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투명장벽의 도시②> | 도시 전체가 ‘노키즈존’… 놀이터가 7만개인데 “놀 곳이 없어요”
투명장벽의 도시②
도시 전체가 ‘노키즈존’…놀이터가 7만개인데 “놀 곳이 없어요”
투명장벽의 도시② 지금 당장 놀이터
9살 예은이가 지난달 13일 성남시 중원구 집 근처 놀이터에서 홀로 그네를 타고 있다. 성동훈 기자
“이것 봐, 내가 만들었다!”
지난달 23일 경기 성남시의 한 도서관에서 만난 9세 예은이는 한껏 들떠 있었다. 나무 막대로 직접 만든 장난감을 자랑하며 실내를 누비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예은이의 작품은 도서관 내에 자리한 어린이 작업실 ‘모야’에서 탄생했다. 단추, 털실, 병뚜껑, 글루건, 드라이버 등 100여종의 재료와 공구를 갖춘 곳이다. ‘무엇을 어떻게 만들라’고 지시하는 어른도 없다. 143㎡의 널따란 라운지에서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보드게임을 하거나, 비밀 이야기를 소근댔다. 채율(9)이처럼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한다.
경기 성남시 라이브러리 티티섬을 이용하는 어린이들. /성동훈 기자
이곳은 지난해 8월 개관한 사립 공공도서관 ‘라이브러리 티티섬’이다.12~19세 어린이·청소년 중심의 도서관을 지향하며 설계 때부터 아이들의 의견을 반영했다. 전체 공간의 절반가량이 12~19세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12세 미만도 전체의 15%나 된다. 티티섬의 정체성은 도서관이면서 동시에 놀이터다.
티티섬에서 예은이는 내내 쾌활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열흘 전 집 근처 놀이터에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티티섬이 휴무인 화요일, 학교를 마친 예은이는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혼자 그네를 탔다. 근처 공사장의 굴삭기 소음이 유독 커 풀 죽은 목소리가 들릴까 말까 했다. “애들은 다 학원 가서 바빠요. 심심해요.”
성남시 중원구 일대. 빼곡한 주택들 사이에서 어린이들이 놀 공간을 찾기는 쉽지 않아보인다. 최유진 PD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한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 방구뽕은 사회와 부모가 어린이로부터 앗아간 ‘시간’을 돌려달라고 외친다. 하지만 방구뽕의 선언에 아이들의 ‘공간’을 되돌려달라는 요구는 없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어디에서 놀아야 하나. 식당·카페에서 시작된 ‘노키즈존(No Kids Zone)’은 사회로 확산되고 있다.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는 놀이터는 드물다. 어린이를 환대하지 않는 현실에서 어린이는 어떻게 자라고 있을까. 지난 8월부터 두 달간 놀이터와 학교에서 30여명의 아이들을 만났다.
[어린이들이 말하는 놀이터 실상 고발(?) | 투명장벽의 도시 ep1 | 경향신문 창간기획]
“편의점에서 놀자”
부산 동구의 한 초등학교 앞 편의점. 매일 이곳을 찾는다는 윤아(오른쪽)가 같은 구에 사는 친구 지우와 함께 파라솔 의자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성동훈 기자
지난 8월26일 부산 동구 A동의 한 편의점. 문을 열자 여자중학교 학생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근처 초등학교의 6학년생 윤아(12)는 진열대를 서성이다 젤리 한 봉을 골랐다. “편의점은 매일 무조건 간다”는 윤아는 능숙하게 가게 바깥 파라솔 벤치에 자리를 잡는다. 편의점 안 테이블은 여중생들이 일찌감치 선점해 핫바와 컵라면을 먹고 있다.
“학교 끝나면 물이나 간식을 사서 친구들이랑 앉아 있어요. 카페보다 싸고 눈치도 덜 보여요. 시원하고요.” 윤아는 친구들이랑 수다 떨 때가 제일 즐겁다. 문제는 그럴 공간을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집 근처엔 놀이터가 없고, 학교 앞에 잠시 쉬다 갈 분식집이나 문구점도 없다. 근처 여자중학교도 같은 사정이다. 편의점 점원은 “여기 손님은 거의 다 근처 초등학생, 중학생”이라면서 “학원 가기 전에 여기 앉아서 뭘 먹는다”고 했다.
