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애 엄마’가 감히 우리 회사에 지원을 하셨어요? (송지현)
‘애 엄마’가 감히 우리 회사에 지원을 하셨어요?
- 칼럼니스트 송지현
[파트타임 엄마 송지현의 ‘24시간이 모자라’] ‘일-가정 양립’을 위한 서바이벌 연대기 ④‘재’취업준비생
혼자서 아이를 키우면서 포기한 한 가지는 ‘고용 안정’이었다. 대기업, 중소기업, 국내 공공기관, 외국계 공공기관, 재택 프리랜서, 그리고 맨몸의 백수. 나는 때마다 시간과 돈의 우선순위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생계를 걸고 직장과 고용형태를 바꾸는 모험을 감행해야 했다. 아니, 감행 '당했다'. 그 과정에 ‘거세’당한 한 가지를 더 꼽자면 그건 '자존감'이었다.
◇ 연봉도 복지도 포기했는데… 돌아온 말은 “눈 더 낮추라”
꿈의 직장이라 일컬을 만했던 외국계 공공기관은 한국에서 사업을 축소하면서 말 그대로 신기루가 되어버렸다. 계약 종료와 동시에 나는 난생처음 실업급여 수급자가 됐다. 실업급여는 직장 다닐 때 낸 고용보험료의 액수와 기간에 따라 결정된다. 내 경우 넉 달 동안 100만 원 남짓의 급여가 나온다 했다. 조건은 까다롭지 않았다. 그 기간 구직활동을 하고 있음을 정기적으로 증빙하기만 하면 됐다.
고용센터(현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갔다.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오랜 대기 끝에 만난 담당자에게 경력이 단절된 사정을 설명했고, 우리 도시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내 경력과 조건에 부합하는 일자리가 나오면 적극적으로 알선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센터가 나의 프로필에 적합한 일자리를 매칭해 주리라는 기대가 얼마나 허무맹랑했는가를 깨닫게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간간이 센터를 통해 접하게 된 일자리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할 수준이었다.
내 경력과 전공, 강점과 자원, 커리어의 맥락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곳은 모든 구직자를 ‘1맨먼스(M/M, 한 달에 한 사람의 개발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일컫는 용어, 이 글에서는 그저 한 업무 당 ‘인력 투입’을 산정하는 기준으로 썼다-편집자 주)로 만들어버리는 마법의 공간 같았다. 구직기간이 길어지자 종국엔 귀띔이랍시고 들은 말이 ‘대학을 기재하지 않고 하향 지원하는 사람도 있다’라는 것이었다.
나의 구직 조건은 명확했다. 첫째, 통근 시간 절약을 위해 집과 가까운 위치에 있을 것. 둘째, 경력 연속성을 위해 기존의 업종과 직무, 적어도 둘 중 하나와 관련 있을 것. 그리고, 기왕이면….
‘기왕이면 민간기업보다는 사회에 이바지하면서 성취를 느낄 수 있는 분야면 좋겠다. 기왕이면 야근이나 주말 출근이 적은 곳이면 좋겠다. 기왕이면 이름이라도 들어본 규모 있는 직장이면 좋겠다. 기왕이면 급여가 높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어린이집 셔틀버스가 지나는 곳이면 좋겠다. 기왕이면 유연 근무가 가능하면 좋겠다….’
선호하는 조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옵션은 말 그대로 옵션일 뿐, 필수는 오직 저 둘뿐이었다. 실업급여가 나오는 넉 달의 기간은 재취업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생각했다. 사실상 많은 조건을 이미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공공과 민간의 모든 취업포털에 이력서를 정비해 올렸고 수많은 헤드헌터와 접촉하며 서류를 돌렸지만, 면접이 성사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주 드물었다.
