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정원 가꾸듯 인생을 일구고 싶은 사람에게

프로젝트

 

정원 가꾸듯 인생을 일구고 싶은 사람에게

차페크 형제의 '정원가의 열두 달'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봄가을이 되면 집이고 사무실이고 새로운 화분을 들이는 버릇이 있다. 동네 꽃집이든 종로 5가 꽃시장이든 여리여리한 새싹을 틔운 친구들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적게는 서 너 개 많게는 열댓 개씩 데리고 왔다.

가끔은 가지치기한 것들을 물꽂이로 뿌리를 내려 완전 심기도 한다. 9년 전 앞뜰에 청치마 상추가 가득한 집에 반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데 첫 해보다 경작지가 조금 늘었다.

동네 슈퍼에서 큰 스티로폼 박스를 주워 오기도 했고, 구청에서 지원하는 상자텃밭도 두 차례 신청했다. 으레 3월 말이 되면 퇴비, 배양토를 사다 뿌려가며 각종 모종들과 씨앗을 심어 가꾸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름의 긴 가뭄이나 장마가 오면 텃밭 가꾸기에 지치고 각종 식물들도 덩달아 시들해진다. 날이 선선해지면 다시 몸을 추스르고 가을 경작을 시작하지만 금세 날이 추워져 성장 시기를 놓치기 일쑤다.

혹독한 여름을 보낸 식물들이 재빨리 씨앗을 만들고 생을 마감하기를 반복한다. 게으른 나로선 두 평도 안 되는 노지에서 식물들을 모두 잘 자라게 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실내에서 키우는 아열대 식물들을 얼어 죽지 않게 할 뿐이다. 

9년쯤 되니 게으른 도시농부를 식물들이 파악했나? 돌산갓과 쑥갓을 파종한 곳 사이로 들깨와 방울토마토가 저절로 싹을 틔웠다. 작년 가을 영글었던 열매들이 겨울을 이겨내고 땅을 뚫고 나왔다. 9년째 계속 성장 중인 부추는 자기 영토를 넘어 돌나물 땅에서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참나물도 옆 상자까지 새순을 틔웠다.

이 외에도 각종 상추 떡잎들이 올라오고 있다. 덕분에 올해는 새로운 모종을 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다만 여러해살이임에도 불구하고 프리지어와 돌나물, 미나리가 사라진 곳에 나리꽃과 소국이 새롭게 자리를 잘 잡아가고 있다.
 

큰사진보기<정원가의 열두 달> 겉표지. 가드닝 분야의 빛나는 명저, 세계 많은 정원가들이 첫손에 꼽는 책.
▲  <정원가의 열두 달> 겉표지. 가드닝 분야의 빛나는 명저, 세계 많은 정원가들이 첫손에 꼽는 책.
ⓒ 출판사 펜연필독약

관련사진보기

 

<정원가의 열두 달>이라는 책을 읽기 전에는 매월 가꿀 수 있는 식물들에 대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작가 소개와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식물도감과 같은 부류의 책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첫 페이지에 적힌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

3월 초까지만 해도 맨 땅은 흙으로만 보인다. 그러다 서서히 딱딱하게 얼어 있던 땅이 말랑말랑해지고 몇 차례 비가 오고 나면 푸릇푸릇한 것들이 붉은색을 머금고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추운 겨울 동안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흙 속에는 갖가지 씨앗들이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였다.

무심코 지나던 길에서도 3월 중순이면 푸릇푸릇한 봄나물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땅은 그렇게 늘 씨앗을 품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작가는 진정한 정원가를 '꽃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흙을 가꾸는 사람'이라고 하나보다. 꽃이 피기 전에 새싹이 자라기 좋은 땅으로 미리미리 일구는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정원가라고.

글을 쓴 카렐 차페크는 체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 작가라고 한다. 삽화를 그린 요제프 차페크는 형과 마찬가지로 파시즘에 반대한 사상가로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하는 화가이다. 이 둘은 친형제이면서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지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정원을 가꾸는 이야기와 그림에 더없이 깊은 풍자와 해학이 담겨있다.
 

"10월. 흔히들 자연이 겨울잠에 들 준비를 하는 달이라고 말한다(중략). 10월은 봄이 시작되는 첫 달, 땅속 깊은 곳에서 싹이 트고 생장하는 달, 남몰래 싹눈이 여무는 달이다. 땅을 살살 파보면 엄지손가락만큼 두툼한 싹눈과 가녀린 새싹, 알알이 여물어 가는 구근을 발견하게 된다." - 158p

정원가는 계절을 앞서서 준비하는 사람이다. 정원의 식물들에게 늘 적절한 날씨가 와주는 것은 아니지만 계절이 바뀌는 것을 대비해서 정원가는 열심히 자신의 정원을 가꾼다. 그래서 작가는 가을을 봄처럼 여겨 미리 준비하고 말한다. 잠시 쉬어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성장하고 있으니 잘 살펴보라는 의미이다.

"세상 모든 일은 어떤 식으로든 손쓸 방도가 있건만 날씨만은 우리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중략) 때가 되면 싹이 틀 것이요 봉오리가 터질 것이니, 인간의 무력함을 겸허히 인정할 수밖에. 머지않아 인내는 지혜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 71p

봄여름가을겨울로 4계절의 흐름이 뚜렷하다고는 하지만 매일, 매달의 날씨는 예년과 다르다. 유사하긴 하나 분명 다른 날씨다. 그래서 정원가는 날마다 최선을 다해 대비하면서 싹이 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일이 그렇다. 싹을 틔우기 위해 정원가가 하듯 우리들도 분명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할 것이다. 그러나 매번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인내심과 자제력을 높여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진짜 정원가들은  8월이면 이미 한 해의 전환점에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꽃들은 일찌감치 지기 시작했고, 아스터와 국화가 나오려면 아직 멀었으니 잠시 눈이나 붙여볼까? (중략) 한 해는 언제나 봄이고, 인생은 언제나 청춘이며 꽃은 언제고 핀다." - 139p

일반적으로 연둣빛 새순은 봄에만 나온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단풍이 들기 전까지 식물들은 새순을 틔운다. 그리고 꽃은 계절보다는 온도에 따라 핀다. 이상하긴 하지만 가을에도 개나리나 장미를 볼 때가 있다.

위 구절은 계절을 어떻게 구분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라일락이 졌다고 해서 봄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자는 의미로 다가온다. 꽃이 피어나는 순간이라면 언제든 봄으로 봐도 괜찮다는 말로 다가온다. 그리고 인생도 피어나는 순간이라면 봄이고 청춘이지, 꼭 어린 세대만 봄이라고 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비록 젊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겠지만 무엇인가 꽃 피우겠다는 마음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청춘이라고 일컬을 수 있지 않을까? 좋은 시절 다 갔다고 절망하지 말고 '나이 없는 시간'을 보내며 날마다 청춘이라고 말이다. 

이외에도 차페크는 1월부터 12월까지 차근차근 정원 가꾸기와 인생을 대하는 생각과 경험을 나눈다. 정원 가꾸기에만 집중하고 싶다면 다른 책을 권하고 싶다. 하지만 정원 가꾸듯 인생을 일구고 싶은 사람에게는 적극 추천하고 싶다.

매 순간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혹독한 추위와 긴 가뭄을 견뎌내고 연둣빛 야들야들한 새싹과 향기로운 꽃들을 피우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웃음과 위로와 통찰이 있을 것이다.

 

📰[오마이뉴스 | 최은영] 전문 보기
https://omn.kr/23nf6

날짜
종료 날짜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