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의 책장] 두 달에 걸쳐 읽어야 했던 책 『돌봄 선언-상호의존의 정치학』
[엄마들의 책장] 두 달에 걸쳐 읽어야 했던 책『돌봄 선언-상호의존의 정치학』
정리 ∥ 오은선 활동가
[엄마들의 책장] 모임은 창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하마 언니들과 읽고 싶은 책을 매월 선정해 함께 읽고 나누는 모임입니다. 코로나 전에는 서울 서대문에 있는 이진아 도서관에서 모였는데 지금은 줌(Zoom)을 통해 만나고 있어요. 온라인으로 모이다 보니 서울 아닌 곳에 있는 언니들도 함께할 수 있게 되었네요.
보통 일요일 아침엔 늦잠을 자고 싶지요. 하지만 엄마들의 책에 참여하면서 하루가 의미 있게 길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어요. 지난 2월에부터 3월까지 두 번에 걸쳐『돌봄 선언-상호의존의 정치학』이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평소보다 많은 언니들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작은 책이었지만 두 달에 걸쳐 읽게 되었어요. 책 본문 중에 굵고 큰 글씨로 된 부분을 돌아가며 읽었고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100페이지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데 다 담을 수 없어서 아래와 같이 정리했습니다. 이야기 풀어주신 언니들 정말 고마웠고 앞으로도 서로 돌보는 모임으로 [엄마들의 책장]이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정덕 저는 <돌봄 선언>을 읽으면서 우리 단체 정치하는엄마들 정관을 다시 읽었어요. <돌봄 선언> 이전에 정치하는엄마들이 이미 선언을 했다, 라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어요. 지금 이 자리에는 안 계시지만 엄마들의 책장 모임을 처음으로 연 오은정 언니가 매우 많은 노력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돌봄과 살림이 단체 정관 전문에 나와 있다는 것 때문에 제가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도 맞아요. 저 말고도 그런 이유 때문에 들어오신 분도 계실 것 같은데요. 정치하는엄마들의 활동의 기본 전제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돌봄과 살림이 엄마에게만 전가되어 있는 상황, 여성 중에서도 엄마에게 매우 많은 가중을 주고 있는 사회 현실에 대해서 지적하고, 국가적 책임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는데요. 우리의 권리를 옹호하고 모순을 해결해 나가고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게 지금 활동의 목표거든요. 여기에는 지구 생태적인 인식은 이미 깔려 있어요. 정치하는엄마들 소모임 중에 지구하마(지구를 구하는 정치하는엄마들)의 활동처럼, 환경오염이 심각한데 환경적인 대안에 관해서 감수성과 예민함을 가진 엄마들도 많고. 아이들이 아픈 이유 중에 환경적인 요인이 매우 많아서 그렇게 된 원인을 찾아내는 것들도 우리한테 중요한 일이에요.
동물 그러니까 비인간인 생물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게 되는 것도 우리가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기본적인 이해관계가 있어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사실 돌봄 선언은 정치하는엄마들이 먼저 앞서서 하지 않았나. 자부심이 들기도 해서, 저는 우리 전문을 정관을 번역해서 여기에 보내고 싶다! 더 케어 컬렉티브랑 좀 연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당신들보다 앞서 있는 사람들이 여기 있다는 걸 좀 알려주고 싶네요.
저는 엄마가 되기 전에는 몰랐던 부분이었지만, 사실 돌봄에 대한 이론이 몇 년 동안 있었더라고요. 돌봄이라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끌게 된 게 얼마 되지 않았고. 영국에서는 이런 선언이 나왔는데 답답함을 말씀하신 것처럼 왜 일부에서만 이야기되는가? 여성들만 또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라는 점에서. 정치하는엄마들은 사실 엄마들만 있는 건 아니라서 물론 대다수가 엄마이긴 하지만 그래도 참여를 제한하지 않고 모두에게 열려 있어요. ‘모두가 엄마가 될 수 있다’ 사회적 모성이 세상을 바꾼다는 게 모토인 만큼 다양한 비혼인 언니들은 물론 성별 구분 없이 또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언니들이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에 폐쇄적이지 않고 사회적인 모성을 요구하는데 좀 더 주체적으로 나설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영어의 care는 보살핌 관심 걱정 슬픔 외통 공경을 의미하는 고대 영어 caru에서 왔다.
단어의 이중적 의미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요구와 취약함을 전적으로 돌본다는 것 그래서 생명의 연약함과 직면하는 것이 어렵고 지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57p)
영은 슬프네요. 케어는 거대한 이야기를 과제로 삼고 싶지만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아이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 9 to 6로 아이를 돌보는가. 정해져 있지 않은 시간에 이외의 돌봄은 왜 공경과 애통과 슬픔이 오는가. 정덕 언니가 말했던 읽으신 부분 지구 자체가 유지되고 전체가 공동체가 유지되는 거, 책임을 지는 이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개인의 감수성과 개인의 경험치가 얼마큼 쌓여야 하나 과연 내 생애에 가능한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돌봄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에 이르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에 대체 어떻게 이 하루하루를 내가 견뎌야 하는가. 부모님이 오셨는데 엄마가 생각하는 돌봄과 저희 부모님이 생각하는 그리고 이제 저희 엄마는 이제 친정엄마가 되는 거잖아요. 본인 스스로 친정엄마가 되어 돌봄을 친정엄마의 역할을 수행하고 계시는 거예요. 엄마는 그런 돌봄을 해서는 안 돼. 더는 해서는 안 돼. 저는 오히려 이러겠어요. “나 돈 주고 그냥 사람 부를게.” 오히려 당신에게 내가 임금을 지불하고 당신의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자 그러지 말고 이런 식으로 저에게는 당시의 해법이고, 그 당시에 왈칵 나오는 말이 해소법이었던 것 같아요. 여전히 가정 내 아니면 육아를 하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의 이 케어도 케어가 우리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정치하는엄마들에서 모임을 하더라도 아이와 함께할 수 있고요. 오늘처럼 이렇게 함께할 수 있는 열린 자세가 여기여야지 가능하지, 이거 하나 10명이 합의를 이루어낸다는 건 정말 어려운 다른 곳에 가면 진짜 두세 명만 모여도 그게 안 될 것 같아요.
정덕 너무 공감해요. 언니
영은 눈물 나네요. 정말
이숙 저는 이 돌봄의 양면성 파트를 읽으면서 조금 이 책에 새로운 기대를 하면서 읽었었어요. 왜냐하면 이 양면성이라는 게 물론 돌봄 선언 자체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한다면 굉장히 다양한 수준에서의 돌봄을 어떻게 구조화할 것인가의 문제들을 잘 얘기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대안적인 친족 공동체, 정치, 경제, 근데 이게 제가 이 책을 계속 쭉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은 현실에서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심리적인 문제와 현실적인 문제들을 과연 해소해 줄 수 있을까. 이게 구조화된다고 해서 정말 제 아이가 지금 이렇게 막 엄마를 찾는 이 문제들을 과연 해소해 줄 수 있을까. 그런 부분들은 지금도 막 계속 찾고 있는데, 그런 부분들을 과연 어떻게 할까. 지금도 계속해서 저를 찾는 이 상황들을 과연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입니다.
