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회로 아카이브] 인터뷰_윤정인활동가
029: 현장 과학자와 시민단체 활동가를 넘어 사업가를 꿈꾸는 정치하는 엄마, 윤정인
Feminist in STEM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 029: 현장 과학자와 시민단체 활동가를 넘어 사업가를 꿈꾸는 정치하는 엄마, 윤정인
의약품합성화학 분야를 전공한 윤정인 박사를 지난 3월 8일 여성의 날에 만나보았다. 그는 대학원 박사 과정 중에 결혼과 출산, 육아를 병행했다. 박사학위를 딴 이후에는 직장생활을 거쳐 스타트업 회사의 연구소장이라는 직책을 수행하며 활발하게 현장 과학자로서 행보를 이어나갔다. 그와 동시에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 창립멤버이며, 과학기술인네트워크(〈ESC〉) 젠더다양성위원회 위원장, 정의당 세종시당 부위원장 직을 겸하고 있다.
과학자이자 시민단체 활동가, 한 아이의 엄마를 넘어 사업가를 꿈꾸는 윤정인 박사의 멋있는 행보를 들어 보자.
인터뷰어인 〈페미회로〉의 우연, 위선희는 ‘회로’로, 인터뷰이 윤정인 님은 ‘정인’으로 표기했다. 교정은 〈페미회로〉의 한솔, 발행은 〈페미회로〉의 배현주, 우연(이상 가나다순)이 맡았다.
회로: 안녕하세요, 윤정인 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정인: 저는 유기합성화학자인 윤정인입니다. 과학자이자 아이 엄마이고, 시민단체 활동가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이직을 준비하기 위해 일을 쉬고 있습니다.
화학자 윤정인
회로: 안녕하세요, 정인 님. 저(우연)도 학부 때 화학을 전공해서 정인 님이 더욱 반갑습니다. 정인 님의 전공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세요.
정인: 저는 학위를 다양하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도 교수님도 많고요. 학부는 대전대학교에서 응용화학과를 졸업해 공학사를 받았고, 고려대학교에서 유기화학으로 이학 석사를 받았습니다. 박사는 충남대학교 약학대학에서 생물약학을 전공했습니다. 박사 때는 신약개발 중에서도 의약품합성화학을 주로 연구했는데, 인 비보 테스트(*)로 제가 만든 화합물을 쥐에 주사한 후 암세포 크기가 줄어드는지를 확인하는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 인 비보(in-vivo) 테스트는 생체 내 실험으로, 살아 있는 세포를 이용한 테스트이다. 반대로 인 비트로(in-vitro) 테스트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페트리 디쉬 등 제어 가능한 환경에서 진행한 테스트다.
회로: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학위를 받으셨네요. 혹시 대전에서 서울로 옮겼다가 다시 대전으로 돌아온 이유가 있나요?
정인: 고려대학교 대학원은 제가 고집을 부려서 진학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할 때 수시에서 고려대학교에서 떨어졌던 한을 좀 풀고 싶었거든요. 제가 다닌 대전대학교에 한국화연(이하 ‘화연’) 박사님들이 많이 출강하셨는데, 방학 때 성적 좋은 학생들을 연구원에 데려가 실험실을 구경시켜주곤 했어요. 학부 졸업 후에는, 화연에 학연생(학생연구생)(*)으로 합격해서 화연 연구원장의 추천으로 고려대학교에 다니며 화연에서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화연과 고려대학교를 동시에 다녔죠.
(*) 학연생은 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는 학생으로, 학업과 연구를 병행해 정부출연연구소에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한다(박세준, 「‘일할 때는 근로자, 돈 줄 때는 학생’」, 2017.04.03, 주간동아). 학연생의 소속은 대학이지만 정부출연연구소에 출근해 상근직 연구원들과 함께 일한다. 그렇기에 대학에 지도교수가 있고 연구소에 지도 박사가 있어 동시에 지도를 받는다.
회로: 학연생 제도로 입학하면 화연과 고려대학교에서 동시에 돈을 받나요?
