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하는엄마들 | 토론회] 더불어민주당 전국청년위원회 청년 아고라
저출생 '소멸되는 나라 한국'
■ 일시 : 2023년 5월 12일(금) 15시
■ 장소 :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
■ 주제발표
- 김동훈 (좋은세상연구소 대표) 한국'초'저출산 문제의 정치적 성격
좌장
- 정형선 (연세대학교 보건행정학부 교수)
발제와 토론
- 최윤경 (육아정책연구소 저출생가족정책연구실장)
- 황경석 (더불어민주당 전국청년위원회 홍보미디어부국장)
- 백운희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 안소현 (쿠키뉴스 기자)
| 주최 더불어민주당 전국청년위원회, 국회의원 전용기 의원실
| 주관 더불어민주당 전국청년위원회, 쿠키미디어 대학알리
| 안내 별도의 신청없이 자유롭게 현장 방청 가능
| 문의 대학알리 대표 김연준 010-7171-1336
<토론문> 백운희 활동가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백운희입니다.
임신과 출산을 직접 경험했고, 자녀 양육을 위해 육아휴직, 보육 서비스를 이용했지만 결국은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면서 경력단절을 거친 양육 당사자입니다. 아울러 돌봄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지 않는 사회, 함께 돌볼 수 있는 사회를 표방하는 시민단체의 활동가로서 ‘저출생’ 현상을 논하고자 합니다.
먼저 궁금해서 질문을 던져봅니다.
‘저출생’은 정말 문제일까요?
문제라면 이유는 무엇이고, 누가 가장 문제라고 느낄까요?
저는 출생아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야기되는 인구감소, 이로 인한 사회 부양의 문제로만 저출생 현상에 접근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출생과 더불어 한국의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전례 없이 빠르고 저성장 국면에서 고령화가 가속화되어 그 충격을 사회체제가 충분히 흡수하기 어렵다는 점, 노인 빈곤율이 OECD국가 중 가장 높을 만큼 한국 노인들의 삶이 고달프다는 점에서 오히려 고령화 사회를 준비하고 대응하는 것이 사회자원의 배분 측면에서는 훨씬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저출생’은 이미 40년 전부터 진행 중이지만 성과는커녕 오히려 세계 곳곳의 석학, 언론들이 주목할 만큼 국가 소멸 위기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1970년 통계 작성 시작 시기 합계출산율은 4.53에서 1983년 2.06, 2000년 1.48, 2010년 1.23, 2022년 0.78로 반등 없이 계속해서 하락세이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인구 억제에서 출산장려로 정책을 전환한 2005년 이후 20년이 가까이 되도록 저출생이 더욱 심화되는 것에 대해 대책을 논하기에 앞서 저출생이 지닌 함의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생은 “인간이 다음 인간을 이 세계에 데리고 올 때”야 가능합니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출산하는 데에는 선택이 따릅니다. 각자가 지닌 가치관, 처해 있는 사회경제적 환경, 구조적, 시대적 특성이 선택에 반영될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타인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개인의 선택이란 사실상 어렵기 때문입니다.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누구와의 관계에서 임신하고, 언제 출산할 것인지에 대한 개인적인 결정, 여성의 성과 모성에 대한 사회적 규범, 세대의 이동에 따른 책임과 의무와 권리, 가족과 친족의 관계, 국가와 종교의 이데올로기 등이 복잡하게 결합된 결과입니다.1)
출산에 정책, 문화, 노동구조 등 모든 것이 얽혀있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저출생’은 한국을 ‘살아가기 힘든 사회’로 진단한 개인과 집단이 내린 생존 방식의 결과라고 보고 싶습니다.
전방위적이고 중층적인 사회 문제 안에서 복잡한 고차함수적 개인의 선택이 저출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진단은 새롭지 않습니다.
이미 구체적으로 노동시장 격차와 불안정 고용증가, 교육에서의 경쟁 심화, 결혼과 출산에 허들이 되는 높은 주택 가격, 성차별적 노동시장과 일 가정 양립의 어려움, 돌봄 공백과 같은 사회 구조적 요인에 자녀를 일, 개인 생활, 파트너십보다 후 순위로 여기게 된 문화 가치적 요인이 더해졌다는 분석들이 체계적으로 제시됩니다.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다만 저는 이에 더해서 개개인이 지닌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에게 돌봄이 필요하다는 인식과 노력 대신 ‘각자도생’을 목표로 경쟁으로만 구성원들을 내몰아 온 결과가 “다음 세대를 데려오지 않겠다”는 선택으로 귀결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사자, 특히 여성을 배제해 온 엘리트 가부장 정치, 돌봄 노동을 천시하고 값싸게 돌보는 데만 골몰해 온 자본주의, 태어난 아이조차 지키지 못하고 아동과 양육자를 불편하게 여기는 풍조, 생존을 위협할 만큼 경쟁과 불안이 높은 사회를 원인으로 주목하고 싶습니다.
