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플랫팀] ❝과거의 투쟁이 만든 오늘, 우린 비폭력 직접 행동에 빚졌다❞

“우리 사회에서 특정 집단의 요구가 100% 관철되는 것은 어렵고, 선량한 시민 최대 다수의 불편을 야기해 뜻을 관철하겠다는 방식은 문명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2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의에서 이준석 당대표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서울지하철에서 벌이고 있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두고 한 말이다. 최근 이 대표의 발언을 보면 ‘특정 집단 대 선량한 시민’으로 갈라칠 의도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중증)장애인의 문제를 특정 집단의 문제로 규정하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몰이해의 방증이다. 또한 전장연의 투쟁이 소속 회원만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장애인의 헌법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기에 그들 또한 선량한 시민이다. 반면 국민의힘 의원들이 장애인 이동권·교육권 보장을 위한 법안의 심사(통과가 아니라 심사)를 지연시킨 일이나, 문재인 정부가 법 이행에 소요되는 예산을 책정하지 않아 입법 취지를 무력화시킨 일이야말로 문명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들이다.
 

이 대표의 잇따른 발언을 적극 지지하고 전장연의 투쟁을 용납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다는 걸 잘 안다. 나 또한 타인의 불편을 일으키는 집회·시위 현장에 여러 차례 서봤기 때문이고, 그 자리를 스쳐 지나는 시민들로부터 냉소적인 시선과 비판적 의견을 받아봤기 때문이다. 십중일이는 응원과 격려의 말도 건네지만, 욕설이나 저주도 심심치 않게 듣는다. 나도 사람인데 왜 위축되고 미안한 마음이 없겠는가?
 

전장연뿐 아니라 비폭력 직접 행동이나 시민 불복종에 동참하는 활동가들은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반응이 돌아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다시 같은 자리에 선다. 나의 행동이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것이고, 사회의 진보를 가져온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출근길에 큰 불편을 겪고 계신 분들 그리고 이 대표 역시 과거의 숱한 투쟁에 빚진 채 오늘을 살고 있다. 즉 비폭력 직접 행동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오늘날 전장연의 지하철 운행 방해 행위를 어떻게 바라볼지 지표가 될 것이다.
 


(좌)이형숙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3월 24일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진행한 ‘출근길 지하철 타기’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정희완 기자 (우)미국의 서프러제트 여성이 거리에서 ‘여성을 위한 투표’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연설을 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좌)이형숙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3월 24일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진행한 ‘출근길 지하철 타기’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정희완 기자 (우)미국의 서프러제트 여성이 거리에서 ‘여성을 위한 투표’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연설을 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20세기 초 영국, 서프러제트로 불리는 활동가들의 여성참정권 운동은 지하철 운행 방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과격했다. 1903년 조직된 여성사회정치연맹(WSPU) 내부에서도 투쟁 방식에 대해서 이견과 갈등이 있었지만, 활동 초기 평화시위가 성과를 얻지 못하자 과격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의회 등 공공기관에 돌을 던지고 방화를 저지르는 등 과격한 투쟁으로 서프러제트들은 체포·수감·고문·단식·강제 식사와 같은 처벌을 감수했다. 1913년 6월4일 열린 더비에서 경주 중인 조지 5세의 말에 뛰어들어 죽음에 이름으로써 여성참정권 투쟁을 널리 알린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은 생전에 9번 체포됐고, 감옥에서 7번의 단식 투쟁을 했고 그 대가로 49회의 강제 식사(고문)를 당했다. 사망 한 해 전인 1912년에는 강제 식사 등 고문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감옥에서 투신했으나 척추 골절 등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목숨은 건졌다. 1928년에 이르러서야 영국의 인민대표법은 남녀 동등하게 21세부터 선거권을 가지도록 개정되었으니 이는 100년도 채 안 된 가까운 역사다,
 

1950~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흑인 민권 운동은 또 어떤가? 그들은 버스에서 식당에서 학교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불편’ 그 이상의 상황을 만들어 내야 했다. 1957년 9월 전미유색인연합(NAACP)은 학교에서의 흑백 분리가 미 수정헌법에 위배된다는 1954년 대법원 판결을 바탕으로, 아칸소주 리틀록의 백인학교 센트럴 하이스쿨에 ‘리틀록 9인’으로 불리는 9명의 흑인 학생이 입학 신청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아칸소 주지사 오벌 포버스는 등교를 막기 위해 주 방위군을 동원하여 학교를 봉쇄했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연방군 최정예부대를 투입해 리틀록 9인의 등교를 보장했다. 리틀록 9인은 학교에 다니는 내내 살해위협 등 온갖 폭력에 시달렸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 대표 또한 미국에서 대학교를 다녔으니 60여년 전 리틀록 9인의 비폭력 직접 행동에 분명 빚지지 않았는가?
 

오늘날 WSPU·NAACP의 투쟁을 특정 집단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비문명적인 행동이라 평가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들의 투쟁은 여성만을 위한 것, 흑인만을 위한 것, 장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을 통해 인류는 진보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전장연에 투쟁을 중단하라고 하는 대신, 정부와 국회에 장애인의 이동권과 교육권을 보장하라고 함께 외치자!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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