◇ 무례함과 모욕… 노동시장 최하위에서 나는 병들어갔다
한 언론사의 비 제작부서 경력직 면접에서였다. ‘이게 경력직 면접이라고?’ 싶을 정도로 무성의하게 준비된 작은 회의실에서 단 한 명의 면접관과 마주한 채 면접을 치르게 됐다. 아니나 다를까 양육에 대한 사적인 질문들이 꼬리를 물며 아까운 면접 시간을 잡아먹었다. 내 경력과 역량과 앞으로의 직무수행 계획에 관한 답변 기회는 생략됐다. 끝내 나는 이런 말까지 들어야 했다.
“언론사 들어오기가 얼마나 바늘구멍인지 아실만한 분이 지원하셨어요? 고작 그 경력조차 단절됐던 사람이 무슨 여기서 일을 하겠다고.”
나는 채용공고에 제시된 기준과 나의 경력 간의 직무 연관성이 넘치면 넘쳤지 부족하지 않음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표정과 몸짓에서 이미 ‘애 엄마 따위가 감히’라는 확고한 메시지를 읽어버렸다. 그는 다른 후속 절차를 통해서가 아닌 그 자리에서, 내 면전에 대고 채용 불가 의사를 밝혔다. 요 몇 달 새 수차례 낙방을 경험했지만 이처럼 무례한 예는 없었다.
한 중견 소비재기업 면접은 점입가경이었다. 주부를 주 고객으로 삼는 생활용품 분야 마케팅 직무였기 때문에, 엄마라는 조건이 일종의 ‘스펙’으로 여겨지리라는 기대감마저 들었다. 그곳은 희한하게도 경력직 면접을 다대다(多對多) 형식으로 진행했다. 면접관 여러 명과 응시자 두 명이 한 공간에서 공개적으로 문답을 나눴다.
간략한 자기소개 후 내게 들어온 첫 질문은 역시나 세 차례의 이직 사유였다. 나는 가감 없이 솔직하게 답했다. 그리고 엄마로서, 가사노동자로서, 주부로서, 가정경영자로서 ‘투잡(two-job)’을 해온 경험과 이 직무역량과의 연관성에 대해 정성껏 답변을 이어나갔다.
두 응시자에게 주어진 면접 시간은 20분 남짓. 그러나 첫 질문 이후 누구도 나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남은 시간 모든 응답 기회는 내 옆의 다른 응시자에게만 허락됐다. 나는 마치 관전자가 된 양 그 응시자의 답변을 듣고만 있어야 했다. 관전자라는 표현도 호사스럽다. ‘그림자’나 ‘투명인간’ 정도, 나는 딱 그 정도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응시자는 내 또래 여성으로 타 업종에 재직 중이었다. 나보다 경력도 짧았고, 나보다 직무 관련성도 낮았고, 전공도 무관했고, 나처럼 이직 경험도 있었다. 나를 능가(?)하는 조건이 있다면 ‘미혼 무자녀’라는 거였다.
노동시장이라는 곳은 그렇다. 이 바닥에서 ‘엄마’라는 정체성은 꼭꼭 숨겨야 할 약점이 되고 양육자는 곧 죄인이 된다. 하물며 주방가구 만드는 곳에서도, 아이들 콘텐츠 만드는 곳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젊은 가임기 여성이 아니었다면 면접 자리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을 사생활들, 양육자가 아니었다면 꼬리 물지 않았을 질문들, 애초에 아이 키우며 일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면 필요치 않았을 조각난 경력에 대한 해명들, 내가 노동시장에서의 약자만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드러내놓진 않았을 면접관의 무례와 오만들…. 나는 그 속에서 병들어갔다.
어느덧 찬 바람 부는 계절을 맞았다. 구직 초기 내걸었던 두 가지 필수 조건은 온데간데없었다. 근무지가 어디든, 무슨 업종과 무슨 직무든, 업무 강도는 어떻고 급여는 어떻든 가릴 처지가 아녔다. 끝내 신입과 인턴 자리에도, 전 직장들보다 더 먼 곳에도 이력서를 넣었다.