1. 저출생이 문제라면서 여성은 지우고, 값싸게 ‘돌보는 방법’에만 골몰하는 정치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공언했고, 대통령 당선과 정부 출범 후에는 여성을 지우는 정책에 본격적입니다. 노동, 복지, 돌봄, 안전, 평화, 거버넌스 등 성평등 관점에서 이들을 아우르고 성주류화, 성별 영향평가 등을 담당하는 부처, 즉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면서도 성평등 강화체계는 만들겠다는, “뜨거운 아이스커피” 같은 수사를 버젓이 내보이고 있습니다.
여성은 지우면서 임신과 출산하는 주체로만 여성을 소환하는 퇴행적 태도가 돋보입니다.2)
구조적 성차별은 차별의 의도와 상관없이 “기업의 제도, 정책, 관행 등이 복합적이고 반복적으로 작용한 결과 특정기업, 직종,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불리한 결과가 나타나는 차별의 양상”(구미경 외 2021)으로 풀이됩니다. 구조적 성차별과 이로 인한 노동환경, 돌봄의 문제는 저출생 현상과 직결됩니다.
한국에서 ‘돌봄’은 지극히 개인적 문제로 치부되고 이를 여성에게 전가해왔다는 건 주지의 사실입니다. ‘여성만’이 돌봄을 수행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여성’이 돌봄을 떠안고 있는 현실은 강고합니다. 여성은 “집에서 애나 보는 존재”로 규정됐다가 “일하지 말고 애나 잘 보라”면서 “애만 봐서는 안 된다”는 압박에 놓여왔습니다.
한국은 압축적 근대화가 진행되며 구성원들이 기민하게 삶의 방식을 바꾸고 변화하도록 요구했지만, 남성과 여성의 관계변화가 중심축이 된 것은 1990년대 말부터 나타난 현상입니다.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요구된 재분배의 문제, 성별 분업의 해체, 돌봄의 위기 등 변화의 역동 앞에서 이를 중대하게 의제화한 정치권은 없었습니다.
사람을 ‘인적자원’으로 보면서도 자원에 투입되는 생산비는 최대한 절감하고, 최소비용으로 최대가치를 뽑으려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원리가 근대 산업체제를 뒷받침하는 동안 이에 필요한 돌봄 비용은 가정과 여성에게 전가하는 모델로 수립된 것입니다.
최근 방영된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을 통해 고학력, 전문직 여성의 경력단절문제를 재조명됐습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차정숙처럼 전문직인 의사도 여성들은 경력단절로 인해 남성에 비해 임금이 70%에 불과하고, 과학 분야 역시 여성 관리자 비율은 전체 중 12.4%에 불과하다는 보도였습니다.
EU가 오는 2026년까지 여성할당제를 법으로 의무화하면서 유럽연합 내 모든 상장기업은 이사회의 40%는 여성을 비롯 과소대표된 성으로 채우도록 한 점과 비교되는 지점입니다. 참고로 한국의 상장기업 여성 임원 비율은 5.2%입니다.
한국 여성의 노동 생애적 특징은 M자형 고용률 곡선으로 대표됩니다. 이는 성차별적 노동환경을 증명합니다. 30대에 급격히 하락하는 여성고용률은 성별 임금격차, 미비한 돌봄정책, 양육하기 힘든 노동환경이 낳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통계청이 2021년 발표한 ‘기혼여성의 고용현황’에 따르면 ‘직장을 그만둔 사유’ 1위는 육아(43.2%), 결혼(27.4%), 임신.출산(22.1%), 자녀 교육(3.8%), 가족 돌봄(3.4%) 등 직간접적으로 돌봄노동과 관련돼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육아 목적의 비경제활동 인구 가운데 여성이 남성의 60배를 상회한다는 자료와 30대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올라가면서 혼인과 출산이 늦어진다는 진단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한국 남성의 가사 노동시간이 OECD 최하위이며 맞벌이 부부와 외벌이 부부 간 남편의 가사노동시간에 차이가 없다는 통계는 매년 연도만 바뀔뿐 수치상으로 큰 변화가 없습니다.