정인: 아니요, 돈은 화연에서 받아요. 고려대학교에서 월급은 따로 나오지는 않지만, 논문을 쓸 때마다 BK21(*)에서 인센티브는 받을 수 있었어요. 인센티브 수입이 생각보다 좀 짭짤해요. 제가 고려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학연생을 안 하고 풀타임으로 입학할지, 아니면 학연생으로 파트타임으로 공부하면서 화연에서 돈을 받을지 많이 고민했어요. 학연생은 다른 학교에 파트타임으로만 입학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입학하려던 해에 고려대학교 화학과가 BK21 사업에서 떨어졌어요. 돈을 얼마나 받느냐가 대학원생에게 굉장히 중요한 이슈인데, 고려대학교에서 등록금을 받을 수가 없게 된 거죠. 그해에 카이스트와 고려대 화학과는 BK21 사업에 떨어지고 충남대 화학과가 선정됐다고 기억해요. 그래서 충남대에 학연생이 엄청 많이 몰렸는데, 어떤 친구는 “언니, 나는 내가 수시를 보는 줄 알았어. 대학원인데 지원자가 너무 많아.”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 BK21 사업은 미래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우수 대학원의 교육·연구역량 강화 및 학문후속세대 양성을 추진하기 위한 국가지원사업이다(출처: BK21 사업 홈페이지).
회로: 정인 님이 경험했던 학연생의 대학원 생활은 어떠셨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정인: 대학원 생활이 예상과 좀 달라서 많이 고생했습니다. 화연에서 하는 연구와 고려대학교에서 하는 연구가 너무 달랐거든요. 고려대학교에서는 이론적인 것을 훨씬 많이 배웠는데, 특히 저희 연구원 지도 박사님께서 저에게 굉장히 긴 커리큘럼을 짜 주셨어요. 석사에 입학하면서 제가 박사까지 할 거라고 말했거든요. 그 커리큘럼은… 지도 교수님이 의욕이 넘치셔서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봤어”란 느낌이었어요. 교수님께서는 신약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천연물 전합성(*)도 해봐야 하고, 조건 최적화를 시키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방법론(methodology)도 익혀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바로 신약을 개발하지 않고요.
(*) 전합성(total synthesis)은 상업적으로 이용 가능한 단순한 전구물질로부터 복잡한 분자(종종 천연물)를 만드는 완전한 화학합성이다. 전합성은 일반적으로 생물학적 과정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합성만을 뜻한다.
회로: 어떤 것들을 준비해두셨던가요?
정인: 연구원 지도 박사님께서는 방대한 실험을 준비해주셨고, 고대 지도 교수님은 방대한 이론 수업을 준비해주셨어요. 특히 고대 지도 교수님은 몸이 좀 편찮으시고 원래는 수업을 안 셨는데, 저를 학생으로 받고 나서 새 학생이 들어왔으니 수업을 하겠다고도 하셨어요. 또 저는 수업을 듣기 싫어서 가만히 있는데 입체화학 교재를 미리 사두셨다는 거예요. 그러니 어떡해요. 울면서 수업에 들어갔죠. 맨날 전화로 혼나고, 시험 못 봐서 혼나고. 입체화학에서는 모든 화합물을 3D로 봐야 하는데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내 눈엔 평면인데 자꾸 입체로 보라고 하니까… (웃음).
그때 주어진 공부를 다 하면서 이게 고등학교인가 대학원인가 하는 생각까지 했어요. 강의를 3시간 연속으로 듣는데, 학교에서 백날 배우고 시험을 보아도 내 연구에 접목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화연에 있는 박사님들에게 많이 상담받았습니다. 화연에서도 오랜만에 학생이 들어왔으니 신약을 많이 개발시키고 싶었는데, 고려대학교에서는 이론 수업으로 좀 더 공부하길 바라셨던 거죠. 지도 교수 2명이 합의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려대학교 지도 교수님이 화연 출신이어서 의견은 잘 맞았어요.
회로: 말씀하신 방법론은 어떤 방법론인가요?
정인: 반응 조건을 최적화하는 방법론을 말하는데요, 신약을 개발하려면 방법론과 전합성을 모두 공부해야 해요. 석사 때 지도 교수님께서 준비하셨던 커리큘럼 중 하나가 의약품합성화학에서 여러 방법론을 활용해서 같은 유도체(*)들을 계속 합성하기였고요. 그다음에 한 화합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드는 전합성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정말 일을 많이 했어요. (웃음)
(*) 유도체(derivative)는 화합물의 일부를 화학적으로 변화시켜서 얻는 유사한 화합물이다(출처 : 두산백과). 예를 들어, 메탄올과 에탄올은 모두 알콜 유도체다.
