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제정연대] 도서관은 검열의 대상이 아니다 – 국가인권위원회의 충남 성평등 도서 검열 사건 결정에 부쳐
[입장]도서관은 검열의 대상이 아니다
– 국가인권위원회의 충남 성평등 도서 검열 사건 결정에 부쳐
2023년 9월 충청남도의 성평등 도서 검열 사태에 대해 김태흠 충청남도 도지사와 김지철 충청남도 교육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상대로 한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결과가 나왔다. 잘못된 행정 조치에 대해 문제제기한 충남 도민 304명과 <걸스토크>의 저자 이다 작가의 간절한 마음을 생각하면 2년 가까이 걸린 결정은 다소 늦은 감이 있다. 그럼에도 김태흠 도지사와 충남 교육감의 권리 침해를 분명히 확인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부적절한 매뉴얼 제공과 해석이 아동·청소년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적절한 판단이었다. 이들은 국가인권위 권고의 의미를 뼈아프게 새겨야 한다.
무엇보다 이번 결정문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도서관은 검열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모든 시민이 자유롭게 도서관 자료에 접근하는 것이 곧 알 권리임을 명확히 확인했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사건을 넘어 공공도서관이 지켜야 할 민주주의의 원칙이며, 향후 도서관 운영 전반에 지침이 될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충청남도 성평등 도서 검열 사태는 누구의 책임인가
이번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는 김태흠 충청남도 도지사의 성평등 도서 열람 제한 조치가 아동·청소년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김태흠 도지사는 특정 단어만을 문제 삼아 “아동·청소년을 ‘부적절한’ 내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을 뿐, 도서관에 직접 열람 제한을 지시한 바 없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인권위는 김 도지사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근거가 왜곡되었음을 지적했다. 특히 김 도지사가 문제 삼았던 구절이 실제로는 포르노그래피가 여성 청소년의 현실을 왜곡한다는 맥락에서 예시로 언급된 것임을 확인했다. 또한 도지사가 충남도서관장을 임명하는 위치에서 특정 도서 9권을 지목하며 열람 제한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밝힌 행위는 단순한 개인 의견 표명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는 결국 아동·청소년이 성과 재생산 건강에 관한 적절한 정보에 접근할 권리를 침해한 행위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한, 국가인권위원회는 김지철 충청남도 교육감 역시 차별적 민원을 방치하며 아동·청소년의 기본권 침해에 일조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보수 개신교 단체의 차별적인 폐기 요구 민원에 대해, 이미 교육청 산하 15개 도서관은 ‘도서관의 자율성과 알 권리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해왔다. 하지만 김지철 충남 교육감은 이를 묵살하고 “책 폐기는 도서관 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기관장이 결정할 수 있다”는 답변으로 사실상 차별적 민원을 방치했다. 인권위는 이를 지적하며 성평등 도서에 대한 비치·열람이 제한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인권위가 진정 대상에서 각하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서관 정책을 총괄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책임을 이례적으로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김지철 충남 교육감이 도서관 현장의 우려를 무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문체부가 제공한 ‘공공도서관 이용자 응대 업무 및 장서관리 매뉴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체부는 이 매뉴얼을 통해 법적 근거도 없이 도서관 운영위원회가 도서를 심의·제한할 수 있는 것처럼 해석될 여지를 제공했다. 이는 결국 충남도의회가 ‘30인 이상이 민원을 제기하면 간행물윤리위원회에 유해성 심의를 요청할 수 있다’는 내용의 조례를 제정시키는 결과로까지 이어지게 만들었다. 정책적으로 도서 검열을 막아야 할 문체부가 오히려 사태를 키우는 데 일조한 셈이다. 인권위는 도서관 운영위원회가 도서 심의를 하는 것은 법률적 근거가 없으며, 도서의 내용을 검열할 수 있는 것처럼 가이드를 제시한 문체부에 대해서도 아동·청소년의 알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성평등 도서 검열은 곧 아동·청소년의 기본권 침해이다.
물론 이번 결정에 아쉬운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평등 도서 목록에 오른 『걸스토크』의 저자 이다 작가는 자신의 표현의 자유와 저작물이 널리 읽힐 권리가 침해되었다는 점을 함께 다뤄달라고 요청했지만, 인권위는 이를 ‘반사적 이익에 불과’할 뿐이라며 각하했다. 하지만 이는 부당한 행정 조치로 인해 자신의 저서가 독자에게 닿지 못하게 된 작가의 권리를 너무 좁게 해석한 것이다. 작가가 직접 전시·공연·보급을 금지당하지 않았더라도, 공공도서관에서 도서가 ‘위험하다’는 낙인이 찍히고 열람이 제한되는 순간, 이는 곧 작가의 사상 표현과 전파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조치다. 도서관에서의 배제와 열람 제한은 단순한 우연적 불이익이 아니라 작가 권리 침해의 본질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결정문은 이를 충분히 짚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이번 결정의 의의는 도서관이 아동·청소년의 성과 재생산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성평등 도서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을 확인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과도한 성 지식으로부터 아동·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는 성차별적 인식을 조장하고 성적 권리를 제한하는 단골 메뉴였다. 김태흠 도지사의 주장 역시 이 논리에 기반한다. 하지만 인권위는 UN 사회권위원회의 일반논평을 근거로, 아동·청소년이 사생활을 존중받으며 성과 재생산에 관한 정보에 온전히 접근할 수 있어야 함을 분명히 했다. 이는 보호를 핑계로 성적 권리와 성 지식에 대한 알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곧 기본권 침해임을 명확히 못 박은 것이다.
국가는 재발방지 대책과 더불어 포괄적 성교육 정책 마련하라
이번 국가인권위의 결정은 충남만의 문제로 끝나서는 안 된다. 도서 검열 사태는 충남을 시작으로 서울, 경기, 대구 등 전국에서 벌어진 심각한 문제였다. 특히 경기도 교육청은 무려 2,517권의 성평등 관련 도서를 폐기하고 3,340권을 열람 제한하는 만행을 저지르고도, 교육감이 ‘민원을 전달했을 뿐’이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중이다. 충남도의회는 진정이 진행되는 중에도 도서관 조례를 개정해 검열을 제도화 했다. 이번 국가인권위의 권고를 충남도의회와 경기도 교육청 역시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당장 검열 조례를 폐기하고, 폐기된 도서를 원상 복구하며,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정부는 드러나지 않은 채 전국의 도서관에서 자행되고 있을지 모를 성평등 도서 검열 시도에 대한 전수 조사를 실시하고, 확실한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사태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포괄적 성교육 정책이 시급하다. 보수 개신교 단체를 중심으로 한 성교육 퇴행 시도는 포괄적 성교육 표준안 폐기, 나다움 어린이책 사업 폐지, 그리고 이번 성평등 도서 검열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심지어 청소년성문화센터 운영을 차별적 성교육을 양산하는 단체에 맡기고, ‘리박스쿨’과 같은 이름으로 돌봄교실까지 파고들고 있다. 이 퇴행의 고리를 단호히 끊어내야 한다.
나아가 이번 인권위 권고는 차별과 혐오를 정치적으로 활용해온 극우 세력과의 결별을 촉구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미 지난 윤석열 퇴진광장에서 차별과 혐오가 어떻게 극우 정치의 발판이 되는지 똑똑히 목격했다. 이들과 결별하기 위해서는 포괄적 성평등·성교육 정책과 함께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수이다. 국가와 사회가 책임 있는 자세로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때 비로소 존엄과 평등의 원칙이 확립될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우리는 진정한 성평등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2025년 9월 8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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