정덕 그래서 개인, 그 지금 언니들이 느끼고 있는 그 자체가 그것은 돌봄의 취약성 그러니까 돌보는 생명체에 대한 연약함을 모두가 인식을 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모든 존재가 돌봄을 받고 돌봄을 주는 모든 존재가 사실 이 사회라는 게 그 개개인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것인데, 개개인들의 합이 너무나 총량이 적으니 그 양을 더 넓혀야 한다는 걸로 저는 이해를 했어요. 그러니까 보살핌, 관심, 걱정, 슬픔, 애통, 공경을 생각하고 살피는 사람들이 그냥 까놓고 세상에 절반밖에 안 된다. 그러면 절반만 해결이 된다는 얘기, 그 절반의 고통을 깔고 간다는 얘기밖에는 안 되니까, 그래서 돌봄을 전면적으로 내세워야 한다, 라고 주장을 하는 것 같아요. 차별금지법 하면서도 많이 생각했던 건데 ‘가족구성권연구소’라고 있더라고요 거기서 ‘생활동반자법’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성 소수자뿐만 아니라 정말로 내가 생애를 살아가는데 친족 말고도 같이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다양하고 많아졌는데, 지금 가족이라는 개념이 굉장히 협소하다 보니까 다 담지 못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 실질적인 어려움들이 있어요. 병원에 갈 때 보호자가 되지 못한다든가, 사망했을 때도 애도하는 그런 절차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다든가 하는. 이런 문제가 나의 머지않은 미래와도 되게 가까울 것 같아요. 지금 아이랑 살고 있지만, 아이가 독립하고 배우자랑 잘 살 수도 있지만, 또 잘 못 살 수도 있잖아요. 그랬을 때, 내가 홀로 1인 가구가 될 수도 있겠죠. 1인 가구 말고도 다양하게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려면 지금 비혼 가구에 대한 어떤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한데, 현실은 하나도 되고 있지 않아서 훨씬 더 취약할 거고. 재작년 통계에 따르면 지금 10명 중에 세 가구가 1인 가구라고 해요. 10가구 중 세 가구가 자녀와 같이 사는 가구이다 보니까 이미 저출생으로 인해서 저인구화되면서 1인 가구 비율이 훨씬 더 높아지고 있는 당면한 과제거든요. 자살률이나 또 고독사와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이건 케어가 개인한테 맡겨져서는 이제 더는 지속할 수 있지 않다는 거를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돌보는 친족의 개념을 최대한 확장하는 것은 전장에서 군의관이 돌봄의 의무를 부상당한 적군에게까지 확장하는 것과 같다. (77p)
정주 국경없는의사회도 전쟁에서 다친 사람을 치료하고 구하는 것은 적을 넘나든다고 해요. 어떻게 보면 그 정도로 친족의 개념을 확장해서 돌봄을 이어가는 게 급진적인 일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되게 은유적으로 표현되었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저는 친족 사회보다는 동료 친구들과 오랫동안 좀 살아온 환경에 놓여 있어서 어떻게 보면 좀 실현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은 좀 들어요. 아직도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고 있고 어느 순간 어떻게 보면 더 많은 돌봄이 필요한 나이가 됐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날까. 아직 상상되지는 않지만 어떤 부분이 꼭 같은 공간 안에 살지 않아도 마을에서 같이 무리를 이루어서 살아갔을 때 서로의 필요들을 확인할 수 있고 그런 것이 서로 돌봄에 대한 이해가 공유되었을 때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 사실 저는 그게 아예 없었던 일이라고 보지는 않는 것이 역사 속에서 공동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존재하잖아요. 예를 들면 미국에서 아직 좀 문명과 좀 떨어져 살아가는 ‘아미시 공동체’나 ‘부르도프 공동체’ 사람들이 가족 혹은 비혼 공동체가 다 섞여서 살아가고 있는데 또 그 안에서의 고군분투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의 지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부분도 공부하면서 좀 힌트를 얻을 수 있지는 않을까. 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이숙 이 친족 개념을 최대한 확장해야 한다, 라는 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은 하긴 하는데 이게 저는 굉장히 영국적인 맥락이라는 생각도 사실은 좀 들었거든요. 한국처럼 굉장히 친족 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우리가 돌봄의 정치를 이야기할 때 과연 이 친족이라는 개념들이라는 것들의 상징성들을 다 삭제하고 갈 것이냐?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생산적 가능성은 과연 없을 것인가라는 부분도 저는 굉장히 좀 전략적으로 사고를 해야 할 필요는 있다는 생각은 좀 들어요.
그러니까 멕시코처럼 가족주의가 강한 사회에서 엄마들이 정치화되고 특히 이제 운동 과정에서 자기 자식을 잃은 엄마들이 우리나라 육아협처럼 정치화되고 이러는 경우들은 매우 많거든요. 그렇다면 이제 영국과는 다른 사회적 맥락 속에서 우리는 돌봄과 이 친족의 문제들을 어떻게 지금 기존의 것을 넘어서면서 또 기존이 이 가지고 있는 생산적인 면들을 잘 결합해서 우리의 이야기들을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됐었어요.
은영 이 챕터에서 왜 확장 돌봄의 범위를 친족의 개념으로 넣었을까 봤을 때 이게 우리의 우리 아니고 비우리(우리가 아님)에 대한 분리되는 개념을 우리는 다 모두 우리라는 개념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좀 하게 됐어요. 부상당한 적군을 케어하는 건 국경없는의사회뿐만 아니라 모든 의사에게 적용되는데 우리의 의료 시스템을 볼 때 영리 병원 얘기가 나오고 코로나 상황에서 파업하려고 했던 액션들이 있었잖아요. 그리고 공공의료를 확충하라는 얘기도 많았는데 그것이 지금 사실 다 멈춰 있는 상태고. 그런 접근으로 이 부분을 봤던 것 같아요. 의료 서비스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몸이 아팠을 때 돌봄이 가장 중요한 시기이잖아요. 그리고 사람이 아닌 존재들에 대해서도 신체나 생명에 어떤 위협에 가해졌거나 돌봄이 필요할 때 어떤 식으로 돌봄을 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했을 때 배제하지 않는다는 개념으로 시스템을 만들어야 된다, 라고 전달되는 느낌을 받아서 되게 중요한 개념이다, 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인간 비인간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 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돌봄이 필요와 지속 가능성에 따라 공평하게 그 가치를 인정받고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난잡한 돌봄의 윤리라고 부른다. (79p)
은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부분이 나오는 것 같아요. 여기서는 이 책에서는 이 난잡한 돌봄이라는 의미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고 매우 급진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더라고요. 그래서 난잡한 돌봄이라는 의미 자체를 다시 세우는 게 되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장 가까운 관계부터 먼 관계까지 아까 전 문장에서 읽었던 것처럼 적장까지도, 그리고 인간을 넘어서 비인간까지, 성별도 막론하고. 지금 한국은 가족주의 사회에 갇혀 있는데 이렇게 난잡한 돌봄의 윤리를 모두 다 실천한다면 정말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글 난잡함에 대해서 계속 더 확장해서 얘기해 주는 것 같은데요. 이런 사회가 솔직히 이상적이라는 생각은 들어요. 저도 돌봄을 받고 싶기도 하고 서로 돌봄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근데 이게 현실성이 있는가, 저는 그런 생각이 좀 들거든요. 왜냐하면 아까 돌봄을 제공할 것인가 돌볼 것인가 얘기도 나왔지만 돌보는 거를 한다는 거가 일단은 마음의 문제인 것 같아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상대방을 돌보고 싶다는 욕구 같은 것도 생기고 어떻게 보면 자발적인데 돌보는 것을 강요를 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난잡한 돌봄을 우리가 하자고 했을 때 과연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가, 그런 것에 대해서 안 되기 때문에 많은 남자들이 이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것 같거든요. 이런 부분이 자발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좀 어려운 부분인 것 같고 그래서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이런 생각도 들어요. 어떻게 보면 돌봄을 받아야 하는 건 필연적인 거잖아요. 나이가 들었을 때 혹은 나이가 너무 어릴 때는 그런 것들이 필연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시스템이 구축되면 좋겠고. 거기에서 우리가 보수, 무보수의 돌봄 제공이 아니라 돌보았을 때 보상이 제공되는 시스템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또 친족이나 주변에 의존을 해야 할 때가 오겠지만 솔직히 그 나이가 돼서 의존하고 싶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거든요. 내가 아이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많이 듣잖아요. 어른들한테서도.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기 때문에 건강상이나 이동의 불편함이나 그런 것들은 실시간으로 필요하고 돌봄은 서비스로서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돼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친족이나 주변에 의존하기보다는 국가적으로 그런 것들이 뒷받침되면 좋을 것 같아요.
