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아동학대 신고와 죽음 사이에 평균 493일

프로젝트

아동학대 신고와 죽음 사이에 평균 493일

‘또 다른 정인이들’ 살릴 수 있었던 1년 반
아이들이 죽기 전까지 겪었을 6개의 지옥도
무능력·무책임한 아동학대 신고 시스템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 중)

 

 

정인이(아래 그래픽의 20번)가 숨진 2020년에만 ‘적어도’ 3명의 아이가 학대 의심 신고가 되고도 죽음을 맞았다. 경기도 여주에 살던 아홉 살 다원이(18번)는 영하 3.1℃였던 1월10일, 베란다 욕조 찬물(7.8℃) 속에서 벌받다 저체온증으로 숨졌다. 다원이는 다섯 살이던 2016년 2월과 5월 두 차례나 아동학대가 의심된다고 신고된 적이 있다. 8살 재민이(19번)는 2020년 6월3일 여행가방에 갇혀 숨졌다. 27일 전인 5월5일 어린이날, 온몸이 멍투성이인 채로 응급실에 실려온 재민이를 보고 의사는 5월7일 아동학대 신고를 했었다. 16개월 정인이도 10월13일 세상을 떠났다. 2020년 5월과 6월, 9월 어린이집 원장과 의사가 3차례나 학대 의심 신고를 했지만 ‘신고’만으로 정인이를 살리지는 못했다.

 

참혹한 죽음 뒤 드러난 사실

 

2021년 초 방송에서 정인이가 죽기 전날 영상(어린이집 CCTV)까지 공개하고 나서야 마치 이런 사건은 처음이라는 듯 사회가 들끓었다. 1월4일 대통령이 대책 마련을 지시했고 다음날 국무총리가 ‘아동학대 대응 긴급관계장관회의’를 열었다. △즉각분리제도 도입 △학대피해 아동 쉼터 추가 설치 △아동학대 전담공무원 664명 배치와 교육 등의 내용을 담은 ‘아동학대 대응체계 강화방안’이 발표됐다. 보건복지부와 경찰청은 ‘아동학대 현장 대응 공동체협의체’를, 법무부는 ‘아동인권보호 특별추진단’을 발족했다. 국회에서는 ‘양천 아동학대 사망사건 등 진상조사 및 아동학대 근절 대책 마련 등을 위한 특별법안’이 발의됐다.

 

한 차례 분노가 휩쓸고 지나갔다. 정인이처럼 어렵게 아동학대 신고가 됐는데도 ‘닫힌 문’ 안에서 신음하던 아이들은 이제는 괜찮을까. ‘또 다른 정인이’를 막으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한겨레21>은 정부가 공식통계로 밝히고 있지 않은 ‘또 다른 정인이’의 정확한 수를 확인하고자, 학대 의심 신고가 있었는데도 끝내 아동학대로 숨진 아이들의 기록을 추적했다. 먼저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국회 부의장)실을 통해 보건복지부가 집계한 ‘2013~2019년 재학대(맨아래 열쇳말 참조) 사망자 수’ 자료를 입수했다. 이 자료에서 확인된 아이는 12명. 추가로 보건복지부에 확인한 2020년 재학대 사망 아동은 2명이었다. 자료에는 2015년 <한겨레>가 탐사보도한 아동학대 취재 사례조차 누락돼 있었다. <한겨레21>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아동인권위원회,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과 함께 판결문, 언론 보도를 뒤져 다른 사례를 찾았다. 그 결과 2013~2020년 8년 동안 적어도 20명의 아이가 아동학대로 신고되고도 숨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2020년 3명, 2019년에는 ‘적어도’ 4명이다. 3살 지희(14번)는 2017년 5월, 2018년 6월과 11월에 걸친 3차례의 신고도 소용없이 2019년 1월1일 프라이팬에 머리를 맞고 화장실에 갇혀 숨졌다. 그해 4월에는 친부, 친모, 계부에게 모두 학대당해 총 6차례나 신고됐던 소영이(15번)가 살해, 유기됐다. 9월에는 두 차례의 신고 덕분에 가해자인 부모와 분리됐다가 가정으로 복귀한 지 28일 만에 5살 호영이(16번)가 목검 등에 맞아 머리가 함몰된 채 죽음을 맞았다. 2019년 8월에 신고됐던 3살 민영이(17번)도 101일 뒤인 11월 지독한 폭력에 시달리다 숨졌다.