통계청의 ‘2019년 생활시간조사’를 보면 ‘가정 관리 및 가족보살피기’를 포함한 가사노동 시간에서 맞벌이 남편은 54분, 외벌이 남편은 53분이었습니다. 반면에 맞벌이 아내는 187분, 남편 외벌이의 경우 아내의 가사노동은 341분이었습니다.
가사와 돌봄 노동의 부담을 여성에게 지우는 분위기는 고용시장에서 여성에게 더욱 불리하게 작용됩니다.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는 자본은 애초 취업 과정에서 점수 조작 등 여성을 배제하기도 했으며 (KB국민은행, KEB하나은행, 신한은행 , 킨텍스, 한국가스안전공사 등) 복직이나 재취업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법적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육아휴직조차 공무원과 대기업 종사자가 아니면 사용하기 힘들다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육아휴직 급여의 낮은 소득대체율, 복직 후 고용 안정성을 고려했을 때 이들 직종이 아니라면 제도는 있으나 사용은 엄두 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현실입니다
문제는 시대가 바뀌었고, 가치 기준도 변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 여성이 대학 이상 교육을 받은 비율은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2020년 기준 국내 55~64세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은 비율은 18% 수준인데, 25~34세 여성은 77% 에 이릅니다. 한국 남성들은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 간 대학 교육 차이가 30% 포인트 정도인 반면 여성들은 60% 가까이나 됩니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딸 세대의 고학력화가 이뤄진 것입니다.
성차별적 사회 구조를 거부하는 여성들은 출산에 놓인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책임 앞에서 각자가 생존하기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경력단절, 비혼, 비연애, 출산 거부 등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시사인과 한국리서치가 지난 2월 만 18세~49세 한국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자녀는 반드시 낳아야 한다’는 인식에 대해 20대 여성 10%, 30대 여성 26.1%만 동의했습니다. 같은 연령대 남성의 경우 각각 35.5%, 37.7%로 차이를 보입니다.
‘자녀가 생기면 나의 사회적 성취를 이루기 어렵다’는 인식에는 20대 여성 68.7%, 30대 여성 57.5%가 동의했고 남성은 20,30대 각각 37.3%, 35.1%가 동의했습니다. 출산과 양육으로 인한 성취 불안에 성별 인식 차가 극명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여노에서 ‘90년대생 여성 노동자 실태조사’를 진행한 결과 평균 3번의 이직, 30인 미만 영세사업장에서 월평균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다가 2년 이내에 이직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노동자들은 구직 시 자존감 하락과 심리적 불안에 시달리고, 3명 중 1명은 성차별적인 채용을 경험했으며 5명 중 1명은 일을 하고 있지만 구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결혼이나 임신, 출산을 계획하기엔 현실이 강퍅하기만 한 것입니다.
특히 노동시간의 문제는 청년과 여성에게 더욱 직접적으로 가닿습니다. 저출생, 소득불평등과 중요한 상관관계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저임금 위기에 놓인 주변부(비정규직, 플랫폼, 간접고용) 노동자의 다수는 여성, 그리고 청년이며 장시간 노동은 휴식의 질을 훼손하는 동시에 전일제 노동자의 장시간 노동이 단시간 노동과 불안정 일자리를 더욱 늘리는 효과로 이어집니다. 이는 돌봄 노동의 성별성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아이를 낳지 않음으로써 불안정 노동에서 벗어나려는 현상을 가속화시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노동시장에서의 성별 격차와 구조적 차별에 대한 인식 없이 여성을 가정 내 역할에서만 협소하게 접근하게 되면 육아휴직, 근로시간 단축 같은 제도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심지어 이번 정부의 저출생 정책은 곳곳에서 상호 모순적이기까지 합니다.
공적 돌봄을 강화하겠다면서 가정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국공립어린이집 예산을 삭감하고, 과도한 경쟁이 문제라면서도 사교육을 오히려 부추기는 자사고 존치 등 교육정책을 가져옵니다. 일-생활 균형을 더욱 멀게 할 ‘주 69시간 노동시간 연장정책’을 고집했던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하기는 해야겠는데 뭐가 문제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드는 이유입니다.
국정 과제로 ‘누구하나 소외되지 않는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사회’를 제시했는데 공동추진 부처가 법무부, 농식품부, 여가부입니다. 누구하나 소외되지 않는 가족에서 사실혼이나 동거가구를 가족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일까요? 법무부가 가족 범위를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등으로 구성하고 있는 민법을 개정하려 들지 않는 한, 여가부가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을 재추진하지 않는 한 여기에서 가족은 전통적 가족주의에 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히려 반려동물은 포함될 여지가 높습니다.