영은 그러니까 떠오르는 게. 남자아이에게도 인형 놀이를 허해야 한다, 뭐 이러면서 정치하는엄마들에서 나온 얘기인 것 같긴 한데요. 여자아이들은 돌봄을 몸에 익히며 자라요. 옷 정갈하게 정리를 잘하더라고요. 동생을 돌보고, 아기를 돌보는 인형 역할극을 하면서 돌봄에 대해서 몸에 타고나든지 체득을 하고 인형 놀이를 하고 그걸 좋아하고요. 자발성에만 의존하기에는 특히 한국에서의 여자들은 돌봄에 너무 많은 부담을 지우고 있는 사회가 아닌가. 우리는 돌봄이라는 것이 무엇을 돌봄으로 할 것인지 한글 언니도 말했듯이 어디까지를 어떤 부분에서는 공공이 돌보고 어떤 것에서는 친족과 개인과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돌봄으로 행해져야 되는 것인지는 각자의 생각도 다르기도 하고 한국에서의 치우침도 꽤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치하는엄마들에서는 그게 좀 더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이야기인가. 그게 조금 더 넓혀질 수 있는 보편적인 돌봄으로 갈 수 있는 얘기인가. 이런 거를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더라고요. 우리에게는 돌봄이라는 언어가 우리만의 사회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언어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행동으로도 조금 연결 지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의미에서 책에서 쓰여 있는 ‘난잡함’이라는 이 단어가 주는 한국에서의 뉘앙스가 있잖아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저도 찾아보니까 이게 성적 관계를 갖는 여러 사람과 성적 관계를 갖는 이것에서 온 단어가 맞긴 하네요. 194페이지에 보면 ‘promicuity(난잡함)’. 그것이 저희도 처음에 딱 이 페이지에서 접했을 때의 뭐지? 라는 궁금함과 아니면 좀 벽이 있잖아요. 그것을 우리 언어화로 하는 그 작업. 영국의 언어나 다른 서구의 언어가 아니라 한글에서의 우리의 언어, 나의 언어가 좀 됐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이 생기네요.
이숙 돌봄이 언어가 되어야 한다, 라는 영은 언니 말씀을 들으면서 좀 평소에 고민이 사실 우리는 돌봄이 중요하다고 얘기하지만 내가 내 아이의 돌봄을 정말 잘하고 있는가. 내가 상대방을 돌봄의 마인드로 대하고 있는가, 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돌봄 돌봄의 거시적인 측면은 얘기하지만 저는 거시와 미시가 따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거시적인 게 힘이 있으려면 미시적인 영역에서도 어떤 구체적인 실천 태도들이 나와야 이렇게 됐을 때 내 삶도 바뀌고 나의 관계도 바뀌고 우리가 이렇게 다 행복해져, 라는 것들이 설득력 있게 나올 건데. 정치 하마들의 많은 활동이 이건 나의 잘못이 아니라 국가의 잘못이야, 라고 얘기를 하고 사회의 잘못이라고 얘기를 하면서 하는 거는 저 100% 동의하고 저도 그렇게 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동시에 우리의 미시적인 실천들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돌봄의 언어를 적용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부분들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저는 항상 고민이거든요. 지금 막 저기 마루에서 놀고 있는 나의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이런 고민이 사실 들거든요.
은영 동거인들이 있는 집이 가장 작은 시스템이자 공동체잖아요. 저는 옛날 사람이라서 그런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문화 속에서 자랐어요. 수신(修身)이 안 된 사람은 제가(齊家)가 안 되고 제가(齊家)가 안 되면 치국(治國)이 안 된다는. 그래서 어느 정도는 이런 식의 단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동시에 같이 가야 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제가가 되려면 어쨌든 성숙한 부모(어른)가 있어야 할 테고 성숙한 부모가 되려면 스스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하지요.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하겠다고 자각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인식했기 때문에 개선의 여지가 있어요. 하지만 아예 국가 시스템에 대해서 개선을 해야 한다, 는 사고 자체를 하기 어렵거나 하지 않거나 사화 변화 활동에 참여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 거지요. 그런 사람들까지 수신제가치국으로 갈 수 있게 하려면 이숙 언니가 얘기했던 것처럼 실질적으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내 집에서 혹은 사는 동네에서 우리 아이 학교에서 그걸 어떻게 가져갈 것이냐는 투 트랙(two track)으로 작동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마에서 선언적으로 시스템을 개편하자는 얘기가 허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게 낙수 효과가 있을 수 있는 거고 낙수 효과가 있으려면 가정 안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이 나는 취약하다. 취약하기 때문에 이 취약함에 대해서 우리같이 좀 고민을 해보자.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만 아이는 스스로 그런 인식을 하기엔 아직은 부족하니까 성숙하려면 단계가 필요하니까 결국 엄마나 혹은 아빠가 인식하고 그리고 모두가 취약한 부분이 있다는 걸 드러내고 이야기하면 좋겠어요. 여기서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상호성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내가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열린 존재다. 동물은 누군가의 어떤 제공을 받아야지만 살아갈 수 있다는 존재라는 걸 인식하고 그거를 내가 나약해서라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는 원래 그런 존재니까 그런 존재로서 어떻게 좀 개선해 나가느냐 하고 가는 거 전제로 좀 얘기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덕 저는 이 ‘난잡한 돌봄’이라는 것에서 ‘난잡’이 되게 도발적인 의미로 다가왔거든요. 이것을 우리 언어로 어떻게 하느냐 약간 맥락이 다 있다고 생각한 게. 50페이지 보면 ‘돌봄에 대한 의존이 인간이 존재하는 조건의 일부가 아니라 마치 질병처럼 여겨진 것이다.’ 하거든요. 그러니까 돌봄이 어떤 약점. 은영 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나도 돌봄이 필요한 존재인데 약점을 드러내기 어려운 사회라서 더 어려운 게 아닐까. 그래서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는 걸 배울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햇어요. 아동 학대 관련 대응을 하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요. 이 세상에 사람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정말 취약한 존재로 태어나잖아요. 그 사람이 자라기 위해서도 정말 수많은 손길과 보살핌이 필요한데. 나도 그렇게 자라온 취약한 존재였다는 걸 아이를 통해 거울 보듯이 깨닫게 되는 지점이 있었거든요. 내가 완벽한 존재인줄 알았는데, 태어난 아이를 보는 순간 내가 저랬구나 인식하게 되는 그 순간을 모두가 알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이해가 어려울까 싶고. 돌봄을 받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아기인 것만도 아니고 어르신인 것만도 아닌 모든 사람이 다 돌봄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취약성을 인식해야 된다는 의미로 저는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질병이 없는 사람이 있나요. 또 그 난잡함이라고 하는 것이 건강 가족과 맥락이 연결되는데 건강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기준이 건강한 사람으로 되어 있는 사회는 전복돼야 되지 않나 싶어요. 코로나로 굉장히 질병이 만연하고 아픈 게 이상하지 않고, 아픈 게 터부시돼서는 절대 이 사회가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건강한 상태를 기본값으로 놓고 있는 이 자체에 대한 어떤 도발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는 돌보는 공동체를 조성하는데 네 가지의 핵심적인 특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상호지원, 공공 공간, 공유 자원과 지역 민주주의다. (90p)
은선 지금 코로나로 인해서 서로의 돌봄을 하는 데 우리가 서로의 지원도 사실 정부에서도 없고 서로서로 지원해 주는 게 매우 중요한데 그것도 정말 어렵고 돌봄을 해야 하는 공간 자체가 한 가정 내에서 가정이 다 책임을 져야 하니까 분리가 안 되잖아요. 그것도 너무 어렵고 공유 자원 물론 없고요. 지역 민주주의도 너무 부재한 상황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가 지금 위드 코로나 시기에는 정말 돌봄이라는 것이 얼마나 더 중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지만 돌보는 공동체를 조성하는 데에 이 네 가지 핵심 특성이 다 부재한 상황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적절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숙 어떻게 보면 상호 지원이라는 것은 앞서 얘기한 난잡한 친족 관계의 연장선인 것 같고, 공공 공간은 이제 어떤 공적 인프라에 대한 얘기들인 것 같아요.