 

아이의 참혹한 죽음이나 암매장이라는 결과만 알려졌던 사건도 되짚어보면 이미 학대 의심 신고가 됐던 아이인 경우가 많다. 2013년 칠곡 계모 아동학대 사망사건(4번), 2016년 6살 원영이 암매장 사건(8번), 2017년 5살 준희 암매장 사건(13번) 등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도 모두 ‘또 다른 정인이 사건’에 해당했다.

 

이렇게 <한겨레21>은 지난 8년 동안의 정인이처럼 숨진 아이들 사례를 모아 전수분석했다. ‘적어도’ 20명이라도 기록으로 남겨야 했다. 왜 아이들을 살릴 수 없었는지를 살폈다. 아동학대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활동해온 전문가 6명(맨아래 명단 참조)이 자문위원단으로 참여해 사례 분석에 함께했다. 정인이를 포함해 20명의 아이가 겪었을 지옥, ‘모든 희망을 버려야 했던’ 지옥 같던 상황을 여섯 갈래로 나누어 정리해본다. 언론에 본명이 보도된 서현이, 원영이, 준희, 정인이 외의 아이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들이 2020년 9월9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천안 아동학대 사망사건’과 관련해 천안시장, 경찰서장 등을 직무유기와 아동복지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장철규 선임기자

 

 

평균 신고 1.7차례, 20명 중 12명 다시 집으로

 

6개의 지옥도를 그리기 전에, 20명 아이의 평균을 셈해본다. 숨질 당시 아이들의 평균 나이는 만 5살(4.95살)이다. 생후 26일부터 만 12살까지. 아이들이 숨지기 전에 각자 적게는 1차례, 많게는 6차례까지 학대 의심 신고가 됐다. 첫 신고 당시 아이들의 나이는 평균 만 3살(3.35살)이다. 아이들의 생년월일이 명확히 기록되지 않은 경우에는, 사망 당시 나이와 신고일을 비교해 나이를 계산했다.

 

첫 번째 학대 의심 신고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니는 시기에 주로 이뤄졌다. 만 5살 이전에 첫 신고가 된 아이가 20명 중 17명(85%)이다. 평균 신고 횟수는 1.7차례였다. 어림잡아 2차례씩이나 학대 피해가 드러날 수 있던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신고한 사람으로는 만 5살 이하 아이들을 보육·교육하는 시설 종사자가 5명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는 의사(4명), 이웃 등 목격자(4명), 초등학교 교사(2명) 순이었다. 아동보호전문기관(맨아래 열쇳말 참조)의 피해 ‘사례 개요’, 판결문, 언론 보도 등을 분석해 신고자가 드러난 16명의 경우를 취합해 분석한 결과다.

 

20명 아이에게 있었던 마지막 희망, 즉 마지막 신고로부터 죽음까지는 평균 493일 ‘살릴 수 있던’ 날이 있었다. 마지막 희망이 완전한 절망으로 끝나는 데 평균 1년 남짓 걸린 셈이다. 1차례 이상 신고됐고 아동보호전문기관과 경찰이 조사했는데도 원가정보호 조치로 끝난 아이가 20명 중 12명(60%)이다. 1차례라도 가해자로부터 분리 조치(할머니 등 친인척에게 맡김 포함)가 됐던 아이는 8명인데, 이들이 다시 가정으로 복귀한 뒤 평균 336일이 지나 죽음에 이르렀다(신고일이나 가정 복귀 날짜가 월 단위로만 적혀 있고 날짜가 불명확한 것은 그달 1일로 추정해 계산).

 

학대 장소는 모두 집, 가정이었다. 20명 중 18명 사건에서 친부나 친모가 가해자에 포함됐다. 이 가운데 오직 친부모가 아이를 학대한 경우는 7명, 계모·계부 등이 포함된 경우가 11명이다. 나머지 2명은 입양 부모에 의한 학대였다. 가해자가 재판받은 경우, 주범인 가해자의 형량은 징역 2년부터 무기징역까지 다양했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이 정리한 12명의 ‘사례 개요’에는 ‘사례 종결’(맨아래 열쇳말 참조)이라는 단어가 7번 등장한다. 대부분 신고가 들어온 뒤 학대가 재발할 위험이 줄었다는 이유로 사례 관리를 석 달 이내에 끝낸 경우다.

 

 

 

이제 20명의 아이가 숨질 때까지 공통으로 겪은 6개의 지옥도를 펼쳐볼 차례다. 무기력, 무능력, 무책임, 불통, 고립, 망각이라는 열쇳말로 요약될 수 있는 각각의 지옥 속에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했던 아동학대 대응체계가 있다.