회로(우연): 저도 학부 때 전합성을 하는 연구실에서 개별 연구를 한 적이 있어요. 만든 화합물을 분리하기 위해 칼럼을 내리면(*) 합성해 놓은 결과물이 다 망가져 있고 그랬어요. 그때 제가 실험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정인: 분명히 칼럼을 내리기 전에는 물질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분리하고 나면 서로 다른 물질 네 개가 있는 상황이 발생하곤 했죠. 저는 정말 석사 입학하고 나서 1년 반 동안 실험이 너무 안 됐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학연생들은 연구소 프로젝트와 랩 프로젝트를 다 해야 해요. 그런데 화연에서 하는 게 너무너무 안 되는 거예요. 지도 박사님은 제 손이 똥손이라면서, 저 손 어떻게 하냐고 구박하지. 저도 다른 손을 어디서 구해와서 잘라 붙여야 하나 생각했어요. 너무 실험이 안 되니까, 실험실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벤치를 걷어차면서 “아 xx, 못 해먹겠네!”라고 소리쳤어요. 그런데 건너편에 지도 박사님이 계셨던 거에요. 뭘 꺼내려고 숙이고 계셨던 거죠. “정인 씨 미안해, 내가 너무 괴롭혔구나. 안 그럴게…”하고 나가시더라고요. (웃음)
(*) 칼럼(column)은 혼합물에서 단일 물질을 분리하는 크로마토그래피(chromatography)의 한 방법이다. 보통 긴 실린더를 세로로 두고 중력을 이용해 분리하기 때문에 ‘칼럼을 내린다’고 표현한다.
회로: 아찔한 순간이기도 하네요. 그 실험은 결국 어떻게 해결되었나요?
이후에 지도 박사님께서도 실험이 안 되는 이유를 알아보신다고 서울대 약대에 출장 가셨어요. 박사님께서, 지금은 계신 서울대학교 약대 김득준 교수님 연구실 출신이었거든요. 가서 “넌 그것도 모르고 애한테 실험을 시켰냐”고 혼나셨대요. 알고 보니 원래 안되는 실험이었던 거에요. 그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논문 주제 바꾸자고 하셔서 부랴부랴 바꿨죠. 처음 하던 실험이 안 되는 바람에 다른 방법론으로 합성해서 냈는데, 뒤에 게 너무 잘 돼서 두 편으로 나눠 냈어요. 학연생이 좀 힘든 게 석사 졸업을 하려면 SCI 논문으로 1저자나 2저자가 나와야 해요(*). 졸업을 못 할 뻔했죠.
(*) SCI(Science Citation Index, 과학인용색인)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학술지들을 모은 색인이다. ‘SCI 논문’은 SCI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을 말하며, 많은 이공계 대학원에서 졸업요건을 SCI 논문과 관련지어 제시한다. 논문에 많이 기여한 저자일수록 저자 목록 앞에 위치한다.
회로: 졸업요건을 못 채워서 졸업을 미루는 경우도 있나요?
정인: 생각보다 많아요. 저는 그때 석사를 졸업해야 했고 박사 진학도 약속이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6개월밖에 안 남았고 1년 반 동안 했던 실험은 안 되니까 난리가 났죠. 그런데 연구원에서 지도받는 장점은, 연구원의 지도교수님들은 학연생들의 학교 지도 교수님들과 싸워가면서도 자신이 맡은 학생들을 잘 키워낸다는 거예요. 자신이 맡은 학생이 졸업을 못 하거나 유예되면 담당 박사가 일정 기간 학생을 못 받는 페널티가 있거든요.
회로: 학생을 받는 게 많이 중요한가 보네요.
정인: 그럼요. 학생을 받으면, 연구실 인력도 충원되고, 연구원의 교수님에게도 학생을 지도했다는 경력도 쌓여요. 그 경력이 쌓여야 UST나 다른 학교에 겸임교수로 나갈 수 있어요. 그래서 화연 지도교수님도 상황이 급했어요. 그래서 지도 박사님과 논의해서, 실험을 거친 화합물을 모아 놓는 테이블(표)을 3개쯤 채워서 졸업하기로 했어요. 그 테이블들을 채우려면, 재현 실험까지 해서 최소 36번의 실험을 해야 하더라고요. 근데 그 실험을 완성하기 위한 세부실험이 4번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이 36번이지, 실제로는 144번 실험해야 했어요. 한 달 동안 매일매일 실험해도 빠듯했어요. 그 와중에 10월에 박사 과정 지원서를 내고 기말고사도 보고. (웃음)
회로: 대학원 학위 과정 동안 한 연구를 조금 더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정인: 제 연구는 유기화학 분과에 넓게 걸쳐 있었어요. 천연물 전합성은 마크로사이클(macrocycle)이라고 12각형 또는 9각형 고리들을 가지고 했어요. 팔라듐(Pd)이나 루테늄(Ru) 원자를 포함하는 촉매도 많이 합성했고요. 걔들은 제 친구예요. 의약품 쪽에서는 특히 피리미딘 계열 항암제(*)를 개발하는 연구를 했어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석사 때는 헤지옥 시그널링 패스웨이(hedgehog signaling pathway)라고 줄기세포를 죽이는 연구를 했어요. 그때 줄기세포가 연구 주제로 막 핫할 때였거든요. 박사 때는 ALK 인히비터(**)를 연구했어요. 폐암 중에 유전자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비소세포폐암이 있어요.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아이건 노인이건 여성이건 상관없이 유전자 돌연변이로 폐암에 걸려요. 저희 팀은 특정 유전자 변이로 일어나는 암만 연구했어요.
