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엄마니까 착하게 살려고 했는데, 엄마라서 싸워야겠어 (윤정인)
- 칼럼니스트 윤정인
- 승인 2020.09.28 16:34
나는 어쩌다 보니 시민단체 활동가로도 살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엄마도, 과학자도, 내가 다 ‘해 먹으려’ 결심하게 된 계기, 바로, ‘정치하는 엄마들’의 ‘하마’로 살게 된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 나를 갈아 넣으며 일했는데, 회사의 평가는 가혹했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나는 아이 낳은 후 기업에서 직업 과학자로 삶을 시작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나이 대비 연봉이 좋았다.
다만, 남편과 같은 직장,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한 바람에 눈떠서 잠잘 때까지 내리 배우자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것과, 경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달이 백만 원가량의 돌봄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는 것과, 입사 6개월 만에 삶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말았다는 단점이 있으나, 그래도 풍족한 용돈으로 씁쓸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기에 괜찮았다.
그런데 나는 그 회사에 다니는 동안 바다 한가운데 놓인 어떤 섬에 고립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또, 매일 윗선의 테스트를 받는 느낌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이 회사에선 내가 창립 이래 세 번째 여자 연구원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남자 연구원들끼리 흡연+커피 타임이라며 몰려다니는 일이 많았다. 담배 연기를 싫어하는 나는 그 무리에 어울리지 않았는데, 다른 동료 과장님에게 ‘그 무리에 어울려야 한다’는 조언을 듣기도 했다.
그때 어떤 취업특강에서 들은 ‘여자가 직장에서 살아남는 법’이 떠올랐다. 어떤 대기업 여성 상무가 승진을 위해 담배를 피웠다는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저들의 얼굴에 함께 담배 연기를 뿜어 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으나…, 담배 연기도 싫었고, 남 얘기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 무리가 쪼잔해 보이기까지 했으므로 거절하고 ‘아웃사이더’의 길을 택했다.
좋은 선택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덕에 나는 회사에 떠도는 여러 소문을 놓쳤고, 사내 정치는 실패한 셈이니. 그리고 내가 ‘아싸’를 선택한 덕에 오히려 동료 과장인 신랑이 더 빛을 보기도 했고, 윗선에서 나를 어떻게 테스트하고 있는지 그 정보 또한 놓쳤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사람을 시험하는 회사였다. 사람이 들어오면 나무 위에 올라가라 시키고, 올라갈 때 사용한 사다리를 치운 뒤, 나무를 툭툭 쳐대며 떨어지나 안 떨어지나를 확인하던 회사였다.
회사는 늘 나에게 ‘기대치를 채우지 못했다’라는 소리를 자주 했다. 내게 뭘 기대했는진 모르겠으나, 내게 떨어지는 프로젝트는 마감이 급한 것들이거나, 아예 처음부터 만들기 어려운 것이거나, 아무도 안 하고 싶어 하던 프로젝트였다.
박사 타이틀을 달았다는 이유로 나는 늘 그런 프로젝트를 했다. 그런데도, 나는 마지막 프로젝트를 제외하고 그런 프로젝트들을 다 성공시켰다. 만들어 본 적 없는 물질을 만들기도 했고, 회사에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실험을 성공시킨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늘 ‘능력 부족’이란 질책을 받았다. 성공해도 질책, 실패해도 질책. 뭘 해도 평가가 같으니 나는 계속해서 작아졌다. 뭘 해도 회사에서 응원받는 동료였던 신랑과 비교하며 더 작아졌다.
심란했다. 내게 쏟아지는 실험은 하나같이 레퍼런스도 없었고, 시간은 늘 촉박하고, 그런데 난 칼퇴근을 해야 하고, 애는 계속 아팠고, 주말에도 출근해야 하고….