정주 여기에 언급된 네 가지 중에서 공공 공간은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저희 마을에도 공간이 여러 개가 있었는데요. 그중에 지금까지 지금 10년 동안 계속 지속되고 있는 것이 공동체 식당이에요. 이 식당은 저희 일상적인 저항 행동이 아침 7시 그리고 11시 12시에 있는데요. 그게 끝나면 12시에 다 같이 모여서 밥을 먹는데 저는 이주민이고 원주민인 마을 삼촌. 남자 삼촌 제주도에서는 어른을 삼촌이라고 이제 부르는데요. 그 남자 삼촌이 지금 10년 넘게 매일 거기서 밥을 해주세요. 비혼으로 살던 가족이 있던 누구나 와서 손님이든 누구나 와서 그 공간에서 같이 밥을 먹고 또 먹거리가 생기면 물자를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한 거예요. 제주도 곳곳에서 저희 활동을 지원해 주시는 분들이 거기에서 제주도에서 난 콜라비부터 당근, 감자 이런 걸 다 보내주세요. 거기에서 또 자기 집에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요. 그리고 자기가 만약 여유가 생기면 또 거기에 가져다 놔요. 그 공간 하나에서 매우 많은 게 이루어지고 저희는 또 명절 때도 비혼인 친구 중에서는 이제 가족 방문을 하지 않는 분들도 있고 해서 명절 때도 거기에서 같이 모여서 이제 덕담도 나누고 이제 인사도 나누고 저희 마을 삼촌이 매일 그 자리를 지키시니까. 누가 오고 안 오는지를 다 아시는 거예요. 그러면 요즘에 누가 좀 안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냐. 그리고 또 요즘에 누가 얼굴이 좀 안 좋은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있냐. 그래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거기서 알게 되면 연락을 해 보는 거죠. 그 사람한테 최근에 무슨 일이 있냐. 그리고 또 누가 요즘에 좀 몸이 안 좋다고 하면 그 얘기를 들으면 다 그 친구한테 방문해서 먹거리를 챙겨준다거나. 그래서 공간이라는 것 자체가 물자를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소식을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그 소식을 통해서 어떤 텔레그램 카톡방이 아니라 이제 거기에서 들은 걸 갖고 또 우리가 서로 돌봄이 필요한 상태를 확인하게 된 거 그래서 일단 가장 구체적으로는 공공공간이 가진 역할 순기능 이런 것들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숙 최근에 와서는 정주 언니 말씀에 정말 동의하거든요. 물리적 공간은 사이버 공간으로 대체될 수 없다고 생각을 해요. 근데 지금 코로나가 사실 이제 10만 명 이르는 이 상황 그리고 특히 여성의 삶이라는 것이 분절화되어 있잖아 공간적으로 가정 안에 갇혀 있건 어디 있건 이 상황에서 이제 정치하는엄마들이 텔레그램이라는 이 공간 안에서 어떻게 공동체성들이라는 부분들을 새롭게 구성할 것인가라는 부분들 그리고 일상적으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가 돌봐주고 있다는 감정들을 어떻게 창출할 것이냐는 부분들은 모든 운동단체가 고민해야 할 부분들이 아니냐는 생각들이 최근에 많이 들었었어요.
결국에는 돌봄이라는 것에 있어서 감정, 정서 이런 것들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는 부분인 것 같거든요. 온라인 공간들이 오프라인에 비해서 많은 한계가 있지만 돌봄의 에너지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으로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공공 공간을 고민하는 가운데서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요.
정주 네. 저도 되게 동감하는데요. 저는 이제 두 가지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보니까 저희 마을에 공동체 텔레그램 방이 있는데 이 사이버 공간에서 나의 어떤 취약한 상태를 공유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 같아요. 물리적인 공간에서는 내가 하지 않아서 말하지 않아도 몸으로 그게 이제 보이니까 그렇게 물어보게 되는데 사이버 공간에서는 그게 안 되니까 어떻게 지내라고 확인이 좀 안 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은 거예요. 그런 부분은 저희가 하면 어떻게 하면 나의 어떤 정서적인 취약함 또 어떤 물리적인 취약함 이것을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좀 그런 고민도 되는 것 같아요.
정덕 정주 언니 속해 있는 공동체에 대해 좀 더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정주 저희가 되게 제가 자랑스러워하는 것 중 하나인데요. 연령대가 굉장히 다양해요. 그래서 20대 초반부터 80대 초반까지 지금 문정현 신부님이라고 아시는 분도 있고 모르시는 분도 있는데 80대 초반이세요. 대안학교를 졸업하고 여기 활동하러 온 친구가 21살 작년에 와서 이제 21살. 21살부터 지금 84세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활동가들이 한 25명 정도 같이 이제 마을의 곳곳에 흩어져서 살고 있고요 되게 반갑고, 감사하게도 계속 이사를 와요. 최근에 며칠 전에 이사 온 가족은 경기도 쪽에 살다가 간난 아기가 태어나서 일단은 한 1~2년 정도 같이 살아보겠다고 네 명의 가족이 같이 왔는데요. 아기가 이제 4개월 그리고 이제 첫째가 네 살인데 가족이 오니까 저희 분위기가 또 막 다 서로 아기 안아보겠다고 엄마가 엄마 아빠 밥 먹을 동안 다 돌아가면서 아기를 이렇게 이제 안고 그런 것도 되게 좋더라고요.
정덕 어떻게 보면 실질적인 모델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공동체가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진짜로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코로나가 극심해지면서 수도권에서는 비대면이 일상적이 되고, 만날 수도 없게 되면서 작은 학교를 찾아서 가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은데. 물리적인 거리로 인해 서로를 살피는데 한계가 있더라도 필수적인 일 같아요. 핵가족이 네다섯 가족만 되더라도 돌보는 데는 좀 좋지 않을까. 그래서 공동육아의 형태가 있는 거겠지만. 주거하고도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어서 정말 총체적인 난국이에요. 부동산 문제도 좀 같이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일단 살 터전이 안정적이지 않은 상태에서는 공동체를 꾸린다는 게 너무 힘들잖아요.
단체 초반에는 아기가 어렸던 언니들이 농담이기도 하지만 진담처럼 ‘모여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어요.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렇게 다 서로 봐줄 수 있다면 너무 좋을테니까요. 그런 갈망이 되게 커서 마더 센터라든가 돌볼 수 있는 공간 마련을 구 단위가 아니고 동 단위로 지자체의 요구를 하기도 했어요. 엄마들이나 아이들이 모여서 서로 양육자들이 정보도 나누고 같이 돌보는 돌봄센터가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했었네요. 보통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아이가 태어났을 때, 어린이집 등 기관생활을 하고 학교에 가게 될 때 우리가 공동체를 찾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요.