암은 수술하면 웬만큼 살아요, 현대에는. 담배를 피우거나 술 먹고 암에 걸린 사람들은 수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평소에 정말 건강하게 생활하다가 유전자 변이로 암에 걸리면 살기 힘들거든요. 그래서 보통 화연 같은 정부출연연구소에서는 그런 희귀암을 많이 연구해요. 박사 때는 ALK 인히비터를 중점적으로 연구해서 논문을 냈어요. 제가 졸업한 이후에도 후속연구가 계속 나오고 있고요.
(*) 피리미딘 계열 항암제는 DNA의 구성요소인 피리미딘과 비슷한 분자 구조를 가진 항암제다. 이 항암제는 DNA 복제 과정에서 피리미딘과 경쟁해 암세포 증식을 억제한다.
(**) ALK 인히비터란 ALK 유전자로부터 발현된 유전자 변이로 생긴 종양에 작용하는 잠재적 항암제를 말한다. (출처 : Nelsen (2010). “ALK Inhibitors: Possible New Treatment for Lung Cancer”)
회로: 그럼 계속 같은 계열의 연구를 하면서 학교를 옮기셨네요. 충남대에서 박사를 하면서 지도 교수님이 바뀌었을 텐데도 연구 방향이 안 바뀌는 게 신기해요.
정인: 충남대학교로 박사를 옮기면서 지도 교수님이 늘었을 뿐이죠. 이게 학연생의 특징이에요. 나의 소속 대학과 관계없이 수업을 듣고 싶은 곳에서 수업을 들고 학위를 딸 수 있어요. 같은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으니 연구 방향은 크게 안 바뀌어요.
회로: 그럼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다시 대전으로 돌아온 이유가 무엇인가요?
정인: 학교가 집에서 머니까 다니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리고 사실 고대에 약대가 있었으면 고대에 진학했을 거예요. 어느 학교로 박사를 진학할지 교수님들께 상담을 요청하니, 만약 포닥(*)을 외국에서 할 생각이 있으면 국립대가 낫다고 말씀하셨어요. “국립(National)” 자가 들어가 있으면 좋다는 거죠. 그래서 충남대학교로 진학했는데, 포닥을 외국으로 나가지 못했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고려대학교에 있을걸. (웃음)
(*) 포닥(post-doctoral, 박사 후 연구원)은 많은 박사 졸업생이 연구자로 성장하려 거치는 임시직이다.
박사 과정의 결혼, 출산, 육아
회로: 정인 님의 브런치 연재 글(*)에는 박사 과정 중에 시작한 결혼, 출산, 육아 이야기가 많은데요, 그에 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정인: 그때 잘못 선택한 것 같아요……. (웃음) 원래 제가 26살, 27살 즈음에 결혼하고 싶어 하긴 했어요. 석사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학생 때 결혼하고 싶어 했거든요. 할 거면 빨리하고 싶었는데, 유학 갈 때 가족과 같이 가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어렸을 때 유학생인 부모님 따라 해외에서 살았던 친구가 많았어요. 그게 부러워서 저는 제 아이에게도 그런 경험을 주고 싶어서 결혼을 빨리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때쯤에 랩에 저희 지도 교수님을 포함해 남자 박사님이 6분 정도 계셨는데 저를 꼬드기기도 했어요. ‘이제 결혼을 할 때가 됐다. 결혼해라.’ ‘우리가 도와주겠다.’, ‘우리가 출산휴가 해줄게.’, ‘우리가 케어해줄게.’, ‘너 나가면 아기 못 낳는다’는 둥 얘기하면서 다들 외국 나가기 전에 낳아야 한다고 하셨죠. 그때는 그냥 그렇구나 했는데, 저 사람들은 다 남자였던 거에요. 자기들은 애를 직접 안 낳고 안 키웠어요. 제가 그 생각을 못 했죠.