 

 

 

제1지옥 무기력 “선생님 신고도 소용없어요”

 

“소보로빵을 흘리며 먹는다”는 이유로 아빠는 5살 영진이(6번)를 심하게 때려 숨지게 했다. 영진이는 숨지기 1년5개월 전에 의사가 신고했던 아이다. 여러 개의 멍, 부모의 의료방임 등 의사는 학대를 의심했다. 하지만 조사를 나온 이들은 “친모의 양육 의지가 있다”며 일주일 입원 뒤 아이를 집으로 보냈다.

 

아이가 얼마나 학대당하고 있는지를 꼼꼼하게 일지로 남겼던 지역아동센터 교사가 신고했지만 원영이(8번)를 구하지 못했다. 두 차례나 서로 다른 의사가 신고했던 은비(9번)도 죽음을 맞았다. 2013년 소풍날 숨진 초등학생 서현이(5번)는 만 5살이던 2011년 유치원 교사가 신고했다. “유치원 교사 생활 23년 중 서현이처럼 자주 멍드는 아이는 처음 봤다”며 교사가 오랫동안 지켜보고 신중하게 신고했지만 조사 나온 이들에게 신고자 이야기는 가해자 변명보다 힘이 없었다.

 

의사, 교사 등은 아동학대처벌법이 규정한 신고의무자(맨아래 열쇳말 참조)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도 소용없었다. 김희진 국제아동인권센터 사무국장(변호사)은 “신고의무자는 언어적 의사소통이 제한적인 아동을 대변하는 ‘옹호자’로서 해석돼야 한다”며 “신고의무자의 전문성 확보를 위한 교육, 신고를 망설이지 않을 수 있는 후속조치(신고의무자를 신뢰한다는 신호)와 보호조치(신고의무자를 지지한다는 신호), 나아가 신고의무자에게 아동보호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는 법제도적 메시지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제2지옥 무능력 “경찰은 가버렸고 엄마는 화를 내요”

 

‘아동이 친모에 대한 애착이 강해 분리보호 원치 않음’. 만 5살에 첫 신고가 된 뒤 7년간 구타당하다가 12살이 된 2017년 숨진 유정이(10번)의 아동보호전문기관 기록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두 차례 신고됐지만 유정이는 가해자와 분리되지 않았다. ‘가해자의 양육 의지’는 학대 ‘신고’보다 힘이 세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이 경찰과 함께 조사를 나가고, 아동학대 전담 공무원 제도가 시행됐지만 여전히 신고 직후 출동한 이들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사례가 많다.

 

2020년 소아과 의사가 “학대로 인한 체중 감소가 의심된다”며 정인이에 대해 세 번째 신고를 했다. 당시 아동보호전문기관이 작성한 ‘아동학대 위험도 평가’ 결과를 보면, 9개 문항 중 6개에 ‘×’ 표시가 돼 있다. 정인이는 분리조치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아동으로 분류됐다(4개 이상 ‘○’일 때 분리조치 고려). ‘학대로 발육부진, 영양실조 관찰’ ‘학대 행위자로부터 2회 이상 학대 경험 있음’ ‘학대 행위자로부터 분리보호를 요구하는 의사 표현’이란 항목에 모두 ‘×’ 표시가 됐다.

 

곽영호 서울대 교수(소아응급의학과)는 “가해자가 양육 의지나 변화 의지를 보인다며 원가정보호 결정, 사례 종결을 한 뒤에 아이가 숨지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가 얼마든지 거짓으로 진술할 가능성이 있는데 전문적인 판단을 내릴 훈련된 인력과 업무 프로세스가 없다”고 지적했다. 의료진에게 필요한 ‘아동학대 체크리스트’를 연구한 곽 교수는 “사례 관리 실패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공공인력과 전문인력의 투입 없이 제2, 제3의 정인이 사건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희경 작가(전 여성부 차관) 역시 “신고자가 반복적 학대라고 신고했는데도 ‘재학대 위험이 없다’, 영유아가 학대 행위자 품에 안겨 있었다는 이유로 ‘거부감 없다’고 평가하고, 아동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지 않은 채 제삼자의 말만 듣고 학대 위험도를 낮게 평가하는 사례 등을 보면 경찰, 아동보호전문기관 등 현장 종사자의 전문성 결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3지옥 무책임 “그냥 다시 집으로 가래요”

 

학대피해 아동으로 분류돼 영아일시보호소에 입소해 생활하던 2살 세웅이(2번)는 가해자인 친모가 집요하게 요구해 2013년 1월7일 가정으로 복귀했다. 세웅이는 그 뒤 24일 만에 맞아서 숨지고 말았다. 만 1살이던 2017년 첫 신고를 통해 친모의 학대가 밝혀져 아동보호시설로 분리됐던 지희는 2018년 5월, 친모가 양육 의지를 보인다는 이유로 집에 돌아갔다. 이후 2018년에만 2차례나 더 신고됐지만 원가정보호 조치로 끝났고 지희는 결국 2019년 새해 첫날 숨을 거뒀다.