어린이는 도시 공간을 얼마나 이용하고 있을까. 대도시에 거주하는 7~12세의 어린이 10명에게 물었더니 8명이 자기 동네는 어린이가 살기 좋은 곳이 아니라고 했다. 지역은 달라도 “놀 곳이 없다”는 이유는 같았다. 지난해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만 17세 이하 전국 아동 447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원하는 아동정책으로 ‘놀이 및 문화시설 확대’가 꼽혔다.
윤아가 지난 8월 26일 부산 동구의 한 노래방 앞에서 친구들과 메세지를 주고 받고 있다. /성동훈 기자
놀 곳 없는 도시의 어린이들은 편의점으로 모인다. 적은 돈으로 잠시나마 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상업시설이다. 강현미 건축공간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편의점이 어린이 놀이터를 대체하는 커뮤니티 공간이 되고 있다”고 했다. “예전엔 학교 앞 분식점이나 문구점에서 특별한 목적 없이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이들의 커뮤니티 활동이었다면 이제는 편의점이나 생활용품점이 그 역할을 일부 대체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미국의 도시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는 책 <제3의 장소>에서 가정과 일터(학교)가 아닌 ‘제3의 장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타인과의 목적 없는 접촉을 통해 교류와 소통이 주는 재미를 경험할 수 있는 카페, 주점, 서점 등 제3의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이들 역시 그런 곳이 필요하지만 선택지가 좁다. 윤아는 요즘 친구들과 지하철역 근처 노래방에 자주 간다. “6명이 같이 가면 2명만 노래 부르고 나머지는 그냥 휴대폰 보고 게임해요.” 친구와 있을 공간을 얻기 위해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 노래방에 간다. 티티섬을 운영하는 도서문화재단씨앗의 엄윤미 이사는 “도시에서 어린이·청소년이 갈 수 있는 공간 대부분은 학습 혹은 가족을 위한 곳”이라면서 “ ‘제3의 장소’로 꼽을 만한 곳이 없다시피 하다”고 말했다.
놀이터가 7만개인데 왜?
지난 8월26일 찾은 부산 동구 A동의 빽빽한 주택가. 성동훈 기자
아이들은 놀이터를 외면한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전국의 어린이 놀이시설은 7만8717개(올해 10월 기준)다. 놀이터를 주로 이용하는 만 12세 이하 인구가 503만4584명(행안부·8월 기준)이니 대략 어린이 64명당 1개꼴이다. 아주 적다고 할 수는 없는데도 어린이들은 놀 곳을 찾아 헤맨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전국 놀이터 중 4만1263개(52%)가 주택단지 즉 아파트 단지에 있다. 도시공원으로 운영되는 공공 놀이터는 1만1251개(14%)에 그친다. ‘외부인 출입 금지’를 내건 아파트가 늘면서 아파트에 살지 않는 어린이에게 놀이터는 접근조차 어렵다.
부산 동구 A동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6학년 현서(12)에게 동네 소개를 부탁했다. “일단 가파르고, 그다음엔 놀이터가 별로 없어요.” 아찔한 경사 위로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A동은 아파트가 드물어 놀이터도 귀하다.
온유가 지난 8월30일 경기 남양주시장애인복지관에서 수중 재활 치료를 받고 있다. /성동훈 기자
한 동네에 사는 윤아가 역 근처 노래방으로 시선을 돌리는 사이, 현서는 체육공원을 향해 가파른 오르막길을 걷는다. 도보로 20분 걸리는 체육공원은 현서가 좋아하는 축구를 할 수 있는 동네 유일의 공간이다.
김명순 연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주체적인 생존의 방법을 체득한다”며 “아이들의 놀 권리는 곧 생존권”이라고 했다. 김 교수가 정의하는 놀이는 “아동이 목적 없이 자발적, 주도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하는 행위”다.
지난 9월1일부터 일주일간 현서의 일상을 들여다보니 이런 정의에 걸맞은 놀이 시간은 3시간30분(이하 평일 기준 합계)에 불과했다. 축구는 한 번도 못했다. 현서에게 이유를 물었다. “길이 너무 가파르고 힘들어서요.”