그러다가 진짜 애가 생겼어요. 아기를 정말 가지고 싶었던 박사 2년 차 때는 안 생기고, 이제 졸업하고 외국에 포닥을 나가려고 하는 3년 차 때 생겼어요. 교수님은 육아휴직하고 그냥 논문만 쓰라고 하셨는데, 말이야 쉽죠. 데이터가 전부 연구소에 있는데, 어떻게 밖에 나가서 논문만 써요. 어떻게든 연구실에 나와서 썼어요.
(*) 정인 님은 브런치에서 『엄마 과학자 생존기』라는 제목으로, 결혼, 임신, 육아, 출산이 여성 과학자에게 끼치는 영향을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 쉽게 소개하고 있다.
회로: 결혼은 어떻게 하셨나요?
정인: 신랑과는 대학생일 때부터 캠퍼스 커플이었어요. 고려대학교 연구실을 소개해준 선배이기도 했고요. 알고 보니 자기네 연구실이었어요, 세상에. (웃음) 입학하니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같은 학부를 다니던 선배들 다수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뭐야 여기는, 학부야? 이러다가도, 그 선배들이 있어서 석사를 그만두지 않았던 거 같아요. 학교가 바뀌면서 적응이 쉽지 않았는데 먼저 들어가 있던 선배들이 마음을 다잡아준 거죠. 또 체력적으로 많이 힘든 시기이기도 했어요. 목요일 오전까지 화연 연구실에서 실험하다가, 수업 들으러 목요일 오후에 서울에 올라가서 토요일까지 있다 오고.
그때 너무 힘들어서 심신을 위해 결혼했어요. 제가 저희 신랑한테 프러포즈했는데, 그때가 제 석사 연구 실험은 안 되는 실험이라는 걸 확정받은 6월이었어요. 남자친구였던 지금 남편이 데이트하러 저희 연구실에 왔어요. 어차피 자기도 화연 출신이니까 주말마다 저와 연구실에 같이 출근했죠. 신랑도 합성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칼럼 좀 받아달라고 하고 그사이에 저는 NMR(*) 찍으러 갔다 오고. 주말에 나온 박사님들께서 저희를 흐뭇하게 보면서 “연애는 저렇게 하는 거다. 정말 훌륭한 학생들이다.” 하셨어요. 저희가 잘못된 선례를 만들고 나죠. (웃음)
(*) NMR(Nuclear Magnetic Resonance, 핵자기공명분석법)은 원자핵을 특정 주파수의 전자기파와 공명시켜 분자 구조를 분석하는 분광법이다.
회로: 그러다가 프러포즈하신 거예요?
정인: 네, 그때 같이 실험하면서 마음이 많이 위로됐어요. ‘아! 이 사람은 칼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NMR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내 인생에 가장 필요한 사람이다!’하는 생각이 들어서 프러포즈했어요. 냉정하게 생각해서 제가 만약에 박사급 인력이 돼서 혼자 연구실을 꾸렸는데 인건비가 없다면, 누구를 고용할 수 있겠어요? 그때 와서 NMR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인 이 남자에게 의지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물어봤죠. 결혼할 거면 박사 1년 차 때 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했더니 좋대요. 저희 그렇게 결혼했어요. 저희 시부모님은 모르세요. (웃음) 결혼식 날짜도 제가 기말고사 마지막 날로 잡았어요.
회로: 졸업할 때는 아이가 몇 살이었어요?
정인: 애가 돌일 때 제가 박사 졸업했어요. 박사 막바지에 애 낳고 3개월 쉬고 바로 복귀해 미친 듯이 논문을 썼죠. 졸업하려고요. 충남대 약대 논문심사 절차가 좀 복잡해요. 영어시험성적을 내야 했는데, 제 성적이 만료된 거예요. 그래서 토익도 공부했어요. 기준 점수만 나오면 되니까 나올 때까지 매주 보고. 예비 심사라고 졸업 한 학기 전에 발표해야 해서 그것도 애 낳고 복귀하자마자 하고.