생애 주기로 봤을 때는 어린 아이랑 같이 살 때 너무 힘들어요. 완전 독박육아로 집에 딱 묶여 있으면 아무데도 못 가잖아요. 그럴 때는 진짜 숨 쉴 구멍이 필요한데 언니들과의 소통이 저에겐 절실했어요. 두 세 시간마다 깨서 울 때 달래면서 지금 누군가는 수유를 하고 있겠구나, 이런 생각. 모두가 자고 있는 거 아니고 이 시간에 누구라도 그냥 저 살아 있어요, 라고 하면은 답이 오는 순간들. 만나지는 못하고 온라인이라는 한계는 있지만요.
이숙 최근에 생각이 든 게 온라인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정서를 나누고 감정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려면 사실은 일상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은영 지금 보니까 우리가 이 책을 낭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상황과 <돌봄 선언>에서 나온 것들을 연결하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제 상황을 공유하자면, 아이가 밀접접촉자가 되었을 때 남편은 음성이 나오니까 계속 출근했었던 상황이었고 저는 집에 계속 있었어요. 그리고 다시 지난주 월요일 남편이 확진을 받았을 때 저는 출근한 상태였고 그래서 부랴부랴 자가 키트로 검사하고 음성이 나왔는데 그거로는 유효한 검증된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PCR검사를 하거나 병원 가서 신속 항원 검사를 바로 받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굉장히 중요한 일이 있었지만 다 제쳐두고 항원 검사를 받으러 가고 1시간을 기다려서 테스트했어요. 그러고 나서 30분 후에 음성 확인을 받고 바로 출근했죠. 그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마스크 쓰면서 출근하고 있고, 점심을 안 먹거나 도시락을 싸가서 먹거나 해서 마스크를 벗는 일을 최소화하면서 일주일을 지냈어요. 확진자 가족은 대부분 권고사항으로 지침이 내려오는데 많이 혼란스러웠던 것 같아요. 개인의 시민의식에 의존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저는 증상이 없어서 추가적인 검사 조치를 선택해야 할지 말지 고민을 했어요. 병원에 가서 검사받는 것 자체가 감염에 노출된다는 걱정이 들었어요. 병원 관계자가 주의를 주긴 했지만 검사받는 사람들 가운데 기침하는 사람들과 아주 가까이에 있어야 하니까요. 너무 가까이 줄을 서니까 혼자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신경 썼던 것 같아요.
물건의 수명을 계획하에 한정하는 끔찍한 자본주의 제도를 거부하고 공동체 안에서 물건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결과로 우리는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돈을 저축하고 생물뿐 아니라 무생물까지도 돌볼 수 있는 역량을 개발할 것이다. (101p)
혜선 이 책을 읽으면서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되게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갖게 됐어요. 그러면서 사실 이 코로나가 워낙 저희는 외딴곳에 살고 있어서 그리고 이렇게 활동 범위가 넓지 않아서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코앞에 이제 제가 딱 당사자가 돼 버리니까 이 책 읽으면서 아까 영은 언니도 말씀하셨지만 되게 이런 사회에서 지금 우리가 이런 팬데믹을 겪었다면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겠구나, 라는 생각도 좀 들기도 했고 이중고 삼중고구나. 이거를 다시 느끼고 있어요. 요즘 왜냐하면 이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갈 때 제 상황이 어땠냐면 내가 꼭 출산하러 가기 직전처럼 출산하러 가기 전에 청소 싹 해놓고 뭔가 냉장고도 막 채워놓고 이렇게 하고 내가 언제 다시 집에 올지 모르니까 이렇게 대비를 하고 갔던 것처럼 이번에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갈 때도 검사를 도착했더니 한 한 시간 정도 점심시간이라고 그 이후에 오라고 해서 그 한 시간 안에 가까운 마트에 가서 혹시 내가 확진을 받으면 마트를 못 가니까 일주일 치 장을 진짜 막 이렇게 몸에 열은 조금씩 오르고 피로감이 쌓이는데 혼자서 그 장을 막 다 휘젓고 다니면서 보고 트렁크에다가 빼곡하게 싣고 그다음에 와서 또 그걸 정리하고 아들이 확진 받고 나니까 그걸 또 다 잘해 먹여야 한다고 하니까 또 삼시 세끼를 엄청 열심히 하고 이런 게 이게 내가 확진을 받고 나니까 그럼 이걸 누가 해줄 수 있지 이런 생각을 되게 절실하게 하게 됐고 되게 서럽더라고요. 그리고 다행인 건 동네 친구가 있어서 필요한 거 부탁이라도 좀 할 수 있고 이렇게 할 수 있어 다행인데 그 친구 없었으면 나는 우리는 어떡하지 이런 생각도 되게 들었고요. 지금의 사회가 이렇게까지 되게 저는 개인주의가 되게 좋은 거다. 개인주의는 되게 합리적인 거라고 교육을 받은 세대임에도 여러 가지 상황들에 노출이 되니까 그거에 대한 이제 의심이라도 품을 수 있었다면 이제 저희 아이는 고등학생이고 중학생이고 이런데 이 아이들은 저보다 더 극단적인 어떤 개인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거든요. 이게 도대체 왜일까. 부모인 내가 그래서 그런가 아니면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왜 아이들은 이런 가치관을 갖게 됐지, 라고 의구심이 들 때 이 책을 읽으면서 약간 납득이 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이 신자유주의라는 가치관 속에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교육받은 아이들 사회 속에 노출된 아이들의 이게 결과구나. 이런 거를 알게 되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고민이 많아지는 요즘입니다.
분명히 하자면 '돌보는 공동체'는 사람들의 남는 시간을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돌봄의 공백을 메우는 데 사용하는 것을 절대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돌봄 역량을 확장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끝내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기업의 횡포에 종지부를 찍고 협동조합을 만들고 아웃소싱을 인소싱으로 대체하는 지방자치 돌봄의 유형들을 포함한다.(110~110p)
정주 저는 이야기 들으면서 한 2년 동안 2020년 2월부터 이제 시작된 코로나 상황에 시간 다 스쳐 지나갔었어요. 이제 저의 경우를 보면 그러니까 지금 확진 상태나 확진된 가족 혹은 동거인이 있어서 돌봄을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이제 마을 안에 확진된 친구들이 혹은 자가 격리를 해야 하는 친구들이 있을 때 그냥 그 친구네 집 앞에 뭐 먹을 걸 좀 갖다 놓고 온다거나 이런 정도의 마을 안에서의 이제 돌봄이 기억이 나고 지금의 상황에서 저 같은 경우는 백신을 맞지 않는 걸 선택한 사람이었었기에 백신 패스가 중단되기 전까지 사실 굉장히 여러 가지로 힘들었어요. 심적으로 백신 패스를 선택한 어떤 이유나 이런 것들을 일일이 다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순간들을 계속 마주하면서 좀 그러니까 다른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의 건강을 영향을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어떤 나의 노력이나 의도 이런 걸 계속 이제 확인하면서 내가 참여할지 말지를 이제 선택해야 하는 그런 순간들도 많았었고 또 한편으로는 정부가 이런 감염병에 대해서 통제하고 관리하는 방식에 대해서 사실 굉장히 고민이 많고 지금도 어쨌든 이런 시기에 이런 방식이 계속 유효한가. 좀 고민되는 부분들도 있는데요. 그런 생각들이 또 있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지금 이제 샤이 오미크론이라고 해서 택배 기사님이나 일용직 일하시는 분들은 확진이 되면 일을 아예 못하게 되니까 아예 검사를 안 받는 분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제주도에 사실 1차 산업에 종사하시는 많은 분이 미등록 체류자분들이세요. 외국인. 그분들 같은 경우도 사실 확진이 되면 일주일 열흘을 일을 못 하시게 되는 상황이니까 또 양식장이나 밭 같은 경우는 진짜 고립된 장소이기도 해서 사실 사업주가 어떻게 그분들을 관리하고 있는지 사실 밝혀지거나 확인된 바가 없기도 하고 그래서 저도 한편으로는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어서 코로나 상황에서 사실 대면 활동들이 많이 줄면서 어떤 부분 수입이 확연하게 줄기도 했고 여러 가지로 이런 자가 격리 이 정도의 감염병 수준에서 혹은 이 감염병이 변화되는 그 추이가 반영된 상태의 어떤 방역 지침 이런 것들이 사회에 다양한 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저는 어려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부분 고민이 많이 되고 답답함이 드는 것 같아요.