장애 어린이에게 놀이터는 더 멀다. 서울 B구에 사는 초등학교 3학년 온유(9)는 근육이 천천히 괴사하는 희귀질환 듀시엔형 근이영양증 환자다. 온유에겐 몸이 가볍게 떠오르는 수영장이 놀이터지만, 장애아동에게 개방적인 수영 시설은 드물다. 온유는 그저 놀기 위해, 매주 이틀 이상 차로 왕복 2시간 거리의 남양주와 강동구의 시설을 오가야 한다.
어른 중심 놀이터
서울 D구의 우진·서진(11)이는 자기 아파트 놀이터를 ‘유치하다’고 했다. 성동훈 기자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도 놀이터에 불만이 많다. 부산 동구 C동의 지우(12)도, 서울 D구의 우진·서진(11)이도 자기 아파트 놀이터를 ‘유치하다’고 했다.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지 않게 만들어진 탓이다. 최소한의 법적 기준 혹은 구색만 맞출 요량으로 지어진 ‘공급자·어른 중심’ 놀이터가 태반이다.
<놀이, 놀이터, 놀이도시>를 쓴 김연금 조경작업소 울 소장은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공놀이, 물놀이 등 놀이 욕구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소통과 교류 공간을 필요로 하지만 여전히 많은 놀이터들이 유아 중심으로 조성돼있다”라고 지적했다.
지난 9월 초 서울 E구 한 아파트 단지의 한 놀이터는 보기 드물게 온통 어린이들로 붐볐다. 초등학교 1학년 시후(7)는 아파트 이웃이자 같은 반 친구인 영욱(7)이와 함께 나타났다. 시후는 “여기에서만 축구를 할 수 있어서 자주 온다”고 말했다.
1998년에 지어진 이 아파트는 약 4000가구가 사는 초대형 단지다. 시후의 어머니 송주은씨는 “단지 안에 총 네 곳의 놀이터가 있는데 두 곳은 분리수거장 근처 외진 곳에 있어 가지 않는다. 나머지 두 곳 중 여기가 더 넓어 자주 찾는 편”이라면서 “아이들이 너무 많아 놀지 못할 때도 있고 바닥이 시멘트라 위험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시후가 사는 서울 E구 아파트. 분리수거장 근처 외진 곳에 아무도 찾지 않은 놀이터가 있다. 최유진 PD
현행 주택건설기준 등에 대한 규정은 150가구 이상 아파트 단지에는 어린이 놀이터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고 정했을 뿐 면적 기준은 따로 없다. 놀이터를 비롯해 경로당, 어린이집, 주민운동시설 등 여타 주민공동시설을 모두 합한 면적 기준만 가구수별로 정한다.
김명순 교수는 “놀이터 규제의 적용을 덜 받는 구축 아파트들은 더 심각하다”면서 “입주민회의에서 어린이와 양육자의 목소리가 대표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놀이터 개·보수에 장기수선충당금이 쓰이는 일도 드물다”고 말했다.
공간 분배의 의사결정에서 어린이는 후순위로 밀린다. 놀이터 부족·부실이 ‘땅이 좁은’ 까닭만이 아닌 것이다. 최근 시후네 아파트는 안 쓰던 테니스장을 주민운동장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시후에겐 희소식이었지만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고 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구기종목과 고성방가 금지, 6시 이후 운동 금지 같은 이용수칙이 새로 생겼다. 송씨는 “사실상 아이들의 출입을 막은 셈”이라 말했다. 부지면적 18만㎡의 광활한 아파트 단지이지만 아이들이 맘 편히 뛰놀 공간은 없었다.
흩어진 시간을 모아라
채아의 학교 앞에 바로 붙어 있는 대규모 공공 놀이터. 최유진 PD
한국의 아이들이 충분히 놀지 못하는 것은 과도한 학업 부담 탓이기도 하다. 2018년 아동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만 9~17세 어린이 중 약 70%가 평소에 시간이 부족하다고 응답했다. 놀 시간이 없는데 놀이터가 무슨 소용이 있냐는 의문을 가질 법하다.
하지만 놀이터를 연구해온 도시계획학자 최이명 박사는 잘못된 인식이라고 본다. 그는 “시간이 부족한 게 아니라 시간이 안 맞는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흩어진 아이들의 시간을 모으는 것이 놀이터의 역할이라는 뜻이다.