회로: 아까 포닥을 나가려고 하셨다가 안 나가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결정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정인: 저는 해외로 포닥을 나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이를 낳고 나서도 당연히 해외로 나가야지, 생각하다가 신랑에게 이야기했어요. 좀 고민이 되었던 점은, 약대 출신들이 돌아와서 교수를 꿈꾸는 게 아니면 포닥을 잘 안 나가요. 당시에 의약품화학 펀딩이 많이 줄기도 했고요. 주변 박사님들께서 ‘너 포닥 못 나가면 우리 랩에서 받아 줄게’하고 이야기해주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그래도 일단은 밖으로 나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신랑에게 제 계획을 이야기했죠. “여보, 아이가 돌 밖에 안 됐으니까 당장 데리고 나가는 건 너무 힘들 것 같고 내가 먼저 나가서 6개월 동안 자리를 잡을 테니 당신이 왔으면 좋겠어. 나가서 늦어도 6개월, 빠르면 3개월이면 자리를 잡으니까. 내가 데일리 케어센터까지 좀 알아 볼게.”라고 말했어요.
이후에 한동안 신랑이 그 이야기를 피하더라고요. 나중에는 신랑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어한다는 점을 알게 됐어요. 본인은 이 안정된 삶이 좋은데, 굳이 힘든 삶을 살기 싫었던 거죠. 그래서 제가 “그럼 아이는 두고 갈 테니까 나 혼자 갔다 올게, 1년만 참자.”고 하니까 정색을 하더라고요. 결론은 본인은 외국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거였어요. 저희 신랑이 그때 회사에서 대리 달고 과장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저랑 나가면 본인 경력이 단절되는 거니까요. 아이랑 둘이 있는 것도 자신이 없고요.
한참 이야기하다가 그냥 제가 접었어요. 포닥을 나갔다가 제가 일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제가 박사 학위가 있으니까 조금 더 업계에서 살아남겠지만 지금 남편이 잘 나가는 건 맞고. 의약화학계는 남자들이 훨씬 잘 나요. 특히 석사 남성 연구 인력이 수요가 많고, 페이도 좋아요. 승진도 빠르고요. 테크니션이 많이 부족한데 남자 석사가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돈과 관련된 현실적인 고민도 있었어요.
제가 만났던 박사님들의 사모님들을 보면 되게 잘 나가셨던 분들이 많아요. 동아제약, 종근당 등 유명 제약회사에서 근무하셨던 분들. 그런데 그분들이 남편 박사 공부하는 동안 다 뒷바라지하다가 포닥을 같이 갔다 오면 일을 안 하세요. 사실 못 하는 거죠. 업계로 못 돌아가니까. 그 잘났던 여성 연구원들이 나갔다 오면 다들 주부가 돼요. 취업 시장에서 기혼 여성을 반기지 않아요. 업계를 옮기지 않는다면요.
회로: 보통 어디로 옮기나요?
정인: 연구재단으로 많이 가요. 기획 분야나 사교육 시장으로도 가고요. 학위가 있으니까 학원 시장으로 가면 많이 좋아하죠. 저는 심지어 수능을 다시 봐서 교대에 입학한 다음에 임용고시 본 분도 봤어요. 이게 현실이에요. 이런 사례를 많이 접하다 보니까, 저 스스로도 자신이 없어졌어요. 1년, 2년 후에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와서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신랑은 확실하게 교수할 마음이 있는 게 아니면 싫다고 했고, 저는 교수가 될 마음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취업으로 돌렸어요.
회로: 그때가 2015년~2016년쯤일 테고, 지금은 2020년인데, 앞으로 과학자로서의 꿈은 뭐에요?
정인: 사업? (웃음)
회로: 오!
정인: 저는 실험실에서 TLC를 찍어야지만, 내가 현장 과학자라고 많이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현장 과학자라는 자리를 놓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굳이 거기에 집착할 필요는 없겠더라고요. 과학자라는 정체성은 내가 어떤 형태의 직업을 갖던지, 하고자 했던 연구 범주에 몸만 두면 된다고 마음이 많이 바뀌었어요. 제가 힘드니까요. 그래서 현장을 좀 확대해서 사업을 해볼까 생각했어요.
전에 있던 회사에 마음 맞는 엄마 직원이 한 분 있어요. 경영 담당이셨는데 우리끼리도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둘이 자주는 못 만나지만 매일과 카톡으로 사업계획서 주고받으면서 준비하고 있어요.
시민단체 활동가 윤정인
회로: 과학 이외에도 정인 님께서 여러 사회활동(〈정치하는 엄마들〉, 〈ESC〉 젠더다양성위원회(이하 젠다위) 위원장, 정의당 세종시당 부위원장)을 한다고 알아요. 정인 님이 활동하는 단체들을 소개해주세요. 어떤 계기로 들어가셨나요?
