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활동가 인터뷰집 리뷰] ❛전쟁없는세상다움❜에 대하여
- 장하나(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나는 2012년 강정마을에서 전쟁없는세상을 만났다. 거기서 오리, 여옥, 보라와 같은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을 보았다. 구럼비가 발파되던 날, 공사장 입구를 겹겹이 막아선 차량 바리케이드의 맨 앞줄에, 쇠사슬로 자기 몸을 트럭에 체결한 그들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나는 아직도 일 년에 한두 번쯤, 그날의 신문 기사를 검색해서 보기 때문이다. 오리의 녹색 후드티, 보라의 보라색 후드티와 같은 그날의 옷차림과 그들의 표정을 본다. 그날은 여전히 나의 트라우마지만, 그래도 트럭에 몸을 매고 자물쇠를 채우는 전없세 활동가들의 사진을 보면 긍정적인 기운의 가슴 떨림을 느낀다. 매일매일 눈 앞에 펼쳐지는 끝도 없는 오르막길 앞에서 ‘지치다지치다지치다지치다’ 환청을 듣다가도, 그 사진을 보면 다시 힘주어 발 구를 힘이 나는 듯하다. 사진 속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을 보면 (비슷한 성별, 비슷한 연령대라서 그런지) 감정이입도 되고, 대리만족도 되고, 내가 저 사람들과 아는 사이라는 사실에 으쓱한 기분도 난다. 구럼비 발파 며칠 전부터 발파에 쓰일 폭약이 보관되어있는 화약고를 봉쇄하는 활동을 이끄는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의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에, 비폭력 직접행동을 참 잘하는 조직(?)이구나 하는 인상이 컸다. 두 활동가가 PVC 파이프 양쪽으로 손을 넣어 카라비너를 체결하는 방식으로 긴 인간 띠·인간사슬을 만들어 화약고를 봉쇄했지만, 경찰은 한 줌 망설임도 없이 활동가들의 팔에 쇠톱을 들이댔다. 전쟁없는세상이 알려주는 데모 기법들은 신선했고, 활동가들에게 흉기를 선뜻 들이대는 경찰의 복무규정 위반은 희한했다.
돌이켜 보면 강정에는 행동으로 자신의 신념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평화활동가들이 많았다. (절대다수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부류는 어디서든 소수집단이게 마련인데 강정에서는 그 비율이 높게 느껴졌을 뿐) 나는 ‘말보다 행동으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는 활동가를 선망하고 동경한다. 나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늘 노력해왔고 여전히 노력 중이다. 현실 속엔 그런 활동가들이 흔치 않기에, 말과 행동이 다른 활동가들을 보면서 종종 실망했었고 결국 기대와 실망 둘 다 사라져갔다. 그래서, 강정에서 ‘생각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는 활동가’들을 여럿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다. 그들을 상기하며, 적어도 나 자신에 대한 기대는 잃지 않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10년 전에 강정에서 만난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도 내가 닮고 싶은 사람들 중 하나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인터뷰를 읽으며, 전쟁없는세상의 활동가들이 걸어온 길과 그들이 품어 온 고민을 엿보며, 그들을 닮고자 했던 나의 직관이 옳았음을 확인한다.
이게 바로 군사주의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그런 군대 문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나누는 거잖아요. 그리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입을 막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그런 게 군사주의라고 생각을 했어요. (11쪽, 최정민(오리) 님의 목소리)
여성이라는 이유로 발언권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병역거부운동의 역사는 자못 생소했다. 이 인터뷰집에는 내가 강정에서 전쟁없는세상을 만나기 10년 전, 전쟁없는세상의 시작에 대한 내가 전혀 모르던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다. 이 책을 통해 오리 님이 병역거부운동의 “대모”(9쪽)인 줄도 처음 알았다. ‘이러나저러나 배제는 배제, 이것도 군사주의’라는 오리 님의 각성은 이후 전쟁없는세상의 활동 방식과 조직문화에 면면히 이어진다. ‘내(우리) 안의 군사주의’에 문제의식을 가진 활동가들이 전쟁없는세상을 이루어 왔기 때문이다. 평화운동을 표방하는 여러 단체와 활동가들이 있지만, 그중에 전쟁없는세상이 차별화되는 지점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내(우리) 안의 군사주의에는 관대하고, 타자의 군사주의만 지적하는 평화운동(사회운동)이 아직까지도 흔하다. 그래서 전쟁없는세상은 전쟁없는세상 다우며, 병역거부운동·무기거래감시활동·비폭력트레이닝 등으로 아우를 수 없는 존재 가치와 영향력을 갖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인터뷰집은 여성활동가들의 존재를 비가시화하고, 여성활동가들의 활동의 의미를 과소평가해온 한국 사회와 병역거부운동 내부의 고정관념에 맞서 여성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병역거부운동의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기고자 기획되었습니다. 동시에 이 인터뷰집은 병역거부운동, 더 나아가 반군사주의 평화운동은 왜 페미니즘운동일 수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4쪽, 전쟁없는세상의 목소리)
그러나 현실의 여성단체들도 부당한 위계질서를 내재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을 여성운동의 문제라고 보기보다, 여타의 사회운동단체와 마찬가지로 여성단체도 그러하다는 말로 들어 주기 바란다. 예컨대 여성단체 안에서도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짧고 학벌이 낮고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도가 적은 사람들을 주변화하는 일은 일상다반사다. 급기야 성소수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부류의 페미니스트들이 부상하여 ‘폭력적인 페미니즘’도 성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평화운동이 페미니즘운동’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 별 감흥이 없다. 그런 연구를 통해 학위를 주고받는 한국의 대학들을 보라. 학생들을 철저히 주변화하고 학생과 토론하는 대신 죽은 언어를 전수하는 곳에서 학자들의 낡은 질서 속에 여성학도 나고 평화학도 난다.
나는 이 인터뷰집을 과소평가되어 온 여성활동가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반군사주의와 여성주의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책으로 규정하는 게 아쉽다. 평화운동이 페미니즘운동이라는 말은 누구든지 할 수 있지만, 그런 신념을 토대로 ‘행동’하고 같은 원칙으로 조직을 운영하는 단체/활동가들은 얼마나 희귀한가. 그래서 나는 ‘배제된 여성’이라는 규정 대신 ‘실천적인’ 활동가들의 인터뷰 선집으로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 그것이 전쟁없는세상의 고유성과 희소성을 더 명확하게 짚어내는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배제된) 여성·(반)군사주의·평화운동·병역거부운동 등의 키워드 대신 ‘실천적이고 자기반성적인 사회운동단체의 인터뷰집’이라는 표제로 나의 동료들은 물론, 분야를 막론하고 동시대의 모든 활동가에게 이 인터뷰집을 권하고 싶다.
🟣[여성활동가 인터뷰집 리뷰 | 장하나 활동가] 전문 보기
http://www.withoutwar.org/?p=19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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