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 딸에게 할 수 있는 말 (배수민)
"엄마, 나 축구선수 될래요."
8살 딸아이가 축구의 '축'자도 모르면서 축구선수가 되겠단다. 공놀이가 그저 좋아서 그런 꿈을 꾸는 것이리라. 엄마인 나는 정말 멋진 꿈이라며 아이를 격려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운동선수는 절대 안돼. 특히 여자는.'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故) 최숙현 선수의 죽음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 체육계의 고질적인 행태에 완전히 질려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이 아빠도 내게 단호히 주의를 준다.
"여자가 운동선수는 절대 안돼. 무슨 일을 당할 지 모르는 곳이 체육계니까."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을 했겠지만, 기본적으로 체육계에 대한 불신이 매우 강하다는 뜻일 것이다. 무엇보다 많은 남성들이 여성 운동선수를 볼 때 그런 '걱정'을 섞은 시선으로 보지 않을까 싶어 서글프고 속상했다.
사실 여성은 직장이 어디든지간에 늘 각종 성추행과 폭력과 차별에 노출되어 있고 그 경험은 '범지구적'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체육계는 코치, 감독과 선수 선후배들 간의 상하관계가 철저하고 생활 밀착도도 대단히 높기 때문에 인간관계로 인한 고통이 일반 직장보다 훨씬 클 것이라 예상된다. 더구나 대부분 어렸을 때부터 같은 코치, 감독, 선수단과 쭉 함께 훈련하고 생활하기 때문에 불합리한 일을 겪고도 그것이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 채 스스로의 부진에 죄책감을 느끼며 혼자 그 고통을 감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누구에게 하소연하고는 싶은데 어디다 해야 할 지 모르겠고 일단 부모님께는 죽어도 말 못하겠는 그런 끔찍한 고통 말이다.
작년 심석희 선수의 폭로로 전국이 떠들썩했던 것도 일종의 헤프닝으로 지나갔다. 그때 체육계의 고질병을 뿌리뽑는다고 뭐 대통령까지 신경쓰는 것 같긴 같았는데 이후 도대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지금은 알 길이 없다. 그러는 사이 '가짜 팀닥터' 안주현과 '제대로 된 선수 이력 없는 감독' 김규봉은 여전히 자격도 없는 주제에 선수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으며 부당한 방법으로 금품까지 횡령해 왔다. 여기에 폭력배처럼 군림하는 선배들과 같은 피해자라도 최숙현 선수의 고통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동료들까지.. 전부 다 '그대로'였다.
계약서도 엉망이었다. '노예 계약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선수들은 경주시청의 '을'이었고 감히 목소리를 낼 수가 없는 1년짜리 비정규직들이었다. 그런 지옥같은 환경 속에서도 그토록 좋은 성적을 내다니 이건 '기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기적은 선수의 죽음으로 끝났다.
최숙현 선수가 목숨을 끊기 전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도 정말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마지막 희망인 경찰조차 최숙현 선수 부녀의 고소장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X'자를 그려넣었다. 어쩌면 최숙현 선수 심장에까지 그 'X'자가 새겨지지 않았을까.
국회의원들은 다시 최숙현법을 발의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과거 심석희법도 발의한댔는데 결국 국회 통과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통과가 되었어도 분노, 통과가 안 되었어도 분노다.
선수들의 안전과 권익이 보호되는 법안은 반드시 필요하다. 체육계 표준계약서 시행도 필수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에 대한 존중이다. 선수를 '쓰다 버리는 비정규직' 정도로 여기는 체육계의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또한 사고가 났을 시 '피해자 보호, 가해자 처벌'이라는 당연한 상식이 지켜질 수 있는 시스템도 마련해야 한다. 조사강제력 없는 공무원 25명 정도로 전국의 체육계를 감시하겠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참 성의가 없는 날림대책이다.
지금 전국의 수많은 여성 운동선수들이 이 뉴스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부모님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까. 차마 남이야기 같지 않아 피눈물을 삼킬 그 분들에게 이제는 안심과 희망을 드려야 한다. 그래서 나도 축구선수를 꿈꾸는 내 딸에게 지저분한 걱정 없이 '해봐!'라고 격려할 수 있으면 좋겠다. 혹시 아는가. 내 딸이 제2의 지소연이 되어서 세계 축구판도를 뒤집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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