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칼럼] 자기만의 방 (권미경)

1. 공간의 ‘방’
정작 ‘자기만의 방’ 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려고 보니 ‘자기만의 방’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2주 남짓 주어진 시간 중에 이 글을 위해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도 없다. 하루 종일 엄마를 필요로 하는 두 녀석과 부대끼다가 겨우 얻어낸 시간에 몇 줄 끄적이면서도 온 몸의 세포가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방을 향해 있다. 잠시 이불을 뒤척이는 소리, 기침을 하는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서 들여다보고 다시 돌아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다시 집중력에 시동을 걸어본다. 몸은 나만의 방에 있지만 결국 나는 단 한 평의 ‘자기만의 방’조차 간직하지 못했다.
남편과 나는 함께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평등하게 일하고 평등하게 육아한다(고 남편은 생각하지만 나는 아니다). 아이들을 함께 돌보며 일을 하지만 여전히 밥하고 빨래하는 것은 내 주관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이다. 사실, 남편은 나보다 잘 하는 일들이 꽤 많이 있다. 설거지 하기, 청소하고 걸레 빨기, 그리고 아기 기저귀 갈기는 그의 특기이고, 그래서 그의 몫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외에 대부분의 육아와 관련된 일에서 내가 부탁 혹은 명령하지 않으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라서 방황하는 그의 움직임은 함께 살림과 육아를 짊어졌다기 보다는 보육 도우미를 곁에 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할 때도 있다.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하루 일이 끝나면 가족들이 다함께 저녁 식사를 한다. ‘저녁이 있는 삶’이 어느 정도는 보장된 일상이다. 출산 전, 내가 직장에 다녔을 때에는 퇴근 이후에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던 저녁 시간이 단지 몇 시간 확보된 것만으로도 꽤 풍성해졌다. 게다가 텔레비전이 없는 우리 집은 해가 지면 바로 깜깜해져서 자연스럽게 취침 시간이 된다. 아이들이 일찍 잠들고 나면 바로 나만의 시간이 된다. 때때로 남편과 함께 좋아하는 취미 활동을 하기도 하는데, 영화를 본다거나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시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각자 개인적으로 몸과 마음을 충전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육아, 살림과 생업을 하루 종일 오가느라 피곤함을 호소하는 중에도 나는 이 시간에 책을 보며 음악을 듣는다. 쓰고 싶은 주제로 짧은 글들을 쓰기도 하고, 임신과 출산으로 일시 정지된 학업을 열망하며 혼자 논문을 써보기도 한다. ‘차라리 잠을 좀 더 자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이 시간에 이렇게 읽고 쓰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끔은 부질없는 짓 같기도 하다고 느끼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내가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더욱 씁쓸하면서도 간절한 시간이다.

2. 존재의 ‘방’
물리적인 ‘방’의 의미가 아닌, 여자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내가 아닌 오롯이 한 사람으로서의 나의 존재를 고민한다. 문득, 너무 어색해진다. 나는 하루 종일 엄마, 아내의 삶을 살아냈는데 그런 것들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자아로서의 나를 생각하려고 하니 그 둘은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아 끄집어내는 것도 어렵고 익숙하지 않다. 문득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려고 하니 멍해진다. 몇 년 전만 해도 일상적이던 의식의 흐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아서 속상하다. 예전에는 이렇게 열정적으로 나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온 힘을 다해 ‘나’를 들여다보려 하고 있다.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며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계속 일과 학업을 병행하고 싶은 꿈이 있었고, 틈만 나면 남편과 함께 이 계획들을 나누며 행복했었다. 그러나 임신을 하면서 내가 꿈꾸고 계획하던 모든 것들이 뒤틀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스스로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아 두려웠고, 패배감을 느꼈다. 그리고 출산 이후 감옥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창살 없는 감옥. 형량은 무기징역.
그렇게 ‘엄마’가 되었다. 시간적으로, 체력적으로 나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온통 아이를 향한 나의 신경세포들. 그런데 그건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었다. 이렇게 나는 스스로를 하나 둘씩 잃어 가는걸까, 두려웠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두려움은 때때로 분노와 억울함이 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내 인생이 정말 여기에서 끝인 것만 같아 불안한데 뚫고 나갈 힘도, 방향도 막연해서 답답했던 적이 여러번이었다.
가족들은 변화된 삶을 겪으며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나를 이해한다고 했고, 격려하고 위로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엄마’ 혹은 ‘결혼한 여성’으로서의 내 인생을 이야기할 때가 많았다. 심지어 같은 처지인 친정 어머니조차도 ‘나’의 삶이 아니라 ‘엄마’, ‘아내’, ‘주부’로서의 내 인생을 언급하시고는 했다. “원래 엄마의 인생이 다 그런거란다” “너는 엄마가 그게 뭐니?” “아무래도 결혼을 했으니까 예전하고는 달라야지”. 아무리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을 해도 내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 그래서 나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해 나가기 위해 더 몸부림을 친다. 아직은 제자리에서 발장구치는 수준이지만 언젠가는 헤엄쳐 나가겠지, 희망을 갖고 싶다.
‘나만의 방’은 아직 내 몸 하나 들어가기에도 비좁고 어둡기만 하다. 나는 여전히 이따금씩 느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 좁은 방조차 잃어버릴 것 같아 불안해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곳에서 숨을 고르고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두 발 뻗고 눕는 것은 힘들다 해도 하루 종일 온통 이 곳을 갈망하고 있다. ‘인형의 집’을 뛰쳐나와 ‘자기만의 방’을 갖는 삶. 마치 신기루를 따라가는 사막의 순례자가 된 것 같다.
구조와 현실적인 모순들을 해결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혼자서는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결국, ‘자기만의 방’을 지켜나가는 ‘우리들’의 존재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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