정인: 〈정치하는 엄마들〉은 제가 첫 번째 회사를 때려치우고 자괴감 때문에 고생했을 때 시작했어요. 그때 저는 제가 그만둔 이유가 납득이 안 됐어요. 내가 화나서 나왔지만 내가 왜 회사에서 밀려났는지, 왜 상사나 동료들의 평가가 안 좋았는지 질문 한마디 못 하고 나왔는지 억울했어요. 그래서 몇 달 동안 심란했는데, 장하나 전 국회의원이 쓴 칼럼을 읽었어요(*). 그 칼럼에서 임신한 순간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죄인이 된 기분에 공감했어요. 애 낳고 대학원생 내내 저도 잉여인간이 된 것 같다고 많이 생각했거든요. 자꾸 실험실에서 사람들에게 미안한데 이것 좀 해달라고 부탁하고. 제가 제대로 된 사람으로 안 느껴지는 거예요. ‘나만 느꼈나? 나만 성격이 좀 그런가?’했는데 장하나 언니가 쓴 글에 꽂혔어요. 이후에 우리 한번 만나자며 구글 설문 폼이 떠서 사람들을 만나러 갔어요.
그렇게 처음 만난 게 2017년 4월 21일이었을 거에요. 여성 플라자에서 처음 만났는데, 별거 없었어요. 그 칼럼 보고 온 사람들이 모여서, 왜 우리는 다 죄인처럼 있었나 이야기하다가, 우리가 잘못된 게 아니고, 우리가 이상한 게 아니고, 엄마가 되는 순간 사회적 약자가 되는 건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이걸 바꾸려면 이 사회에 사는 우리가 모두 양육자의 시선에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목적이 생겼고요. 〈정치하는 엄마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비영리 단체에요. 캐치프레이즈는 ‘우리 모두가 엄마다’. 출산하거나 임신한 여성만이 아닌 모든 어른이 양육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엄마의 시선에서 세상을 보고 싶었어요.
(*) 장하나, 「엄마들이 정치에 나서야만 ‘독박육아’ 끝장낸다!」, 2017.03.25, 한겨레
회로: 이번 21대 총선에서, 〈정치하는 엄마들〉에서 조성실(정의당), 이소현(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후보가 랜선 캠프로 꾸렸던데요.
정인: 랜선 캠프는 텔레그램으로 꾸렸어요. 저희가 다들 엄마라서 할 일이 없어요. 육아휴직 중이거나 회사를 그만뒀거든요. 다들 직장인으로 잘 훈련됐는데 할 게 없는 거죠. 출판 업계에 있던 사람,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사람, 디자이너였던 사람, 옷 만드는 사람이었는데, 아이 낳고 쉬고 있는 거죠. 그래서 교회 동생이 비례대표 후보들 따라다니면서 영상 찍고, 서류 챙겨주고, 디자인 쉬고 있는 디자이너들이 웹자보 만들고, 소규모 온라인 팬클럽에서 부시샵(*) 경력이 있는 제가 온라인 조직을 하고요.
(*) 부副시샵은 천리안 시절 초창기 온라인 팬클럽에 있던 직책이다. 요즘 온라인 카페 부매니저와 비슷한 직책이다.
회로: 주로 〈정치하는 엄마들〉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주세요.
정인: 저희는 엄마가 관심 가지는 모든 일을 해요. 미세먼지, 환경, 사교육 등등. 국회에도 자주 출동하고요. 〈ESC〉는 〈정치하는 엄마들〉 활동하다가 알게 됐어요. 저는 〈정치하는 엄마들〉 활동에서 하면서도 과학기술인이니까 이공계 젠더 감수성에 예민했어요. 과학기술계의 남초 문화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2017년 9월 이후에 〈ESC〉 가입했어요.
회로: 〈ESC〉 젠다위 위원장은 어떻게 맡게 되신 건가요?