특히 복지 국가를 이런 식으로 제공하는 것은 돌봄이 집안일 그리고 여성의 일이라고 여기는 전통적인 성별 분업의 개념을 넘어서게 한다. 돌봐야 하는 필요 또 돌봄을 받아야 하는 필요는 모든 이가 공유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121~122p)
채민 우리 어린이집 선생님도 확진되셔서 가정 보육을 하고 있는데 제 연차 쓰고 출장이나 이런 것들이 있을 수가 있어서 지금 이렇게 앱을 통해서 선생님들 모셔서 돈으로 때우고 있어요. 그렇게 하거나 방법이 특별하게 없기 때문에. 그러면 나는 어떤 거를 바라는 거지 이런 생각이 좀 들어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거지 내가 어떤 걸 요구할 수 있지 그러니까 요구된다고 하더라도 안 될 수 있지만 어쨌든 다음에 제 생각에는 이게 굉장히 다음에 또 다른 병이 또 올 것 같거든요. 왜냐하면 인간이 변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아요. 지금 이 체제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아서 그래서 또 올 것 같은데 지금 또 뉴스를 봤더니 또 오미크론 말고 또 다른 변이가 생겨서 그게 또 뉴욕을 덮치고 있다. 이런 기사 나오고 하는 거 보니까. 그래서 빨리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거지 이런 고민을 계속 좀 하고 있어요.
영구 지금 43개월 된 아기가 있습니다. 사실 아기가 다 43개월이긴 하지만 계속 어렸을 때부터 돌봐주는 이모님이 계시고 또 가까운 단지에 할머니가 계셔서 저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만약에 코로나 이런 감염이 되더라도 좀 할 수 있는 여건이 되긴 해요. 그런데 이렇게 여건이 됨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어려움은 있죠. 그래서 방에서 막 이렇게 혹시라도 제가 감기 증상이 있으면 방에서 혼자 자고 그러긴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조차도 이런 데 이런 여건이 안 되는 분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고 계시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가장 좋은 직접적인 대인 돌봄은 서두르지 않고 관계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돌봄을 받는 사람이 가진 역량을 주체적 능력과 웰빙을 개발하는 데 최대한 사용할 수 있도록 여러 요소를 고려하는 것이고 이는 시간이 요구되는 일이다. (124~125p)
은선 하필이면 저희 다 모여 있는 분들이 다들 여성인 거예요. 그래서 이게 이 돌봄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게 진짜 중요한 문제라는 거를 공감하고 있는 것이 여성들만의 일인가 여성들에게만 전통적으로 치우쳐져 있는 일이라는 게 확연하게 드러나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이 부분도 어쨌든 우리가 좋은 돌봄을 받기 위해서는 돈이 있든 아니면 시간이 있던 둘 중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 거예요. 앱을 쓴다는 거는 내가 돈으로 시간을 사는 거죠. 다른 여성의 시간을 사는 거고. 그 아래 ‘주 4일째 캠페인을 통해 호응을 얻고 있는 노동시간 단축이 돌봄에 대해 교육하고 돌봄 역량을 확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데 핵심적인 이유’다 이렇게 나와 있거든요. 그래서 주 4일제가 활성화되거나 아니면 노동시간 단축으로, 더 적은 시간 노동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어야만 서로 돌봄을 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채민 저도 한동안 그 고민을 해본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회에서 주 4회째가 된다. 하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남성들은 투잡이나 쓰리잡을 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 사교육비나 빚이 천지가 있기 때문에. 주 4일째가 되면 남성의 생계부양자 모델을 바꾸지 않는 이상은. 저도 노동시간 단축을 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지만 노동시간이 단축됐을 때에 이 책에서 나타나는 효과로 오기는 사실 쉽지 않을 것이다. 웃으면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웃을 얘기는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저는 좀 들었어요.
은영 저는 모든 국민이 주 40시간만 돼도 돌봄할 수 있는 시간은 확보할 수 있다는 주의예요. 그러니까 주 4일제로 하게 되면 주 4일제로 인해 매달 소득이 줄어드는 거에 대한 대안이 없이 무조건 하드웨어만 주 4일제로 바꾸면 주 4일제로 바뀌어서 혜택을 받는 사람들과 주 4일제로 인해서 더 취약해지는 부분이 완전 양극화될 것이라고 봐요. 노동자가 소속된 그 공동체를 서로 돌보는 시간을 할애하는 걸 전제로 해서 시스템이 개선되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 휴가를 내 거나 아니면 일의 종류를 밀도를 낮추고. 아이나 다른 가족들을 병원에 급히 데리고 가야 할 때나 아이 학교 활동에 참여해야 할 때 생계를 위해서 할애해야 하는 노동 시간과 내가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무임금으로 일하는 노동의 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은경 저는 임금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사실 돌봄의 질의 문제인 것 같아요. 이게 우리 같이 그냥 아이를 맡길 때는 있어요. 저렴한 데는 있어요. 근데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엄마까지 모두가 일해야지 질을 높일 수 있다면 그게 너무 힘든 것 같아 아이한테 더 높은 질의 돌봄을 주고 싶은데 내 가족한테 더 높은 질의 돌봄을 주고 싶은데 만약에 부모님이 아프셔도 그러면은 그 높은 질의 돌봄을 좀 함께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채민 저는 공교육이 정말 대전환돼야 한다, 라고 생각해요.
은경 아이가 유치원 다니고 있거든요. 유치원 보내면서 느끼는 게 뭐냐면 공교육이 유치원 정도 수준이었으면 좋겠어요. 프로그램을 보면 초등학교랑 되게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질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면 저는 솔직히 초등학교도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면 유치원하고 비슷한데 유치원보다 질이 떨어져, 라고 표현을 하더라고요.