강한 가족주의는 여성들이 출산을 줄이거나 아예 포기하도록 내몹니다. 가족주의를 강조하는 사회일수록 오히려 가족형성을 방해하는 역설(에스핑 엔더스, 1999)을 이 정부는 어떻게 생각하는 지 궁금합니다.
2. 구조적 성차별과 돌봄노동의 가치를 낮게 보는 사회는 최대한 적은 품과 비용을 들여 아이들을 키우는 방향으로 골몰해 왔습니다. 여기서 비용은 비단 정부의 관련 예산 책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가족지출’로 분류할 수 있는 예산 비중 자체도 OECD 등과 비교해 낮은 수준인 것은 사실입니다.
근본 원인을 바로잡기보다 비용을 들이지 않기 위해 보육 등 민간에 서비스를 맡겼으면서 관리는 소홀히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미온적으로 일관해 온 태도는 일관됩니다.
정치하는엄마들이 제도 및 법령 개선을 위한 노력해 온 활동을 중심으로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립유치원에서 교육비로 사용해야 할 원비로 장을 보고, 기름을 넣는 등 제멋대로 써도 양육자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십 년 이상 어린이집 급간식비 기준은 1인당 최저 1745원이었습니다.
안전해야 할 스쿨존에서조차 등하교길 사망사고가 잇따르는데도 대책 마련이 더딥니다. 주변의 위험한 보행로를 파악, 개선하기보다는 사고 발생시 가해자 처벌 강화를 들고 나옵니다. 비용은 적게 들이면서 책임은 면피하는 방식입니다.
양육자들의 노동시간을 줄여 직접 돌볼 수 있도록 하는 대신 양육자를 대신할 도우미를 외국에서 보다 저렴하게 데려오겠다는 발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엄마, 이모, 친구 엄마들이 돌려막던 돌봄을 학교에서 지자체로, 지자체에서 민간위탁으로, 외국에서 온 가사노동자로 바꿔 맡기려는 것입니다.
돌봄의 비가시화, 외부화, 무가치화를 방치하지 말고 근본적 전환을 논의하자는 외침은 그렇게 비용과 편익의 논리로만 접근되고 있습니다. 돌봄 받을 이에 대한 고려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런 사회에서 과연 아이들을 환대받고 있다고 느낄까요?
저출생을 우려하지만, 그럼 태어난 아이들은 존중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오 일 것입니다.
오히려 아이와 양육자를 불편해하고, 이들이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배워갈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라는 답이 맞을 것입니다.
최근 노시니어존 카페가 등장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됐습니다. 노키즈 존을 방치했더니 노시니어존까지 등장했다는 탄식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나라 전체가 노키즈존”이라는 양육자들의 토로가 낯설지 않습니다.
대중교통(저상버스 보급률), 여전히 부족한 전철역 엘리베이터, 카시트 설치 의무가 없는 택시, 유아차가 이동하기 힘든 인도, 찾아보기 힘든 수유실 등 여전히 아이와 집 밖을 나서는 일은 도전입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양육자들이 대형유통점으로 몰리는 이유가 수유실 등 편의시설이 보장되고, 주차와 이동이 편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노키즈존에 대해서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차별이라고 판단했고, 제주도에서는 조례를 제정해 이를 금지하려는 대응이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언론의 보도와 대중들의 반응은 노키즈존을 운영하는 업자의 입장에 서서 명분과 합리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자영업자가 손님을 가려 받기로 결정하는데는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심리적 부담, 리스크 관리 등 다양한 요인이 고려되는데 “오죽하면 그럴까”라는 선택적 감정이입과 영유아,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은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의식해선지 비판의 대상을 아동이 아닌 무개념 양육자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전개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무개념 양육자론은 최근 의료, 학교 현장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소아청소년과 폐과의 원인으로 맘카페 여론이 지목되고, 교사들의 직업 만족도를 떨어트리고 교권을 위협하는 빌런 학부모는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켄지 요시노는 <커버링>에서 “사회적으로 소수자일수록 문제행동을 일으켰을 때 집단전체가 낙인 찍힐 위험이 높다”고 기술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양육자는 소수자일까요? 그렇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정작 주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극성 부모가 왜 이리 온라인 커뮤니티와 공론장에서는 넘쳐나는 것인지, ‘맘충’이 되지 않기 위해 ‘무개념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더욱 몸을 사려야 하는 현실조차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듭니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지난 2019년 한국 정부의 사전 심의에서 노키즈존 등 어린이, 청소년 인권 실태에 대해 "전반적으로 한국은 아동을 혐오하는 국가라는 인상을 받았다"는 평가를 남겼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발표한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에서 한국은 OECD 22개국 가운데 22위, 국제 아동 삶의 질 조사에서도 만 10세의 아동 행복도 순위가 35개국 가운데 31위였습니다. 한국 청소년의 자살률이 지난해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는 조사도 암담합니다. 한국의 안전보고서 2022에 따르면 자살률은 인구 10만명 당 24.1명으로 특히 10대~20대 자살률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아동 청소년들의 정서적 압박과 우울감이 높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로서 마주하는 사회는 ‘이미 태어난 아이들조차 소중히 여기지 않는’ 곳입니다.
