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반차 내러 간 남편에게... "애 엄마는 뭐하고? (윤정인)
칼럼니스트 윤정인
[엄마 과학자 생존기] 왜 엄마는 능력이 더 뛰어나야 합니까
우울한 면접 이후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아니, 바닥을 치다 못해 땅을 파고 들어가 관을 짜고 누워 있었다. 바야흐로 혼돈의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박사 이후 반짝반짝한 삶을 꿈꾼 것은 아니지만, 성별로 까이고 애엄마라 까일 것이라고 사실 예상을 못했었기에 데미지가 컸다.
사실 내가 박사과정에 진학한 것에는 상당히 많은 이유들이 존재했다. 토익 보기 싫었고, '쎄가 빠지게' 실험했는데 그 연구를 뒤에 놈이 실험 몇 개 더 하고 '제1저자' 가져갈 것을 생각하니 배가 아팠고, 그냥 박사님 소리가 듣고 싶기도 했고, 평생직장으로 전문직에 종사하고 싶었던, 뭐 이런 이유?
사실 나는 박사를 하고 나면 어디든 들어가서 오래오래 길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성별이나, 인종이나, 결혼 유무에 관계없이 말이다. 과학이란 언어로 오래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의 시간과 열정과 건강을 갈아 넣어 박사과정을 보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별, 결혼 유무로 인해 고배를 마신 취업 현실이 너무나도 큰 상처였다. 아니 내 또래 남자 동기들은 결혼했다고 까이지 않는데, 왜 나는 결혼했다고 까인단 말인가. 자존심이 상했다. 정말 말 그대로 '부들부들'이었다. 이러려고 내가 '쎄가 빠지게' 공부한 것인가. 자괴감이 들어 하루하루 짜증이 났다.
물론 내가 갈 곳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친애하는 박사님들은 나의 이 불편한 현실을 해결해준다며 다른 본부에 '포닥'(박사후연구원) 자리를 마련해주셨고, 졸업 전 취업이 안 되면 그냥 그런대로 옆 본부에 짐 옮기고 새로운 연구를 하면 됐다. 그리고 다시 취업을 준비하면 되는 것이었으니 사실 크게 부담스러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꼭 졸업 전에 취업을 하고 싶었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박사까지 한 내가! 취업을 못한다면 경제활동에 일조할 수 없고, 그럼 난 경제력도 없는 쭈굴이라는 생각에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계속 떡밥을 뿌려댔다. 그리고 한 곳이 얻어걸려 결국 바로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내가 면접을 본 곳들 중 이곳만 내가 기혼여성인 것을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겐 그저 은혜로운 곳이었을 뿐, 이상한 분위기는 '1'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입사를 결정했다.
◇ 아픈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는 남편에게 팀장이 한 말
회사를 다니며 그냥 좀 이해할 수 없던 일들이 몇 가지 존재했다. 연구용역 중심 회사였기 때문에 사실 자신이 담당하는 프로젝트만 신경 쓰면 된다고 했는데… 또 퇴근 눈치 안 봐도 된다 해서 입사한 건데… 아이 돌봄 때문에 늦어도 7시에는 퇴근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또 OK라 해서 입사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6개월 뒤 인사고과에서 나는 '생각보다 일을 많이 안 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일해봤지만, 역시나 나는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아닌 걸로 평가돼 있었다.
사실 굳이 그 인식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아니, 바꿀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처음엔 그러했다. 그러나 점점 부담이 몰려왔다. 이 기업에 입사할 때 나는 신랑도 데려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육아를 하기로 했다. 그래, 계획은 그렇게 잡았다. 그런데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아이 하원 도우미를 구하고 회사에서 7시 퇴근을 하는 사람도 나였고, 주말에 아이를 돌보는 사람도 나였다.