정인: 저는 원래 〈ESC〉의 청년위원회 과학기술법 스터디에 참여했어요. 그러다가 사람들을 점점 알게 되고, 사무국장과 밥을 먹다가 제안받았어요. 과학기술계의 젠더 이슈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하는데도 잘 이야기되지 않아요. 여성과학자들이 젠더를 이야기하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요. 젠더 이야기를 하는 순간부터 남자 연구원들에게 지고 들어간다고 느끼곤 하니까요. 왜냐하면, 남성들은 결혼, 임신, 출산과 관계없이 잘 먹고 잘사는데, 우리는 항상 결혼, 임신, 출산에 걸리잖아요. 노처녀 교수면 노처녀라고 한 소리 듣고. 그렇기 때문에 각종 편견들을 뛰어넘기 위해서 엄청난 연구를 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탑까지 가신 분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젠더를 이야기하면, 그분들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 들인 노력이 무너지는 거예요. 예를 들어 유기합성 실험실은 무거운 걸 많이 들어요. 40L짜리 수소 통, 용매 통 등 여자들이 그냥 다 들어요. 그런데 힘쓰는 일은 남자들이 더 잘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해달라고 하기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다들 그 “여성임”을 버리죠. 공구질 하면서 내가 여자여도 이런 걸 할 수 있다고 어필해야 하는 상황이 오다 보니까 더 그렇죠. 87년생인 제가 이렇게 느끼면서 살아왔는데 저보다 나이 많은 분들은 어떻게 느끼겠어요.
그러다 보니 과학기술계에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산 여성이 많아요. 그 정도 비범하지 않으면 여성과학자로 이름도 못 내미는 현실인 거에요. 근데 저는 살아보니까 그런 ‘슈퍼우먼’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정치하는 엄마들〉에서 활동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할 수 있다면 과학기술계에도 하면 좋겠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젠다위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었어요.
회로(선희): 저는 처음에 들어갔을 때부터 임신부 연구자 사업이 너무 좋았어요.
정인: 임신부 연구자 사업은 제가 정말 하고 싶었는데, 다들 좋게 봐주셨어요. 과학기술인의 젠더 이슈가 엄청난 능력으로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임신해도 현장에서 연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제가 이전에 일하던 스타트업 회사에서 연구실을 차리면서 알았는데, 외국에는 휠체어를 탄 사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실험실을 설계하는 규정이 있어요. 국내에는 없고요.
그때 마침 시민단체 활동을 하다가 해외에 있는 여성과학자 한 분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분께서 외국에는 임신부 연구복이 있다고 알아봐 주시고, 사진도 찍어서 보내주시고, 가격도 알아봐 주시고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ESC〉 젠다위는 앞으로도 소소하고 평범한 이야기를 계속할 계획이에요. 존재하기는 하는데 우리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는 여성으로서 겪은 이야기와 사연을 모아보자 제안이 나왔어요. 그래서 ‘여성과학기술인과의 대화’라는 가제로 토크콘서트 사업을 준비 중이기는 한데 코로나 때문에 멈췄어요.
회로: 정의당 세종시당 부위원장이 되신 이야기도 해주세요.
정인: 〈정치하는 엄마들〉 활동가끼리 정치란 무엇인가 많이 이야기했어요. 국회의원, 보좌관이 되는 것만이 정치인가? 시민단체도 정치적인 활동이잖아요. 또 마음에 맞는 정당에 후원하거나 민원실에 항의하는 것도 정치적인 활동이고. 각종 단체에서 운영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으니 사소한 것부터 바꿔보자는 말을 했어요. 저는 노회찬, 심상정 의원이 방송에 나와서 말하는 게 좋아서 정의당에 후원했어요. 그러고서 조용히 있었는데 세종시당에서 연락을 받았어요. 이 동네에 30대 청년이 없다고 같이 하자고 해서요. 저희 신랑이 저보고 일을 몰고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회로: 이제까지 많은 이야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께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요?
정인: 막 비범해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여성 후배든 남성 후배든, 과학기술인이라는 직업군이 주는 무게가 무겁잖아요. 뭔가를 업적으로 남겨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참 부담스러워요. 박사 하고 나면 그 부담감이 되게 크거든요. 그런데 제가 해보니까, 그 부담감에 사람이 눌리면 머리가 어차피 안 돌아가요. 모두 재미있게 살면 좋겠어요. 재미있게 하루하루를 존재하고 버티는 것 자체로 이미 평범을 넘었다고 생각해요. 꼭 엄청난 연구가 아니라, 내가 즐겁고, 필요하고,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꼭 벤치(실험실 책상)에 앉아야만 전공을 살리는 게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임신한 순간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죄인이 된 기분”을 느꼈다는 정인 님. 그리고 그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다는 〈정치하는 엄마들〉. 사회의 부조리함을 지속적으로 꼬집고 다양한 방법으로 싸우는 정인 님과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더 나아진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여성이라서 혹은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양육자라는 이유로 죄인이 된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오길 바라면서 그가 만들어갈 사회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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