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뉴스] 초등학생에겐 헌법소원이 ‘기후정치 참여’
“어른들은 투표를 통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을 수 있었지만, 어린이들은 그럴 기회가 없습니다. 이 소송에 참여한 것이 미래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또 해야만 하는 유일한 행동이었습니다.”
기후헌법소원의 청구인인 한제아(11) 어린이가 지난 2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북촌로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2차 공개 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달 23일 첫 공개 변론에 이어 한 달 만에 열린 이번 변론에서는 박덕영 연세대 법무대학원 교수와 유연철 국제연합(UN)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 사무총장이 각각 청구인 측과 정부 측 참고인으로 나섰다. 청구인단 255명 가운데 각각 청소년기후소송, 아기기후소송, 시민기후소송을 대표하는 김서경(22) 청소년기후행동 활동가, 한제아 어린이, 황인철(52) 기후위기비상행동 운영위원장이 최종 진술자로서 발언했다. 이날 변론은 시민 140여 명이 방청하는 가운데 4시간 30분가량 이어졌다.
‘너무 소극적인 감축’ 대 ‘현실적 계획’ 맞서
1차 변론에 이어 이번에도 정부의 탄소감축 목표를 두고 청구인과 정부 측의 공방이 이어졌다. 청구인 측 박덕영 교수는 한국 정부의 목표가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라고 비판했다.
“2021년 (미국) 바이든 정부 등장 이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2030년 감축목표를 (2018년 대비) 40%로 상향했지만, 전 지구적 탄소예산을 고려한다면 한국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는 부족합니다.”
탄소예산은 지구 평균온도가 산업화 이전 평균온도에 비해 섭씨 1.5도(℃) 상승해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을 때까지, 전 세계가 추가 배출할 온실가스의 양을 말한다. 문형배 재판관은 ‘5년 주기로 10년 뒤 목표를 설정하는 체계와 진전의 원칙 등이 있으므로 2031년부터 2050년까지의 목표 및 경로 설정 계획은 대강의 내용이 마련된 것과 같다’는 정부 측 주장에 관해 청구인의 의견을 물었다. 청구인 측 이병주 디라이트 변호사는 “한국 정부의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에는 2035년과 2040년의 (감축량) 숫자가 아예 없다”며 “앞으로 숫자를 제출할 것이라는 말만 가지고는 2031년 이후 국민들의 권리를 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부 측 참고인인 유연철 사무총장은 “2050년에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심각한 문제지만, 2030년은 2050년으로 가는 첫 번째 단계이고, 이후에 네 번의 기회가 더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2030년 (목표)안을 이행하는 단계에서는 한국의 산업구조로 인해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이 철강, 시멘트, 석유화학 등 (에너지를 많이 쓰는) 제조업 위주이므로, 산업 조정에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감축목표를 높일 경우 산업계에 미칠 단계적 영향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느냐’는 이종석 재판장의 질문에 청구인 측 박 교수는 “산업계의 탄소감축 비율을 높이게 되면 산업계가 반응할 것이고, 결국 기술혁신을 촉진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탄소를 적게 배출하는 제품을 생산하거나 생산과정에서 탄소를 적게 배출하는 방향으로 기술혁신이 이뤄지면 오히려 세계로 치고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덧붙였다.
“한국, 선진국에 걸맞은 감축목표 세워야”
박 교수는 특히 한국이 선진국의 일원으로서 책임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은 1.5℃ (억제) 목표 달성을 위해 ‘공동의 차별화된 책임’(CBDR) 원칙에 따라서 탄소예산을 고려한 2030년 국가 감축목표를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의 차별화된 책임은 각국이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노력을 공동으로 하면서도, 기후위기에 책임이 큰 선진국일수록 더 큰 감축 부담을 져야 한다는 원칙이다. 박 교수는 또 “한국이 2030년 (감축) 목표치를 달성한다고 하더라도 (탄소감축 경로가) 볼록 곡선이 되면 미래의 세대와 산업은 더 큰 부담을 안게 된다”고 강조했다. ‘볼록한 감축경로’는 온실가스를 천천히 줄이다가 2050년이 가까워질수록 속도를 높이는 방식을 말한다.
정부 측 류태경 변호사는 글로벌 탄소예산을 국가별로 분배할 방법이 없으며, 분배가 되더라도 계획대로 이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특히 “대한민국의 감축목표(NDC)만으로는 1.5℃ 목표가 반드시 달성된다는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에 관해 청구인 측 윤세종 변호사는 탄소예산을 국가별로 분배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2021년 독일연방헌법재판소가 “전 지구적 탄소예산의 국가 몫은 다양한 분배 방법을 사용해 계산할 수 있다”고 인정한 사례를 들었다. 윤 변호사는 “유럽인권재판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량적 한도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국가 간 의무를 제대로 이행한 것이 아니다’고 판단했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유럽인권재판소는 스위스의 환경단체 ‘기후보호를 위한 노인 여성’이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하면서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 한도를 정량화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기후변화에 관한 효과적 규제 체제가 마련될 수 없다”고 밝혔다.
반면 정부 측은 파리협정 이행보장 체제에서 2년 주기로 격년투명성보고서(BTR)를 제출하는 것이 온실가스 감축목표 이행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형배 재판관이 이에 관한 의견을 묻자 청구인 측 이병주 변호사는 “파리협정은 각 나라에 대한 법적인 구속력이 없다”고 반박했다.
‘이제는 판결의 시간’ 헌법재판소에 쏠린 기대
공개 변론에 앞서 낮 12시 30분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서는 기후헌법소원 공동대리인단과 청구인, 시민 등이 참여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공동대리인단의 이치선 법무법인 해우 변호사는 “온실가스는 국경이 없고, 기후 보호는 처음부터 국제적 차원을 갖는다”며 “대한민국 정부가 기후위기로부터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려면 파리협정에 상응하는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수립하고 이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기기후소송 청구인인 박서율 어린이의 보호자이자 탄소중립기본계획 위헌소송 청구인인 김정덕(44)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는 “우리 사회 구성원이면서도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존재들을 보살피는 양육자이자 연대자로서 아기기후소송과 탄소중립기본계획 소송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는 “기후정책에 의견을 내고, 방향을 결정한 누구라도 (기후위기로 시민이 겪는) 죄책감과 불안을 외면하지 않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숙명여대 학생 윤다영(22) 씨는 “사회는 저를 엠지(MZ, 2030)세대라 부르지만, 전 저를 기후위기 세대라 부르고 싶다”며 “이번 기후헌법소원은 우리의 무기력을 깰 동력”이라고 말했다.
이번 공개 변론을 마지막으로 기후헌법소원의 변론 절차는 마무리됐다. 선고는 헌법재판관 전원이 참석해 사건 심리에 필요한 절차를 논의하는 평의를 거쳐 이뤄진다. 선고 기일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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