내가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남편은 회사에 있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남편은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돼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과장, 열심히 하지 않는 ○박사. 우리 부부에 대한 평가는 극명 가게 갈렸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를 이미 눈치챈 나는 서서히 남편을 멀리하게 됐고, 홀로 이직도 생각했다. 내가 간 회사에 남편이 온 이유는 아이를 함께 돌보기 위해서였다. 이전 회사는 야근이 많아 남편은 힘들어했고, 나와 함께 아이를 돌보고 싶어 개인 프로젝트로 운영되는 회사에 입사한 것이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육아를 해야 했고, 남편은 여전히 회사에 남아야 했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데 우리는 차를 따로 타고 다녔다. 아이 등하원을 내가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이가 아팠다. 돌발진으로 열이 펄펄 끓어 어린이집 원장님께 전화가 왔던 날, 나는 실험 중간이라 아이에게 갈 수가 없었다. 당연히 남편이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날, 반차를 내러 간 남편에게 남편 팀장이 물어봤다고 한다.
"○박사는 뭐하고?"
남편이 못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편이 아이를 돌보러 간다고 하면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은 꼭 질책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바쁘다고 ○과장이 갔나?'라는 눈빛?
분명 사회가 변했다고 했다. 육아휴직이 늘어났고, 우리처럼 아이를 직접 키우는 집이 많다고 했다. 아니, 사회는 변하지 않았다.
◇ 결국 남편과 나는 함께 회사를 그만뒀다
아이 엄마인 나는 퇴근은 할 수 있다. 아이가 아프면 휴가도 낼 수 있다. 아이를 돌보느라 조퇴도 할 수 있다. 걱정하지 말고 아이 키우라고 회사는 말했다. 그런데 같은 회사에 있는 내 남편은 나갈 수 없었다. 애엄마가 있는데 애아빠가 왜 가냐는 식이었다. 입사 때 했던 '칼퇴'가 가능하단 이야기는 배려 같았지만 배려가 아니었다.
인사평가에서 남편과 나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 날, 나는 남편이 꼴 보기 싫어졌다. 부부 사이도 갈라지기 시작한 거다. 그렇게 같은 직급인 남편은 회사에서 중요한 사람이 됐고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 됐다.
억울했다. 일찍 퇴근을 하는 만큼, 주말에 나올 수 없는 만큼 나는 최선을 다했다. 점심 먹고 쉬지 못하고 일한 적이 더 많으며, 점심을 거르고 일을 했던 적도 있고, 내 나름 시간을 맞춰 일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도 일을 더 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빌어먹을! 옆 팀에 있는 내 남편을 퇴근 시켜줘야 나도 일을 할 것이 아닌가. 우리 아이를 봐주는 이모님도 그래야 퇴근을 할 것이 아닌가. 이런 고민을 하는 나에게 '입주 도우미 써서 아이를 맡기고 회사에만 올인 하면 된다'는 사장의 조언이 말 같은 소리였겠는가?
결국 나중에 남편과 나는 회사를 같이 그만뒀다. 내 프로젝트가 실패하자 그 책임을 내가 져야 한다고 했다. 사장은 친절하게(= 매우 무례하게) 동료인 내 남편을 불러 나의 퇴직을 언급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퇴직을 하게 됐다.
회사는 물론 난리가 났다. 어차피 애를 키워야 하는 ○박사만 나가면 되지, 왜 일 잘하는 ○과장까지 내보내냐는 거였다. 회사는, 어차피 아이를 키워야 하고 가장도 아닌 나를 내보내더라도 돈 때문에 내 남편은 회사에 남을 거라고 생각했던 듯했다.
그렇게 상처만 가득했던 첫 직장과 '안녕~' 하고 집에 '짱 박혔다'. 2차 구직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안 그래도 입사 전 자존감이 떨어졌던 나는 첫 회사에 받은 상처로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고민이 늘었다. 어차피 다시 회사에 가도 이런 문제가 발생할 거라면, 회사 가지 말고 시간강사라도 뛸까. 아니면 수능을 다시 봐서 약대나 교대를 갈까. 한 1년 '빡시게' 하면 수능 볼 수 있지 않을까. 1년 8개월 동안 엄마, 아빠보다 이모님이랑 시간을 더 많이 보내야 했던 '땡그리'와 좀 더 많이 놀 수 있게 쭉 아이를 돌볼까. 회사를 다시 간다면 아이를 시댁이나 친정에 보내야 하지 않을까. 합가를 할까.