혜선 어떤 선생님이 이제 저한테 그러셨거든요. 이런 모든 논의를 하다 보면 결국은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데 뭐가 중요한 사회냐 내 삶에서 뭐가 가장 중요하냐. 이런 것들을 선택할 때 돈을 앞세우지 않고 돈 말고 다른 거를 먼저 앞세울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하지 않을까. 결국은 그게 가치관의 형성에 되게 지대하다. 이렇게 생각이 든다고 하니까 그 선생님이 가장 어렵고 ‘너는 되게 이상주의자다’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근데 그거 말고는 진짜 저는 답이 없는 것 같아요. 아까 은경 언니께서 말씀하셨는데 유치원은 한 30만 원을 내고 지금 다니고 계시고 초등학교랑 프로그램이 비슷하지만, 유치원 교육의 질이 훨씬 좋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초등학교 중학교는 무상교육이잖아요. 우리가 돈을 따로 내지 않잖아요. 그러면 들어가는 재원이 적나.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왜 교육의 질은 이럴까. 결국 저는 밀집도의 문제인 것 같아요. 밀집도가 이 동네는 굉장히 낮으니까 지방 소멸 도시로 굉장히 위험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지난 2년 팬데믹 상황에서 학교가 멈추지 않았어요. 학교가 돈이 없지 않다고 생각해요. 많은 학부모를 만나면서도 느끼는데 그래요. 학교에다가 이런 우리 방과 후 프로그램 해봅시다, 이런 강사진을 모셔와 우리가 이런 거를 아이들하고 교육할 수 있게 해봅시다, 라고 얘기하면 학교에서 굉장히 쉽게 학부모들의 입을 딱 막는 게 그거거든요. 예산이 없다. 돈이 없다. 이렇게 얘기하지만, 운영위원회에 들어가서 예산안을 보고 또 교육청 예산안을 보면서 느끼는 건 돈이 없지 않습니다. 돈이 없지 않고 학생들 수는 줄지만, 교직원의 수는 줄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본인들은 수고로움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아요. 우리가 그 팬데믹 상황에서 되게 많이 겪었잖아요. 아이들이 등교 수업을 하고 있지 않고 온라인으로 수업이 대체되면서 교사들이 본인들이 해야 되는 역할에 손을 놓고 아이들 온라인 스트리밍시키고. 있는 플랫폼도 활용하지 않고 이런 일들을 너무 많이 봤잖아요. 그걸로 인해 모든 기초학력이 저하되고 이런 것들이 아이가 고등학교를 가니까 상황이 역전이 되더라고요. 확진돼도 수업을 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대학을 몇 명을 보내느냐 그것이 곧 이 학교의 결과가 되고 평가 지표가 되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들에게 학습을 시키려고 되게 노력을 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렇게 선생님들이 하니까 아이들의 만족도가 굉장히 높고. 사람들의 절박함의 정도도 되게 다르고 그래서 이게 뭔가 선순환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단순하게 개념적으로 알고 있는 이런 것들이 굉장히 상충하는 경험을 하는 몇 년인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 경쟁을 하게 했더니 교육의 질이 높아졌다는 걸 지금 경험하고 있는데 그게 좋지 않은 또 결과를 낳았다는 게 우리 대한민국 사회로 보면 또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상황인 거잖아요. 어떻게 이걸 받아들여야 할지 저 자체도 굉장히 공부가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는 요즘이다.
은경 밀집도 말씀하셨잖아요. 최근에 건축 관련된 서적이라든가 방송들을 보면 다큐멘터리 이런 거 보면 반대로 가고 있어요. 밀집을 높이자고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다른 데는 자연을 놔두고 도시의 밀집을 높이면 에너지를 최소로 쓴다는 거예요. 효율이 높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파트가 전원주택보다 에너지 효율이 높으니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는 도시화가 좋다는 게 요즘에 바뀌었어요. 옛날엔 위치를 좀 낮춰야 한다고 얘기를 했는데 최근의 건축 방향은 더 밀집하자는 분위기로 가고 있고. 분산하려고 지방으로 보냈잖아요. 서울로 밀집은 좀 떨어지기는 했지만, 지방에서도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전체적으로 봤을 때 밀집도를 해결하면 부동산이 해결되거든요. 부동산이 해결되는데도 불구하고 이 밀집은 욕망과 접해 있어서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고, 에너지 효율의 방향성이 전 세계적으로 밀집을 하는 게 더 좋다고 하는 방향으로 가다 보니까 아마 밀집도는 더 높아지지 않을까. 대신에 이 팬데믹을 겪으면서 모든 문화가 바뀌긴 했어요. 이렇게 줌으로 토론을 하고 그러면서 좀 다른 식의 사회가 좀 될 수 있지 않을까. 학교에 인원만 줄어들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어요. 근데 요즘 아이 전원이 50명일 때 저희가 50명일 때 학교에 다녔는데 20명대 됐는데 오히려 왕따가 더 많대요. 왜냐하면 여러 명의 분류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한 분류밖에 안 생긴다는 거예요. 20명밖에 안 되니까. 거기에 안 들어가면 왕따가 된대요.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저도 공감하거든요. 근데 왜 대학을 이렇게 보내고 싶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마지막은 돈 때문이래요. 아이가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안정적으로 벌게 해주고 싶어서. 결론적으로는 양극화도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게 진짜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고요.
혜선 저희 아이 43개월 때 엄마들이랑 했던 이야기가 지금도 똑같아. 아이 고등학교 가서 학교 생활하는 걸 보면서 20년 전에 내가 고등학교 생활할 때랑 아직도 똑같구나! 선생님들이 하는 얘기는 똑같구나! 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엄청 많이 급변했는데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사회를 인식하고 교육하고 학습하는 수준은 20년 전 25년 전에 머물러 있을까를 느끼게 돼서 굉장히 좀 씁쓸하네요.
은영 다시 책으로 가보면 126페이지부터 쭉 읽어보면 나름의 사례들이 나와 있잖아요. 처음부터 읽어보면 ‘인프라의 붕괴와 돌봄과 생계 재난에 직면하면서, 정부 차원에서는 보기 드물지만 몇몇 도시와 지자체에서 정책 수행 관한에 관해 제고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해서 몇 가지 사례들을 제시했어요. 가족 공동체에서만 돌봄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지자체 안, 최소한의 단위에서 공동체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거기서 결국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가 돌봄 시스템을 체계화하는 것이지요. 돌봄을 기반으로 한 체제로 바꾸는 데에 이제 단계를 밟아간다는 거로 이해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궁금합니다.
우리가 조금 대안적인 얘기를 해야 하는 거죠. 사례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실 저는 지방자치에 대한 개념이 그리고 풀뿌리 민주주의가 얼마나 가능할까 그래서 저는 사실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학습했던 사람이고 그런 시민운동을 사실 탑다운 방식으로 학습이 체화됐던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러다가 풀뿌리 민주주의를 시연하려고 하는 단체에서 일하면서 탑다운 방식으로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게 되었어요. 톱-다운이 신속하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되게 표피적이다. 결국은 밑에서부터 바튼-업(bottom-up)으로 가야 하고 바튼-업을 통해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쉽지는 않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쉽게 가는 방법 없다. 그게 결론이에요.
채민 쉽게 가는 방법은 없어요.
은영 결국은 제일 어려운 길을 선택해서 지치지 않고 가는 방법인데 그 지치지 않은 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가 이제 숙제인 거예요. 하마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죠.
혜선 저는 그래서 결국은 이 민주주의라는 것은 되게 개인의 성숙을 필수로 한다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고. 그래서 주민자치회나 학생회도 그렇고 학부모회도 그렇고 총회를 하게 되어 있잖아요. 어떤 모임에서 총회를 하게 돼 있는데 사람들이 그런 걸 할 때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건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까 봐 가장 부담스러워하거든요.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굉장히 원하지만,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왜일까를 생각해 보면 참여하지 않는 개인으로 우리가 키워진 건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돼요.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교육받지 못했고 그런 사회이지 않고. 초등학교 정도까지는 개인의 다양성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굉장히 이렇게 추대되지만 결국 중고등학교에 가고 성인이 되었을 때 그런 목소리를 내라고 모인 자리에서조차 목소리를 내는 거를 부담스러워하는 사회 속에 우리가 아직 또 살고 있구나.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면서 정치하는엄마들은 참 귀하다. 이런 생각을 갑자기 했습니다.
채민 우리 잘하고 있어요.
