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놈의 워킹맘 더는 못 하겠다...'엄마회사'차리련다 (윤정인)
- 칼럼니스트 윤정인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회사를 망치는 ‘빌런(창작물에서 악당이나 악역을 뜻함)’ 꼭 한 명씩은 만난다. 이 빌런은 질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기존 빌런이 없어지면 새로운 빌런이 들어오고, 아니면 내부에서 갑자기 신종 빌런이 탄생하기도 한다. 우리 회사에선 누가 빌런이었냐. 바로 대표였다.
직원들에게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안겨주고, 대표를 ‘없앨’ 방법까지 고민하게 만들었던, 그러면서도 내게 ‘새로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제공해 준, 우리 회사 빌런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 도망쳐! 이 회사는 대표가 빌런이야!
나는 대표가 빌런일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 왜냐하면, 면접에서 엄마로서의 나를 인정해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회사에 입사할 땐 과학자의 삶과 엄마의 삶을 동시에 보장받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해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 계산이 정확한 줄 알았는데, 틀렸다. 대표가 빌런이었기 때문에 내가 한 계산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대표가 빌런임을 알게 된 것은 입사 후 1년 정도 지났을 시점. 대표는 출근을 잘 안 했다.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나타나 회사 운영 보고를 할 때마다 나와 직원들은 싸한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다. 대표가 빌런임을 증명하는 일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대표가 빌런일 때 회사 경영에 치명적인 문제들이 생긴다. 내가 입사한 이곳은 스타트업이었는데, 스타트업은 사실 아무것도 증명된 것 없는 하얀 도화지 같은 회사다. 자본도 없고, 매출도 없고, 아직 특출난 연구도 없다.
그래서 스타트업은 실현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아이디어와 계획,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자료가 있어야 그나마 ‘이 회사는 괜찮(을지도 모른)다’라는 것을 어필할 수 있다. 그래서 스타트업에는 자기 일을 ‘알아서 할 줄’아는 사람, 자기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빠르게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한데, 대표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대표가 이런 사람인 줄 몰라서 그냥 두었더니,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우리에게 넘겨놓고, 우리가 안 해준다고 ‘징징’댔다. 처음엔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점점 그 일들이 늘어났다. 미수금을 받는 일, 대금결제를 미뤄달라고 해야 하는 일 등 온갖 아쉬운 소리 하는 일들은 직원들에게 떠넘겼다. 하다 하다 퇴사하는 직원 행정 처리까지 떠넘겼다. 마지막엔 회사 통장 잔액 걱정까지 해야 했다.
이런 상사를 ‘데리고’ 일하려니 너무 힘들었다. 그는 회사에 대한 책임감도 없었고, 경영철학도 자주 바뀌었다. 자신의 역할을 모르니, 대표의 말에 얼마나 많은 무게가 실리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어디서 배워왔는지 법인 통장을 개인 통장처럼 써젖혔다. 나와 동료는 그 모습을 보며 매일 한숨만 쉬었다.
“대표님, 그러시면 안 돼요.”
이렇게 이야기도 해봤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그는 “내가 아는 대표들도 다 이렇게 하던데?”라고 하거나 “이거 내 회산데 뭐~(여기 법인이거든요).”같은 소리만 했다. 나아지지 않았다.
우린 결국 대표를 포기하기로 했다. 직원들이 열심히 노력해봤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폐업을 결정했다. 직원 임금 체불 상황은 심각했고, 아직 정신 못 차린 대표는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한다. 난감한 상황이지만, 일단 법대로 하기로 했으니, 가만히 있다.
누가 그랬는데. ‘먼저 화내는 사람이 지는 것’이라고. 나는 이 싸움에서 절대로, 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 아이 키우면서 다닐 수 있는 회사가 없을 것 같아서… 이 회사에 주저앉았다
나는, 왜 우리는 이런 대표를 데리고 회사를 유지하고 싶었던 걸까? 대표가 무능력해서 사업을 계획할 능력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회사를 살리고 싶었을까?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나는 안일했고 두려웠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회사라면 빨리 도망치는 게 맞지만, 그래서 전 회사를 그만뒀지만, 이후 아이를 키우며 일할 곳을 찾는다는 게 너무 어렵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정시에 퇴근하고, 아이 일정에 맞춰 조퇴나 연차를 쓸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까? 어렵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아이가 여덟 살이 되는 해까진 이 회사를 살려서 다녀보려고 노력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발생한다는 돌봄 공백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는 결정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이 회사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이자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나의 안일함은 어떤 것이 있었나. 회사에 관심도 없고, 출근도 잘 안 하고, 오더라도 놀다 가는 대표보다 내가 더 회사를 잘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꿈을 꿨다. 일곱 살 아들을 사람답게 가르는 일도 하는데! 대표가 경영을 모르면 우리가 알려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통장 잔액도 잘 몰랐고, 대표 대신 미수금을 협상할 수 있는 권한도 없었으며, 투자를 유치하거나 경영에 대한 어떤 권한도 없었다. ‘소장’이라는 직책에서 다른 직원들과 의기투합해 회사를 이끄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를 확실히 깨닫고 나서야 이 회사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었다.
◇ 어차피 벼랑 끝에 서야 한다면, 혼자 아닌 함께 서보려 한다
이번 일을 겪으며 나는 새로운 결심을 세웠다. 그동안 마음으로만 막연히 그려왔던 ‘엄마 기업’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이번 회사를 그만두며 이직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 생각을 접었다. 아직 나의 ‘돌봄’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지금 일곱 살. 내년이면 ‘돌봄 절벽’이라는 여덟 살이 된다. 지금 내가 다른 회사로 간다고 한들, 나는 내년 3월이 되면 돌봄 절벽 끝에 서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해야 하는 줄타기라면, 나와 함께 줄타기할 사람들을 늘려, 아슬아슬한 줄 대신 안정적인 다리를 만들어 여덟 살 돌봄 절벽을 건너보려 한다. 될지 안 될지도 사실 잘 모르겠고, 지금은 그저 꿈에 불과하지만, 모든 스타트업이 바로 꿈에서 시작했듯. 꿈은 현실이 될 것이고, 나는 내년에 무사히 돌봄 절벽을 건너리라 믿으며 절벽 앞으로 걸어 나가려 한다.
결론?
그래. 난 그렇게 또 ‘사고’를 쳤다.
*칼럼니스트 윤정인은 대학원생엄마, 취준생엄마, 백수엄마, 직장맘 등을 전전하며 엄마 과학자로 살기 위해 '정치하는엄마들'이 되었고, ESC(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에서 젠더다양성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프로불만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은 회사 다니는 유기화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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