“학교 끝나자마자 놀이터에 가면 친구들이 있어요.” 경기 F시 아파트에 사는 초등학교 1학년 채아(7)는 학교와 붙어 있는 공공 놀이터를 가장 좋아한다. 채아는 일주일에 16시간 이상을 학원과 방과후 수업, 돌봄센터 등에서 보낸다. 그럼에도 놀이 시간은 주당 11시간 이상으로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하게 많았다.
채아가 직접 그린 집과 학교 근처 놀이터 지도.
채
아의 학교 앞 놀이터를 함께 찾은 지난달 19일, 채아는 놀기로 약속한 친구 2명, 방과후 활동이 끝난 뒤 즉흥적으로 합류한 친구 1명과 함께 나타났다. 최유진 PD
서울 G구에 사는 초등학교 3학년 민준(11)이 역시 일주일에 11시간가량을 방과후 교육기관에서 보낸다. 하지만 놀이 시간도 약 13시간이나 됐다. 심층 인터뷰를 한 10명 중 채아와 민준이는 방과후 교육기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지만, 동시에 놀이 시간이 가장 많은 아이들이었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최 박사는 그 까닭을 “시간을 모으는 공간”, 즉 놀이터에서 찾는다. 그는 “저마다 파편화된 아이들의 시간을 모으려면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경로 가까이에 놀이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채아와 민준이가 사는 지역은 사교육 열기가 높으면서도 어린이 보행 환경·놀이 공간이 비교적 잘 조성된 곳이다. 채아와 민준이는 학교-학원-집을 오가는 10분 안팎의 동선 사이에 각각 5곳 이상의 놀이터를 알고 있고 그중 맘에 드는 2~3곳의 놀이터를 자주 찾는다.
공간이 어떻게 시간을 모은다는 말일까. 채아의 어머니 강주은씨는 “아이들의 방과후 일정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단체카톡방에서 약속 시간을 정해 놀이터에서 만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서울 D구의 우진, 서진 쌍둥이 형제가 그린 놀이터 지도. 집 근처에 다양한 놀이터가 없다는 것이 늘 불만인 형제는 조금이라도 더 흥미로운 놀이 공간을 위해서라면 모험도 불사한다. 지난 8월 말, 형제는 물놀이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분수대가 있는 근린공원까지 땡볕 아래 20분도 넘게 걸었다. 분수대는 수질 부적합 판정을 받아 가동이 중지돼 있었다.
도시 공간에선 놀이터가 단체카톡방의 역할을 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학교와 집 사이, 학교와 학원 사이 등 아이들의 동선을 고려한 적절한 입지, 그리고 수준·특색이 다른 놀이터들의 적절한 분포가 필요하다. 최 박사는 “아파트 단지의 남는 공간, 자투리 국유지에 선심 쓰듯 만든 놀이터로는 아이들의 시간을 모을 수 없다”고 말했다.
채아는 학원에 가기 전 잠시 짬을 내 학교 앞 놀이터에서 논다. 민준이 역시 학원과 학원 사이 남는 시간을 가까운 공공 놀이터에서 보낸다. 친구와 약속을 따로 잡을 필요가 없다. 각기 다른 시간에 짬을 낸 아이들이 놀이터에 있기 때문이다. 놀이터는 일단 가면 친구를 찾을 수 있는 ‘제3의 장소’인 셈이다.
채아의 학교 앞 놀이터를 함께 찾은 지난달 19일, 채아는 놀기로 약속한 친구 2명, 방과후 활동이 끝난 뒤 즉흥적으로 합류한 친구 1명과 함께 나타났다. 아이들이 그물과 암벽을 타며 신나게 노는 사이 채아의 다른 친구들도 종종 놀이터를 찾아왔다. 채아가 신나서 소리쳤다. “야, 우리 인터뷰하는데 같이할래?” 앞서 서울 D구에서 만난 우진·서진이와 찾은 4곳의 놀이터 중 3곳이 텅 빈 공간이었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도시 전체가 노키즈존
10세 이하 자녀를 양육하는 오은선, 박민아, 남궁수진씨(왼쪽부터)가 지난달 2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노키즈존 관련 좌담회에 참여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한국의 카페·식당에는 ‘노키즈존’이란 팻말이 붙은 곳이 적지 않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7년 노키즈존을 “나이를 이유로 한 합리적 이유가 없는 차별행위”라고 판단했지만, 노키즈존은 상업시설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노키즈존’에 해당되는 용어가 없고, 극히 드물게 논란이 되는 해외와 달리 한국에서 노키즈존은 일종의 규범이 되어가고 있다.