학내 성폭력 문제를 고발하는 스쿨미투 운동에도 불구하고 교육 당국의 무책임한 대응은 양육자들이 교육청에 ‘스쿨 미투’ 정보공개거부를 처분한 것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 지역별 학생인권조례 폐지 움직임에 대한 보수 세력들의 연대 등을 보면 우리 사회가 아동 청소년을 대하는 태도가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특히 ‘민식이법’을 향한 혐오는 극심했습니다. 아동의 돌발행동을 ‘초라니’(초등생과 고라니의 합성어)로, 심지어는 희생자인 고인을 모욕하는 ‘민식이놀이’로 명명했으며 언론은 이를 가감없이 보도했습니다.
심각한 아동학대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만 야단법석일뿐 아동학대특별법은 여전히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한 해 200명을 국외로 입양 보내는 수출 국가이자 여전히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뤄진 단위’만을 가족으로 상정하면서 저출생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이야기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냉소가 나오기도 합니다.
3. 한국 사회는 여러 이유로 불안 수준이 높습니다. 사회 보장적 안전망과 돌봄체계는 여전히 빈약하고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구성원들이 각자도생으로 내모는 경향은 오히려 강화됩니다.
전쟁 위험이 상존하는 안보 불안,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가 보여준 국가 안전 시스템과 책임정치의 부재, 기후위기 대응의 빈곤함, 열악한 노동환경, 신종플루부터 코비드까지 감염병의 늘어나는 상황에서 개인으로 살아가기도, ‘부모되기’의 부담은 더욱 가중될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 고용불안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2003년 32.6%이던 비정규직 비율은 2021년과 2022년 각각 38.4%, 37.5%로 증가했습니다. 그런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두 배를 넘습니다. 한국은 가장 높은 비정규직 비율 국가의 하나로 즉 고용의 질이 가장 나쁜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규직은 세계 최장 수준의 노동시간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비정규직은 최단 계약기간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임금 격차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임금을 거의 절반밖에 받지 못하고 시간제 노동자는 임금을 정규직의 약 4분의 1밖에 받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불안을 부채질하는 것은 이와 같은 상대적 결핍입니다. 코로나 시기 자산가격 상승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은 늘어났지만 고임금 일자리 숫자는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연봉 격차 심화되면서 연령대별 격차는 더욱 벌어지는 점도 원인입니다.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생애주기별로 멈추지 않고 진행됩니다. 과도한 경쟁이 발생하는 이유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청년층에서도 공인회계사, 세무사, 로스쿨 입학시험 응시 등 전문자격증을 취득하려는 움직임이 늘고 있는 점이나 수능 고득점자들의 의대 쏠림 현상도 결국은 취업난과 불안한 고용상황을 반영합니다. 2023년 수능에서 자연계열 상위 20개 학과 커트라인 모두 의과대학이 차지하고 의대를 지원하는 N수생 비중이 77%에 달해 현역 수도권 고3(15%), 지방 고3 (7%)을 압도한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지난해 초중고 학부모들이 지출한 사교육비 총액은 26조원으로 사상 최대치 기록했으며 이는 교육부의 올 해 유초중등 부문 예산(81조원)의 1/3에 달할 만큼 학부모들이 학원비로 지출하는 셈입니다.
중국의 한 연구소는 양육비가 가장 높은 나라로 한국을 지목했는데 자녀를 키우는데 드는 비용은 1인당 국민총생산(GDP)의 7.79배였습니다.(중국 6.9배, 독일 3.64배, 호주 2.08배, 프랑스 2.24배)
저출생으로 영유아 숫자는 줄어드는데 사교육비는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모습, 유아 대상 영어 학원, 소위 영어유치원(이하 영유)의 증가, 교육비 부담이 높은 사립초등학교 입학 경쟁률이 계속 올라가는 것 역시 이와 관련이 높습니다.
