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임신했을 때 알았나요?" 이 말을 겁내지 마세요 (서이슬)
"임신했을 때 알았나요?" 이 말을 겁내지 마세요
[서평] 잔드라 슐츠의 책 '엄마는 너를 기다리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어'
[관련 기사 : 아기가 왜 이래요, 임신했을 때 알았어요?]
"미쳤다. 가벼운 감성으로, 평생 그런 기형을 안고 살 애의 입장은 생각하지도 않는 거냐. 태어난 애의 고통은? 확실치도 않은 태아의 고통은 생각하면서, 진짜 확실한 애의 고통은 왜 외면하는 건가."
이게 무슨 소리냐고요? 나의 아이는 임신 20주 초음파 때 어떤 질환이 의심되는 경우였습니다. 정밀검사를 받아보라는 소견을 들었지만, 그 이상의 검사를 진행하지는 않았습니다. 반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고, 반쯤은 '혹시 이상이 있더라도 뒷일은 낳고 나서 생각하면 된다'라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이상 소견을 들었던 그날 초음파 영상에 찍힌 아이의 모습은 참 예뻤습니다. 배가 볼록하고 코가 오똑한 것이, 귀여웠어요. 아이는 출생 직후,
10만 분의 1 확률로 태어나는 선천성 희소 질환 클리펠-트레노네이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 아래 KT 증후군)이라는 진단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케이티(KT)'의 엄마가 되었지요.
질병과 장애를 가진 삶은 당연히 고통스러울 거란 생각
나의 선택을 '가벼운 감성으로'라는 말로 표현한 저 댓글 작성자는, 아이에게 질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를 낳은 내가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책임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가 당연히 '고통'받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요. '평생 그런 기형을 안고 살 애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듣자니 참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내 아이의 '입장'을 생각해주다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이 댓글은 임신중절에 관한 우리 사회의 이중성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생김이 눈에 띄게 다른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면, 누군가는 꼭 이렇게 묻습니다. "임신했을 때 알았나요?" 무엇을 알았냐는 뜻인지,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당신은 아마 금세 알아채겠지요.
누군가가 내게 저렇게 물어올 때마다, 나는 생김과 능력이 '보통'과는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점을 고스란히 느낍니다. '모든 생명은 고귀하다'면서, 그래서 임신중절을 '함부로' 할 수 있게 해서는 안 된다면서도, '어떤 생명'은 태어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 참 질기게도 이어져 온 이중성입니다.
댓글 작성자의 질책(?)과는 달리, 나의 아이 케이티는 대부분의 날들을 웃으며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종종 타인의 불쾌한 시선을 받으며 상처를 받고, 때때로 병원 신세를 지는 날이 있지만 오히려 잔병치레는 거의 없고, 충분히 사랑 받으며 삽니다.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누군가가 뱃속에 우리 아이와 같은 병을 가진 아이를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전화를 걸어 말해줄 겁니다. 이런 아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그러니 너무 겁내지 말라고요.
우리 삶을 미리 결정짓는 당신들이 문제다
▲ "엄마는 너를 기다리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어" 잔드라 슐츠(지은이) | |
ⓒ 생각정원 |
잔드라 슐츠 당신은 책 <엄마는 너를 기다리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어>에서 이렇게 썼지요.
좋은 날에는 우리도 다른 가족처럼 평범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아픈 아이나 장애가 있는 아이를 둔 가족에게 평범함이란 지금 이 순간이 괜찮다고 의식하는 삶이다. 또한 어느 정도는 힘들게 노력해서 얻은 보통의 삶이다. 다르게 보자면, 선물로 받은 평범한 삶이다. 평범은 정상 상태가 될 필요는 없다는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 . .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 삶을 인정하는 것이다. (254)
나 역시 이 아이와 함께 하는 우리의 삶이, 그리고 아이의 삶이, 남들보다 특별히 고통스럽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마음 깊은 곳에 항상 엄청난 두려움(아이가 다리절단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든가, 아이가 먼저 일찍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든가 하는)을 안고 살기에, '지금 이 순간의 괜찮음'은 때로 힘들게 노력해서 얻는 무언가일 때도 있지요. 하지만 아이에게 장애가 있든 없든, 모든 부모는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며 삽니다. 우리에겐 우리만의 걱정이 있는 것뿐이지요.
나는 오히려, 우리의 삶을 미리 판단하고 결정짓는 태도, 초음파 검사로, 혈액검사로 태아의 유전자적 결함 여부나 '기형' 여부를 판별하려는 그 무수한 시도들이야말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낳으면 아이는 물론 부모의 삶이 '고통'일테니 막아야 한다는 그 눈물겨운 이타심은 당신 말대로, 어떤 사회적 함의를 보여주고 있지요.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피할 수 있는 끔찍한 일이라고 여겨 규격에서 벗어난 삶을 제재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장애가 없는 태아를 찾기 위한 노력은 다운증후군 검사만큼 풍부하며, 이 검사들은 대부분 진단 후 임신중절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한 독일 산부인과에서 대규모로 제공하는 검사는 염색체 장애를 찾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심지어 우리 사회에서 이성적이고 바람직하며, 규격에 맞는 태도라는 인상마저도 준다."(293)
어떤 아이든 함께 기르는 사회를 만드는 일
이쯤에서 다시 처음 소개한 댓글로 돌아가 볼게요. 아까 미처 언급하지 못한 문제적 대목을 하나 짚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확실치도 않은 태아의 고통은 생각하면서'라는 말은 댓글 작성자가 나의 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나는 해당 글에서, '태아의 고통을 생각'해서 임신중절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물론 나는 아이의 희소질환 가능성을 알고도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가 나와 같은 선택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아직 우리 사회는 내 아이 같은 아이가 인격적으로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준비를 다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지요.
잔드라 슐츠 당신 역시, 마르야와 같은 질환을 안고 태어날 아이를 품고 있던 여자가 결국 임신중절을 택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슬프지만 그의 결정을 이해한다고 말했지요.
독일에는 장애아를 둔 가족이 받을 수 있는 도움이 무수히 많다는 당신의 말에, 나는 조금 다른 결말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시 어디에서도 쉽지 않나 봅니다. 하긴,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당신이 그토록 오랜 기간 번민하며 힘들어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몇 해 전 펴낸 나의 책, <아이는 누가 길러요>에서 나는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장애를 가진 아이를 선별하는 것도, 임신중절을 선택하는 여성을 벌하는 것도 아닌, '사회적 육아'라고요. 장애인 차별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도 장애가 되지 않는 사회를 원한다고요. 그런 내게, 당신이 이렇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엄마가 될 여성이 장애가 있는 아이를 낳겠다고 결정한다면, 이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사회를 믿고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 . . 장애가 있는 사람을 사회에서 없애는 대신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우리 모두에게 일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295)."
나와 꼭 같은 말을 하고 있는 당신이 참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마침 요즘 나는 6년 전에 만든 'KT 한국 환우회' 온라인 모임을 공식 비영리단체로 만들어보려는 중이거든요. 나와 당신이 원하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조금 더 가까워지려면 나부터 뭔가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부담으로 다가와 주저하던 중이었어요.
독일에 있는 당신과 한국에 있는 나, 당신의 마르야와 나의 케이티가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덜 힘들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다시 힘을 내어 봅니다. 당신 덕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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