“아이를 낳기 전까진 서울의 대중교통이 불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편하게 탈 대중교통이 없어요.” 서울에서 캐나다 출신 남편과 5세 자녀를 키우는 오은선씨는 “캐나다에선 유아차가 버스에 타면 안전벨트를 맬 때까지 출발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면서 “서울에선 안전벨트는커녕 기사와 승객들에게 ‘왜 아이를 데리고 타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라고 했다.그는 “캐나다엔 아이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은 카지노, 술집, 스트립 클럽 세 군데밖에 없다”면서 “한국에 와 보니 아이는 그냥 다 출입금지”라고 말했다.
8세, 10세 두 자녀의 엄마인 박민아씨는 한국 사회가 아이의 아이다움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박씨는 “유아용 의자와 식기를 제공하는 식당이라도 아이가 조금이라도 보채기 시작하면 밖으로 나가줄 것을 요구할 때가 많다”면서 “울고 보채는 것이 당연한 나이인데도 점잖게 굴 것을 강요한다”고 했다.
도시가 아이들을 ‘예스(Yes) 키즈 존’에 가두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박씨는 “장애인이 시설에만 살기를 종용하듯 어린이도 키즈 카페나 학원 같은 키즈존에 격리해 두려는 사회”라고 말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남궁수진씨는 “비장애인 눈엔 장애인이 안 보이듯, 성인 눈에 어린이가 안 보이니 어린이에 대한 몰이해만 점점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키즈존은 아이들 앞에 놓인 또 다른 장벽이다.
아이들은 자란다, 차별과 함께
서울 D구의 우진이가 그린 어린이가 살기 좋은 동네. 지구가 온통 오락실로 뒤덮여 있다.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는 아이는 남을 차별하는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서울 구로구 서울하늘숲초등학교 6학년 서현이는 노키즈존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3학년 때 엄마랑 지나가다 식당에 ‘노키즈존’이라 써 붙인 걸 봤어요. 뜻을 듣고 어린이 차별 아닌가 싶었어요. 나중에 어른이 되면 복수해야지, 생각했어요.” 같은 학교 6학년 재황이는 ‘복수’라는 말을 여러 번이나 했다.
경향신문은 지난 8월31일부터 9월1일까지 하늘숲초 6학년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노키즈존에 대한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실시했다. 6학년 95명 중 86명이 조사에 응했고, 이 중 12명이 지난달 21일 심층 인터뷰에 참여했다. 조사 결과 69.8%(60명)가 노키즈존을 인지하고 있었고, 62.8%(54명)는 노키즈존이 ‘어린이에 대한 차별’이라고 응답했다. 2010년대 중반부터 노키즈존이 확산되면서 어린이 대다수가 노키즈존을 의식하고, 이를 차별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심층 인터뷰에 참여한 예원이는 “어릴 때 차별받은 느낌 때문에 (노키즈존에) 가거나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안전을 위해 노키즈존을 만든다는 어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어린이를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것보다 더 쉽고 비용도 적게 들어서 만드는 것 같아요.” 한별이의 생각도 비슷하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닐까요?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곳에서는 어린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울면 방해되니까요.”