불안함과 부정감정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소모적인 노력을 멈추게 합니다.
결실이 없거나 확률이 낮은 투자는 멈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 키울만한 시간과 장소에서 살고 있다는 확신, 이를 높일 수 있는 단서(감정)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세계적으로 행복감이 높은 국가(미국, 아일랜드, 뉴질랜드, 덴마크,핀란드 등)일수록 출산율이 높다는 세계행복자료와 행복의 아킬레스건이 경제적 결핍이 아니라 사회적 부의 결핍, 즉 상대적 박탈감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결론>
출산 이후를 꿈꾸기 어렵고, 계획을 할 수 없는 사회에서 아이(육아, 돌봄을 포함)는 엄마 책임이며 모성은 그 이유로 보호돼야 한다는 퇴행적 시각을 집권 세력은 나서서 조장하고 있습니다.
여성을 출산하는 존재로만 한정하고, 성불평등 현실에서 ‘여성을 지우려’는 시도는 계속하면서도 인구와 가족은 존속하길 바라는 기이한 발상은 여성들에게 실제적 공포로 다가옵니다.
이런 사회에서 저출생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출산을 거부하는 것이 저항의 방식으로 자리 잡는 흐름은 경계하고 싶습니다.
최근 시사 프로그램의 저출생 관련 토론에서 한 중년 남성 출연자가 “청년들이 잘하고 있다. 애들을 안 낳아줘야 저와 같은 세대들이 정신을 차릴 겁니다. 앞으로도 낳지 마라”는 투의 발언을 했고, 이를 사이다 발언으로 반기는 반응들을 접했습니다.
책 <어린이라는 세계>에 등장하는 구절이 떠올라서 가져왔습니다.
“‘아이를 낳지 맙시다’라는 말은 위험하다. 저출생 우려 때문이 아니다. 이 순간을 살아가는 아이들 때문이다. 사회가 여성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처럼 우리도 아이를 낳지 말자고 받아치면 안된다. 사회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으니 주지 않겠다고 벌주듯이 말하는 순간, 자격이 있으면 아이를 상으로 줄 수도 있는 수단의 대상이 되버리고 만다. 아이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의도가 다르다고 해도 그 말의 끝은 결국 아이를 향해 있다.”
“출산을 거부하는 것으로 현재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부조리와 사회적 문제를 출산한 자들만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회피적 태도가 담겨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어린이와 양육자를 고립시킨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만든다.”
물론 ‘차일드 프리’는 전복적 의미가 있습니다. 출산하지 않겠다는 각오에는 “이기적이다”, “나이 들면 돌봐줄 사람 없이 외롭게, 비참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할 것이다”, “인생의 깊은 면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며 결핍, 결함, 사회적 소명이 부족해서 생긴 오판이라는 단정이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겠다는 태도는 누구나 존중받아야 합니다.
아이를 안 낳는 것을 죄인처럼 취급해서도 안 되지만, 아이 낳는 것을 비합리적 선택으로 규정하는 시선 역시 억압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비혼 역시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기존의 남성 생계부양자모델에 균열을 주고, 가족이 아니더라도 구성원 간 서로 돌봄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긍정적 측면이 있습니다.
다만, 경제학에서 말하는 ‘구성의 오류’처럼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이지만 그 선택의 총합이 사회 전체에 이롭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사회적 기본선을 함께 만들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출생 현상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개개인에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져야 합니다. 아울러 시간을 재분배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보육과 노동은 연결돼 있고 양육할 수 있으려면 노동환경이 개선되고 노동시간이 줄어들어야 합니다.
남성이 생계를 부양하고 여성이 가계를 보조하는 모델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부모 양육자 모두가 전일제 노동으로 내몰리는 보편적 부양자 모델 역시 점점 ‘과로’와 ‘경쟁’의 사회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돌보고, 보살피는 돌봄의 역량을 증진시킬 수 있는 사회만이 지속 가능할 것입니다.
적절한 물질적 지원도 더해져야 합니다. 이는 모든 생명체의 전반적 안위를 도모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이며 그것이 가능해질 때 다른 이를 돌보고자 하는 마음이 자연스레 생겨날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양육자들의 정치 참여가 필요합니다.
1)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김은실 등) 인용.
2) 여가부 폐지 공언 1년, 여성은 사라지고 가족만 남았다. (한겨레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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