경제적 난관도 피할 수 없었다. 기름값은커녕 버스요금도 부담돼 고용센터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까 봐, 이대로 사회에서 도태될까 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봐, 우리 가족의 삶의 수준이 이 자리에서 이렇게 멈춰 버릴까 봐…. 불안하고 억울한 마음에 잠은 달아나고 눈물만 늘었다.
끝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곳까지 침잠해버린 자존감은 시각화된 자료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시 고용센터에서 받은 ‘구직준비도’ 검사 결과 그래프는 그야말로 기형적이었다. 자아존중감 5점, 구직효능감 1점, 구직기술 5점, 경제적취약성적응도 2점…. 여기서 만점은 10점이 아니라 100점이었다.
결국, 고용센터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의 하나로 심리상담까지 받게 됐다. 아이 말곤 주변에 말 상대 하나 없던 내가 모든 상황을 털어놓고 여러 감정을 배설하며 왈칵 울음을 쏟아낼 기회였다. 늘어나는 구직기간과 상담 횟수에 비례하여 상담사에 대한 의존도 커져만 갔다.
우리 선생님은 대체로 묵묵히 들어주는 역할에 충실하신 분이었다. 하지만 종국엔 ‘눈높이를 더 낮추어보면 어떻겠냐’는 취지의 말씀을 해주기도 하셨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악화하기만 하니 분명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하지만 심신이 취약해진 내게 그 말은 사망 선고나 다름없이 다가왔다.
‘이건 쉼표가 아니라 마침표야. 네 커리어는 이미 끝났다고. 유일한 방법은 리셋 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야.’
그렇게 직업적 사망 선고를 받았을 당시 내 나이는 사회에서 제대로 한 번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고작 서른이었다.
◇ 왜 엄마의 삶은 고용불안을 낳고, 임금을 깎고, 희롱의 대상이 되는가
그렇게 전업 구직자로 산 기간이 꼬박 8개월이다. 봄꽃을 보며 퇴직했는데 눈을 보며 입사를 했다. 무려 '쉰여섯 건'의 이력서를 쓰고 열두 번의 면접을 치르고 나서야 ‘재취뽀(재 취업 성공)’는 현실이 됐다. 사회생활 만 6년 만에 네 번째 직장이다. 그 6년 중 대부분은 ‘엄마’와 겸직한 시간이었다. 비록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파트 타임 엄마’였지만 말이다.
양육자가 아니었다면 리더로서 조직(가정)을 이끌며 구성원(자녀)을 돌보고 독려하는 역할을 일찍부터 경험할 수 있었을까. 양육자가 아니었다면 짜임새 있고 신속하게 일을 조율하는 멀티태스커(multitasker)를 할 수 있었을까. 양육자가 아니었다면 타인에게 깊이 경청하고 공감하는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었을까. 양육자가 아니었다면 다른 대상을 나 자신보다 우선순위에 놓을 만큼의 책임감과 헌신을 지닐 수 있었을까.
나는 일찍이 엄마가 됐기에 더 먼저, 더 압축적으로, 더 능숙하게 여러 기능들을 장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직장생활에 꼭 필요한 덕목들과도 다를 게 없었다. 이것이 구직이나 이직을 위해 쌓는 다른 스펙들, 이를테면 수상실적을 쌓고 인턴을 하고 봉사를 하고 연수를 가고 자격증을 따는 등의 과정보다 대단히 열등하게 취급될 일인가 묻고 싶다.
왜 양육자로서의 모든 스킬과 서사는 이력서의 스펙 한 줄, 자소서의 자랑 한 단락은커녕 금단의 볼드모트가 돼야 하는가. 왜 양육자로서의 경험은 임금을 깎고, 고용 안정을 흔들고, 기존 경력을 리셋하고, 지닌 자질조차 희롱하는 수단으로서 작용하는가. 그리고 왜 이 모든 과정은 양육자 중 유난히 ‘한쪽 성별’에만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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