 

소라미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임상교수(변호사)는 “재학대 사망 사례의 경우 가해자였던 부모의 요청(때로는 심한 민원)으로 아동의 가정 복귀가 이뤄지는 경향이 있다”며 “원가정 복귀 뒤 아동이 재학대에 노출돼 숨진 사례가 다수 존재하는데도 부모와 연락이 안 된다거나 부모가 (상담 등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제대로 사후관리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학대아동 쉼터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가해자인 부모와의 ‘즉시 분리’만이 답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김희진 국제아동인권센터 사무국장은 “부모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클수록 애정을 갈구하는 아동 욕구는 더 커지기 때문에 아동이 가정 복귀를 희망하는 경우도 많다. 원가정이 유지될 수 있는 방안을 일차적으로 모색하되 부득이 분리가 필요하다면 단기간이라도 ‘시설’이 아닌 가정위탁과 같은 가정형 보호가 실천되는 제도적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4지옥 불통 “동생이 죽은 걸 아무도 몰라요”

 

성연이(12번)는 20명 중 가장 어리다. 2017년생인 성연이는 생후 26일에 엄마에게 안긴 채 주먹으로 얼굴을 맞아 숨졌다. 세 아이를 키우던 엄마는 성연이를 임신한 2017년 8월8일, 성연이 언니 가연이(당시 3살)를 앞니가 빠질 정도로 폭행했다. 당시 가연이 어린이집 원장의 신고로 조사받았고 신고된 가연이만 분리 조치됐다. 성연이는 정부가 집계하는 ‘재학대’ 사례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신고된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이다. <한겨레21>은 아동학대로 판명된 한 가정에서 죽음을 막지 못한 사례 역시 ‘또 다른 정인이 사건’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성연이를 20명의 피해 사례에 포함했다.

 

김희진 사무국장은 “신고에 따른 개입이 ‘신고가 있었던’ 아이와 주가해자에게만 집중돼 처리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아동보호전문기관과 경찰 등 유관 기관 사이에 정보가 제대로 공유되지 않는 것 또한 성연이의 죽음을 부른 이유 가운데 하나다. 김영주 민변 아동인권위원장은 “아동보호전문기관은 경찰 탓, 경찰은 아동보호전문기관 탓을 하고 서로 강제력이 수반되지 않는 법률 탓, 예산과 인력 부족 탓을 한다”며 “사건은 계속 같은 패턴으로 벌어지고 업무 주체들은 소통하지 않고 분절적으로 각자 업무만 수행한다”고 말했다.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과 여성가족부 차관직을 수행해 민관의 아동학대 관련 시스템을 모두 경험한 김희경 작가는 “유관 기관의 협업과 정보 공유가 부족해 현장은 아는 문제를 법원은 모른다거나, 아동보호전문기관이 가진 정보를 경찰은 모른다거나, 이사 등으로 인해 인수인계할 때 주요 기록이 누락된다거나 하는 일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제5지옥 고립 “벗어날 길이 없어요”

 

부모가 본드 흡입 뒤 아이를 방치하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된 것은 2013년 3월24일이다.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은 조사기록지에 “아이 집의 문을 열자 집 안에서 본드 냄새가 풍겨왔고 부모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고 적었다. 그런데도 태어난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은 주형이(3번)는 2살짜리 형과 함께 고작 나흘간 할머니 집에 맡겨졌다가 다시 부모 집으로 돌아왔다. 주형이는 그해 6월18일 숨졌다. 아이는 지옥에서 벗어날 길을 찾지 못했다.

 

김희경 작가는 “아동보호체계는 아동의 상태만 확인하고 학대 행위자와 가족 환경에 대해서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며 “학대 행위자가 경제적, 정서적 지원 없이 고립 상황에 처한 양육자이거나 준비 안 된 청소년 부모 혹은 미혼모일 때 위기에 처한 가정을 지원함으로써 이 가정이 아동을 돌보게 하려는 노력이 행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이를 살리려면, 먼저 부모가 건강하게 살도록 지원해야 한다. “부모 교육을 통해 상담을 제공할 뿐 아니라 양육자의 상태를 파악”(곽영호 교수)하고 “교육과 심리 상담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문제 가정’ 개입 방식이 실효성이 있는지 점검, 진단이 필요하다”(소라미 교수).