꼬리를 무는 생각들의 끝은 '결국 아이를 키우며 연구직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로 자꾸만 다가갔다. 내 인생이 허무하고 허무해서 견딜 수가 없던 시기였다. 그럼 결국 아이가 있으면 안 되는 거였나. 부정적인 생각만으로 가득했던 시기를 보냈다.
◇ 엄마와 과학자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아슬아슬한 일상
편하게 잠을 잘 수 없고, 미친 사람처럼 SNS만 뚫어져라 보던 시기였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그때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본 기사가 날 끌어당겼다. 장하나 국회의원이 쓴 칼럼이었다. 만나자는 말에 득달같이 땡그리를 끌고 올라갔다.
그렇게 나는 '정치하는' 언니들을 만났다. 만나서 펑펑 울고, 부정적인 생각을 조금씩 떨쳐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엄마와 과학자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아슬아슬한 일상을 보내게 됐다.
정치하는엄마들은 나에게 많은 위로가 돼주었다. 학력, 직종, 생활환경이 모두 다른 이들이지만, 결혼 후 아이가 생긴 뒤 직장에서 겪는 현실은 모두 같았기에 더 위로가 됐다. 세상에 나 혼자만은 아니구나. 이렇게 그냥 주저앉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게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됐다.
매일매일이 전쟁 같다. 실험을 하다가 불현듯 작아진 아이 옷이 생각나 실험 중간에 옷을 주문해야 하고, 아이 간식을 주문하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을 정도로 멀티플레이를 해야 하는 생활이 반복된다.
여전히 아이 등하원은 내 몫이고, 난폭운전을 해가며 출근시간 맞추고 아이 하원 시간에 맞춰 퇴근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일찍 퇴근하는 죄로 빨래도 내가, 식사 준비도 내가, 뒷정리도 내가 해야 하는 개똥 같은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슬아슬하게 엄마의 삶과 과학자의 삶을 같이 유지하고 있다.
힘들지만 지속은 된다. 지속하다 보면 볕 들 날이 있겠지 싶어 지속 중인데, 사실 빠른 성공으로 가지 못할까 불안하기도 하다. 이렇게 별 연구성과 없이 30대를 보내버릴까 봐 매일매일 무섭고 두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아이를 지켜보는 일은 실험하는 것만큼 재미가 있다. 지금 당장 큰 커리어를 잡을 순 없겠지만, 엄마로서의 삶도 소중하기에 그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보는 것이다.
엄마의 삶과 과학자의 삶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가 있다면 고민하지 말라 말해주고 싶다. 둘 다 가능하다. 약간씩 모자란 삶은 될 수 있겠지만 둘 다 놓지 않아도 된다. 완벽한 엄마는 불가능할 것이고, 엄청난 연구력을 지닌 과학자는 될 수 없을지언정, 그래도 엄마이고, 그래도 과학자로 지낼 수 있다.
그렇지만 도돌이표처럼 역시 힘들다. 남편이 제때 퇴근만 해도 난 덜 힘들어진다. 결국 결론이 그렇게 간다. 칼퇴가 답이다. 문제는 이게 잘 안 된다는 거지만, 언젠가 되지 않겠는가.
*칼럼니스트 윤정인은 대학원생엄마, 취준생엄마, 백수엄마, 직장맘 등을 전전하며 엄마 과학자로 살기 위해 '정치하는엄마들'이 되었고, ESC(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에서 젠더다양성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프로불만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은 회사 다니는 유기화학자입니다.
출처: https://www.ibab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6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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