전후 복지 국가의 주안점을 일부 받아들이되 전통적인 인종차별적 정책과 경직된 위계 구조와 성별과 인종에 따른 노동 존엄을 거부함으로써 우리의 진보적인 국가의 비전은 경제적 환경적 난민을 만들어내는 조건을 무너뜨린다. (131p)
은선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가 했던 이야기랑 약간 연결을 이런 식으로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기는 인종차별적 정책 이야기도 했지만, 한국은 인종차별 없지는 않지만 좀 덜 하는데 지금 학교의 문제로 생각을 해보면 교사와 학생, 학부모 간에 경직된 위계의 구조 자체가 너무 문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구조 자체를 우리는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이게 경제적 환경적 난민이라는 의미는 정말 지금 우리 같은 상황인 거예요.
우리가 지금 되게 환경적 난민이 되어 버린 거죠. 이런 것을 만들어내는 조건들을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대전환 시대 공교육 대혁명 이거 진짜 읽어보고 싶어요. 오늘날 학교의 문제, 학교의 위계질서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현재는 그리스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시장 바깥에 남겨진 것은 그 가치가 폄훼되고 시장 외에 다른 부분 대개는 가정의 일부는 공동체에 위임된다. 대개는 가정에 일부는 공동체에 위임된다. 신자유주의 시장은 개인적인 참여 정서적 연결, 헌신, 공감 또는 관심을 기울이는 것 등의 가치를 금전적인 보수가 지급되는 계약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인정하지 않고 인정할 수도 없다. (139p)
돌봄이 종종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또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페미니스트 경제학자인 낸시 폴브레가 말했듯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닌 ‘보이지 않는 심장’을 생각해야 한다. 즉 우리는 돌봄과 연민의 힘이 시장화된 개인의 이기심보다 항상 앞서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보편적 돌봄 모델은 이러한 경제적 모순의 해소를 향한 가장 중요한 단계다. (143p)
은선 저는 이 부분이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그동안 경제의 논리는 항상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인다고 하는데 이 ‘돌봄 시장’에서는 그러니까 ‘돌봄 시장’이라기보다는 <돌봄 선언>에서는 보이지 않는 심장이 정말 중요한 거죠. 보이지 않는 심장이 움직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고 보이지 않는 심장이 움직이도록 우리가 우리 자신도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이 너무 좋았어요.
혜선 저는 139페이지 별 두 개 쳤어요. 신자유주의 시장에 대한 뭔가 명쾌한 해설 되게 이 책 읽으면서 전체 중에 가장 저에게 크게 가슴을 올렸고요.
첫째, 우리는 모든 돌봄 분야와 인프라의 마구잡이식 파괴적 시장화에 시급하게 저항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에 맞서 더 많이 돌보고 공평하며 생태사회주의적인 대안 구축을 시작해야 한다. (146p)
혜선 가슴이 웅장해지네요.
채민 151쪽도 읽어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사회와 지구에 대한 염려가 이익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 협력적인 상호 지원 네트워크에 중심을 두고 모든 이의 돌봄 요구에 따라 사회적 물질적 불을 재분배하는 돌보는 경제 구조가 필요하다 오늘날 부는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규모로 세계 곳곳에서 자본가 계급 내에서
유용되고 배분된다. (151p)
혜선 분노가 치밀어 오르네요. 그냥 152페이지도 짧으니까 제가 이어서 읽겠습니다.
“너희는 우리를 묻어버리려고 했지/ 그러나 너희는 우리가 씨앗이었다는 것을 잊었지!” (152p)
혜선 통쾌합니다.
은선 혜선 언니의 말씀도 너무 가슴에 탁탁 와 닿고 이 문장도 제가 정말 좋아하는 문장이거든요. “너희는 우리를 묻어 버리려고 했지. 그러나 너희는 우리가 씨앗이었다는 것을 잊었지” 눈물 날 것 같아요.
팬데믹은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데 결정적인 필수 기능들을 극적으로 또 비극적으로 조명했다. 간호사, 의사, 택배기사들과 쓰레기 수거 노동자들의 노동을 말이다. (162p)
채민 표현이 너무 기가 막히네요. 그래서 ‘극적으로 또는 비극적으로 조명했다’라고 하는 표현이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세상에 대한 돌봄은 모든 영역에서 사회 인프라와 공유 공간의 재건과 민주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보적 운동과 기관들의 지원과 동맹을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169p)
따라서 더욱 돌보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좀 더 느슨한 국가 간 경계가 매우 중요하다 신자유주의도 나름의 비뚤어진 방식으로 국가 간 매우 일관성 없고 적대적이며 인종 차별적인 국경 제도를 만들었다. (173p)
은영 마지막 하나 남았는데 계속 읽어주시겠어요.
돌봄 선언은 ‘보편적 돌봄’이라는 퀴어-페미니즘-반인종차별주의-생태사회주의의 정치적 비전을 제한한다. 보편적 돌봄은 직접적인 돌봄 노동뿐 아니라 타인들과 지구의 번영에 대해 관여하고 염려하며 공동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177-178p)
구조적인 무관심과 돌봄의 부재가 모든 곳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 복잡성은 존재하지만 일단 돌봄에 대한 공헌으로 시작하자 그리고 가능한 모든 곳에 좀 더 지속적이고 참여적인 돌봄에 대한 전망과 맥락과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180p.)
은선 173쪽 ‘돌보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좀 더 느슨한 국가 간 경계가 매우 중요하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보이지 않는 가슴과도 연결이 되어 있고요. 그리고 우리가 지금 채민 언니도 저도 그렇고 뒤에 우크라이나 깃발을 걸고 있잖아요. 이렇게 국가의 국경을 넘어서서 저쪽 반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 서로 마음을 쓰고 돌봄을 할 수 있다면, 지원을 할 수도 있고 재해가 일어났을 때 구호 물품을 보낸다든지 이런 것 자체가 국경을 넘어서는 돌봄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 너희들이 묻어버리려고 했지만 씨앗이라는 것을 잊었지. 잘하고 있다. 칭찬하고 싶었고요.
정덕 개인적으로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하는 사람들-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바꿀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화가 많이 나기 때문에 활동을 시작한 거기도 하거든요.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정말 우리랑 동일한 인간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을텐데, 너무 함부로 대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취급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게 분명히 있어요. 침묵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고 말을 했을 때 거북한 사회적인 반응들. 그냥 '너 괜찮냐'고, ''너한테 뭐가 필요한지 우리가 좀 같이 얘기해 볼까' 나는 그 한마디면 되는데 그 한마디를 꺼내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는 너무나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회로 인해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게 아이들이라는 걸 우리는 아니까. 그런 이야기를 계속 이야기할 수 있으면 저는 그것만으로 매우 큰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언니들이랑 같이 읽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워요. 그냥 쓱 한 번 읽고 지나갈 수 없는 곳곳에 언니들의 이야기들이 다 있잖아요. 영국에서 건너온 이 책이 전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고 있고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저는 믿고 있어요.
** 다음 모임 안내 **
4월 독서모임
▣일시 : 4월 17일(일) 오전 9시부터
▣주제 : 대전환시대 공교육 대혁명
(송주명 지음, 진인진 펴냄, 2022)
📌Zoom 온라인 독서모임 참가 신청
정치하는엄마들 소모임 ❝엄마들의 책장❞은 달마다 셋째 일요일 아침 온라인에 모여 주제로 정한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4월에는 경기도 교육감으로 출마한 송주명 교수의 『대전환시대 공교육대혁명』과 함께 합니다. 1, 2, 4장 이채민 언니의 발제와 3장 오은선 언니의 책 요약 발제를 듣고, 하마 언니들과 토론을 벌일 예정입니다.
책을 모두 읽지 않으셔도 참여 가능합니다. 더 많은 하마 언니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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