 

 

아동학대 관련 정부 캠페인. 유튜브 채널 <대한민국 보건복지부> 화면 갈무리

 

제6지옥 망각 “저처럼 죽는 아이 없게 해주세요”

 

정부의 ‘2013~2019 재학대 사망자 수’ 자료에는 2013년 ‘칠곡 계모 아동학대 사망사건’(4번)이 누락돼 있었다. 2013년 8월16일 8살 사랑이를 때려서 숨지게 한 가해자는 사랑이 언니(당시 만 11살)를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등 고문했다. 사랑이를 숨지게 한 죄를 언니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다. 사랑이가 숨지기 여섯 달 전에 이미 초등학교 교사가 학대 의심 신고를 했지만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조사 결과지에는 사랑이의 사망에 대해 ‘학대와의 연관성 확인 안 됨’이라 표시돼 있었다. 그렇게 사랑이 사례는 ‘재학대 사망’ 기록에서 지워졌다.

 

아이들이 신고된 뒤 숨지기까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민간 차원에서라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경우는 2건(2013년 ‘이서현 보고서’(5번)와 2016년 ‘은비 보고서’(9번)에 불과하다. 나머지 죽음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공식·비공식 기록 속에서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김영주 민변 아동인권위원장은 “재학대 사망사건을 집중 분석하는 진상조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년 같은 패턴의 사건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사무국장(전 국회의원)은 “양천 입양아동 학대 사망사건(정인이 사건) 이후 아동학대 진상조사 특별법이 국회의원 139명 명의로 공동발의됐으나 제대로 심의조차 되지 않은 채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법안을 발의한 김상희 민주당 의원은 “적어도 국가의 아동학대 대응 시스템으로 들어온 학대피해 아동만이라도 사망에 이르지 않도록 막기 위해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2021년 2월 발의한 ‘한국판 클림비 보고서’라고 불리는 ‘아동학대 사망 진상조사법안’이 아직 상임위원회에 계류 중인데 조속히 법안이 통과돼야 한다”고 했다. 2000년 영국에서는 8살 빅토리아 클림비의 죽음을 계기로 정부와 국회가 2년여 조사를 벌인 끝에 아동보호기관, 경찰 등이 클림비를 살릴 기회를 10여 차례 놓쳤다는 사실을 밝혀낸 400쪽짜리 보고서(‘클림비 보고서’)를 펴낸 바 있다.

 

정인이처럼 신고된 뒤 재학대가 확인된 아이만 2876명(2020년 기준, 사례로는 3671건)에 이른다. 완전한 절망이 오기 전에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 지금도 흐르고 있다.

 

 

임지선 <한겨레> 기자 [email protected]·고한솔 기자 [email protected]

 


열쇳말

 

재학대 최근 5년 사이에 신고돼 아동학대로 판단된 적 있던 사례가 다시 신고 접수돼 아동학대로 판단된 사례를 뜻한다. 예를 들어 2016~2020년 한 번이라도 신고됐던 학대아동이 2020년에 다시 신고돼 학대로 판명되면 2020년 재학대 사례에 해당한다.

 

신고의무자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사, 의사 등 아동과 연관 있는 25개 직군 종사자가 아동학대처벌법 제10조의 ‘아동학대 신고의무자’로 규정돼 있다. 이들은 직무를 수행하면서 아동학대 범죄를 알게 되거나 아동학대가 의심되는 경우 아동보호전문기관이나 수사기관에 신고해야 한다. 신고하지 않으면 500만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된다.

 

아동보호전문기관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은 2019년 시행된 아동복지법 개정안에 따라 ‘아동권리보장원’으로 통합됐다. 지역마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이 있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이 아동학대 사례 관리를 하고, 아동학대 신고 접수와 조사는 지방자치단체에서 맡는다.

 

사례 종결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 등이 상담, 치료 등 사례에 개입하는 과정을 마무리하고 학대 위험이 줄어들거나 없어졌다고 판단해 피해아동 및 가족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 종결 이후에도 재학대 방지를 위해 사례 관리는 계속한다.함께 분석한 전문가 명단

 

김영주 민변 아동인권위원장(변호사), 김희경 작가(전 여성부 차관), 김희진 국제아동인권센터 사무국장(변호사), 곽영호 서울대 교수(소아응급의학과), 소라미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임상교수(변호사),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사무국장(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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