ시사IN 최한솔

‘민식이법’ 이전에도 ‘운전자가 보행 어린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법률로 명시된 시민의 의무였다. 도로교통법 제49조 1항 제2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어린이가 보호자 없이 도로를 횡단할 때, 어린이가 도로에서 앉아 있거나 서 있을 때 또는 어린이가 도로에서 놀이를 할 때 등 어린이에 대한 교통사고의 위험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경우 모든 차 또는 노면전차의 운전자는 일시정지해야 한다.”

1995년 7월1일 개정된 도로교통법에 어린이보호구역 지정 및 관리 조항이 신설됐다. 1997년 8월30일에는 “운전자는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제한속도 등을 준수하고 어린이의 안전에 유의하면서 운행하여야 한다”라는 조항이 들어갔다. 2009년 12월22일, 어린이보호구역 내 안전 의무를 위반해 어린이에게 상해를 가한 경우 반드시 형사처벌을 받게 하도록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이 개정됐다. 2010년 7월23일 어린이보호구역 제한속도가 시속 30㎞로 법률에 규정됐다.

여러 법조문에 박혀 있었지만 시민들이 크게 신경 쓰지 않던 국가와 운전자의 어린이 보행자 보호 의무를 다시 강조한 것이 2019년 12월24일 통과된 ‘도로교통법과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가법)’ 개정안, 이른바 ‘민식이법’이다. 도로교통법에 신설된 제12조 4항(지방경찰청 및 지방정부의 무인 교통단속용 장비 설치 의무화)과 5항(신호등, 안전 표지판, 과속방지턱, 미끄럼 방지 시설 등의 설치)은 국가의 책임이다. 특가법에 신설된 제5조의 13(어린이보호구역에서 어린이 치사상의 가중처벌)은 운전자의 의무다.

민식이법이 최선은 아니다. 지난해 2월 ‘민식이법으로도 미흡한 어린이보호구역 안전’이라는 이슈 보고서를 작성한 지우석 경기연구원 북부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은 단속과 처벌 강화의 한계를 지적했다. “법조문 한두 줄 추가해 형량을 얼마간 높이는 방법은 국가 입장에서 가장 손쉽고 비용을 아끼는 해결책이다. 안전 문제를 보행자와 운전자 문제로 떠넘기고 국가는 쏙 빠지는 것이다.” 지 연구위원은 덧붙였다. “돈과 시간을 들여 도로를 바꾸고 사람들의 인식을 전환시키는 게 가장 어렵지만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민식이법 입법 과정이 완벽하지도 않았다. 이제복 아동안전위원회 위원장은 “민식이법이 논란이 된 이유는 명확하다”라고 말했다. “국회에서 발의 이후 후속 논의가 이뤄진 게 없었다. 전문가 의견을 반영하고 공론화하며 부작용과 허점을 막는 과정이 있어야 했는데 그것들이 전무한 상황에서 원안 그대로 통과돼버렸다. 정치인들이 이슈를 선점하려고 발의는 서둘렀는데 사안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해 후속 논의에 게을렀다. 그 책임과 비난을 민식 군 부모 같은 피해 아동의 유족이 감당하고 있다. 이런 문제점들을 바로잡으려면 국회가 나서야 한다.”

 

한 초등학교 등굣길 보행로 옆에 교통표지판이 즐비하다.ⓒ시사IN 이명익

 


“아동이 처해 있는 상황이 이 모든 시작”

 

민식이법이 꼭 필요할까? 어른들이 형벌의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아이들이 안전한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세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려면 운전자 다수가 스스로 어린이 보호의 가치와 필요성을 인식하고 행동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의 현실과 거리가 멀다. 민식이법 시행 이후 일부 통계만 들어보자. 인천에서 올해 상반기에만 스쿨존 내 속도·신호 위반 건수가 14만 건이 넘었다. 강원도 태백경찰서가 한 초등학교 앞 삼거리 교차로에 고정식 과속 단속 카메라를 설치·운영한 결과, 지난 4~6월 3개월간 태백 지역 등록 차량 대수 10대 중 4대에 해당하는 7601대가 제한속도를 넘겨 학교 앞 교차로를 달렸다. 행정안전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6월 말부터 지난 8월 말 사이 전국 스쿨존 불법 주정차 신고 건수는 11만 건에 달했다.   

한국은 아직 길 위에서 사람의 안전보다 자동차의 흐름이 더 중요한 나라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등굣길에서 교통 지도 업무를 맡은 실버 일자리 참여 어르신은 차도와 보도가 구분되지 않은 이면도로에서 노란 깃발을 들고 아이들에게 “차 가게 빨리 비켜줘라”며 호통을 쳤다. “애들 때문에 차들이 가지를 못해. 교통 흐름을 방해한다고.” 어린이가 차에 치여 사망한 장소 인근에서 만난 주민도 말했다. “이 길이 위험하긴 한데, 그래도 5030(일반도로는 시속 50㎞, 주택가·이면도로·스쿨존은 시속 30㎞ 이하로 자동차의 속도를 제한하는 정책)은 너무 심하지 않아요? 차가 소달구지도 아니고….”

임재경 한국교통연구원 연구위원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 운전자들은 이제껏 차도 주변 환경을 고려하며 속도를 감각하고 통제해본 경험이 없다. “도시 간 고속도로든 도시 내 시내도로든, 편도 2차로가 넘고 앞이 뚫려 있으면 당연히 시속 70㎞ 이상으로 달려도 되는 줄 알고 운전해왔다. 유럽 등 교통문화 선진국에서는 차도가 위치한 주변 환경에 따라 운전자의 속도와 태도가 달라진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은 차보다 보행자가 우선이고, 사람이 보이면 차가 서지 사람이 차의 눈치를 보며 멈칫하지 않는다.” 임 연구위원은 덧붙였다. “민식이법 이후 운전자들이 스쿨존에서 갖게 된 긴장감과 경각심이 어쩌면 차도 옆 주변 환경을 인식하며 자신의 속도를 감각하는, 보행자 중심 교통문화의 최초 경험일 수도 있다.”

단순히 운전 문화, 도로 문화만의 문제가 아니다. 2019년 고 김민식 군 부모와 함께 민식이법 제정을 촉구한 ‘정치하는엄마들’의 김정덕 활동가는 말했다. “아동이 처해 있는 상황이 이 모든 시작인 것 같다. 아동은 이 사회에서 시민이 아니다. 투표권도 없고 의견을 낼 수도 없다. 아동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양육자뿐이다. 이들이 어쩌다 나서서 고군분투하면 사회는 그냥 가슴 아파 하는 모습만 소비하다가 결국 지겹다며 그만하라고 헐뜯고 비난한다. 씨랜드 참사 때도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다. 민식이법을 대하는 사람들을 보며, 대한민국에서 아동을 대하는 민낯을 마주한다. 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처해 있는 어린이들의 목소리에 우리가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 [시사인/기자 변진경] 기사 전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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