서울하늘숲초 6학년 하은이가 지난달 21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최유진 PD
하은이는 어른이 돼 식당을 운영할 경우 어린이 안전사고가 나더라도 노키즈존을 만들 생각이 없다고 했다. “어린이는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거잖아요. 충분히 실수할 수 있고, 앞으론 그러면 안 된다고 깨우쳐줘야죠.” 설문에 응답한 83.7%(72명)는 ‘식당이나 카페 주인이 되어도 노키즈존을 만들 생각이 없다’고 했고 47.7%(41명)는 ‘성인이 된 뒤에도 노키즈존 시설에 방문하지 않겠다’고 했다. “차별하는 거잖아요. 그런 곳에 가서 그 의견에 동조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하은이)
어린이들은 노키즈존이 ‘차별’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차별은 고정관념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인데, 어린이는 당연히 시끄럽다는 생각으로 모두 못 들어오게 하니까요.” 반면 ‘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17.4%(15명)에 그쳤다. 해인이는 “실제로 식당에서 사고를 치는 아이들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른들이 차별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어른들이 차별하는 거니까 되게 열받아요.” 범이는 어린 동생과 함께 노키즈존 빵집 밖에서 덜덜 떨었던 8살 겨울 어느 날을 떠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조진희 교사는 “교과 과정과 학교 생활 전반에서 인권과 평등 개념을 폭넓게 배우는 덕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노키즈존을 심각한 차별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놀이터는 필수 인프라
지난 8월26일 부산 동구의 고지대에 조성된 골목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바닥에 그려진 ‘사방치기’ 그림 위에서 깨금발로 뛰며 놀고 있다. 성동훈 기자
어린이가 사회 구성원으로 동등하게 대우받는 도시로 만들 방법은 없을까. 엄윤미 이사는 “놀이터와 도서관은 ‘필수 공공 인프라’라는 인식을 정부가 가져야 한다”고 했다. 이미 주요국에서는 이런 정책들이 도입되고 있다.
영국 정부는 모든 거주지에 무료로 개방되는 자유 놀이터와 놀이지도자가 있는 놀이 공간을 조성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국가놀이전략(The play strategy)’을 2007년 수립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은 2008년 ‘바깥놀이공간’ 정책을 통해 놀이 공간의 질과 디자인을 보장하는 가이드라인을 세웠다.
독일 베를린은 인구 1인당 놀이터 1㎡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지구별 놀이터 계획’ 정책을 수립했다.
예은이가 그린 어린이가 살기 좋은 동네. 학교 바로 앞에 바이킹과 롤러코스터가 있는 놀이터,
그리고 바로 옆에 공공도서관인 라이브러리 티티섬이 위치해 있다.
온유가 그린 어린이가 살기 좋은 동네. 온유는 불편한 다리로도 쉽게 오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가장 먼저 그렸다.
김명순 교수는 “소득이 없는 어린이가 공간이라는 값비싼 재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국가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야, 딱지 더 갖고와!” “너 여기는 밟으면 안 돼!” 생각을 바꾸면 공간도 만들어진다. 지난달 26일 부산 동구의 한 놀이터는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들 12명의 목소리로 왁자지껄했다. 폭 5m, 길이 30m 남짓한 이 골목길에는 미끄럼틀, 그네, 시소 같은 놀이기구는 없다. 대신 바닥에 사방치기, 멀리뛰기, 키 재기, 손바닥 치기 같은 놀이를 할 수 있도록 금이 그려져 있다.
2020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부산종합복지관은 ‘골목 탐험대’라는 어린이 참여 워크숍 결과를 토대로 이곳에 ‘골목놀이터’를 만들었다. 동네의 골목 사정을 잘 아는 아이들의 의견을 반영했다.
부산 동구의 골목놀이터 한편, 네댓 명의 아이들이 챙겨온 보자기를 펼쳐 공 대신 제기를 올린다. 여럿이 보자기를 움직여 공을 공중에 띄우는 파라슈트 놀이의 변형된 버전이다. 최유진 PD
조윤영 관장은 “좁은 길과 계단이 많은 지역 특성을 감안한 결과”라면서 “설득이 어려웠던 주민들도 놀이터가 생기니 ‘이제야 사람 사는 곳 같다’며 좋아하신다”고 했다. 호응에 힘입어 지난해 골목놀이터 2호점이 설치됐고, 3호점도 준비 중이다. 골목놀이터는 ‘좁은 땅에 놀이터까지 끼어들 공간은 없다’는 편견을 깨뜨린다. 이곳에서 어린이들는 놀이와 교류, 환대를 배운다.
“공 대신 딱지를 올리면 어떨까?” 골목놀이터 한편, 네댓 명의 아이들이 챙겨온 보자기를 펼쳐 공을 올린다. 여럿이 보자기를 움직여 공을 공중에 띄우는 파라슈트 놀이다. 놀이는 순식간에 변주돼 공 대신 딱지가, 딱지 대신 제기가, 급기야는 신고 있던 신발이 올라갔다. 어린이는 그렇게 자란다. 놀면서 자란다.
🟣[경향신문 | 기획취재팀 | 김보미(전국사회부) 배문규·김한솔·김지혜(스포트라이트부)] 기사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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