퇴사 전 마지막 프로젝트도 사정은 이랬다. 테스트에선 성공했는데, 방사성 동위원소를 치환하지 못했다. 실험이 안 되니, 내게 남은 선택지는 시간을 쏟아 넣는 것뿐이었다. 아침 여섯 시에 출근해 밤 열두 시에 들어왔다. 땡그리는 그때 돌발진으로 고열에 시달렸다. 밤에는 아이를 돌보고, 그러다 아침이 오면 다시 출근하고, 주말에도 출근하고, 한 달을 그렇게 일하자 회의감이 들었다.
‘실험도 못 하는 주제에…’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늦게 출퇴근하다 보니 차도 없고, 도로도 한산하고….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애가 아픈데 엄마라는 사람이 애를 데리고 병원에도 못 가고, 아픈 아이에게 얼굴도 못 보여주고, 실험도 못 하고, 실험도 못 하는 주제에 박사랍시고, ‘왜 사냐, 죽지’라는 생각에 힘들었다. 엄마로도, 과학자로도 살 수 없다는 현실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만뒀다. 이대론 아무것도 못 한다는 끝없는 자괴감이 내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과학자의 삶을 던지고 엄마로만 살면 뭔가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런데 해결되지 않았다. 엄마로만 사는 삶은 역시 만족스럽지 못했다. 과학자의 삶을 버린 이유도 스스로 납득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과학자의 삶을 버리게 된 이유를 스스로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름대로 실험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지도교수가 변경되는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논문을 썼다. 논문 쓰는 것보다 실험하는 것을 더 좋아해서 교수님들께 혼나기까지 했지만, 우리 지도 교수님이 “넌 이제 하산해도 돼”라고 하실 만큼, 인정받는 게 익숙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실험이 쉬웠던 적 없었다. 나는 우리 팀에서 늘 ‘안되는’ 실험을 도맡아 했다. 만들기 힘든 것, 만들 수 없을 수도 있는 것, 동물실험에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야 하는 것들까지…늘 어려운 실험에 임할지라도 스스로 자존감을 무너뜨리며 자책을 해 본 역사가 없었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면서는 왜 그렇게 자책을 했을까? 퇴사한 후에도 그 자책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남편과 회사 이야기를 피했고, 우연히 회사 이야기가 나온 날엔 혼자 서재에 틀어박혀 슬픈 드라마를 보며 펑펑 울었던 적도 있다.
그러다 우연히 어떤 칼럼을 봤다. 그 칼럼의 마지막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우리, 만나자”라고. 그 문장 하나에 땡그리를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갔다. 2017년 4월 22일.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 자책을 멈추니 비로소 ‘빡’쳤다… 나는 ‘하마’가 되기로 했다
만나서 우리가 한 일은 서로 이야기를 한 것뿐이었다. 온갖 사연이 다 튀어나왔다. 엄마인 건 같은데 이름도, 나이도, 엄마이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 모두 달랐다. 그날 대화를 나눈 후 우리가 함께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엄마가 된 후 우리는,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훌륭한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 무던히도 발버둥을 치며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직장 다니는 이들은 ‘여성’, ‘엄마’라는 현실이 핸디캡이 될까 싶어 실적에 연연했고, 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중앙에서 점점 밀려나는 일을 경험했다. 겉으로는 ‘자발적 퇴사’였으나, 그 퇴사까지의 과정이 전혀 자발적이지 않았던 경험들이 공유됐다.
왜 우리는 ‘평범한 직장인’이 될 수 없었을까. 우리는 왜 늘 뛰어난 직장인이어야 했을까. 언니들을 만난 후 이 사실을 깨달았고, 비로소 자책하는 일을 멈출 수 있었다. 자책 대신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고, 그 질문을 떠올리면 ‘빡쳤다’.
‘아니 왜, 나는 평범한 연구자로 살면 안 돼? 왜 나는 엄청난 기대치를 충족해야 하는, 비범한 사람이어야 하지?’
왜 나를 그렇게 타이트하게 평가했는지, 가장이 아니니 당장 그만둬도 문제없겠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겨댄 대표에게 따지지도 못한 게 그렇게 ‘빡’쳤다. 빡쳐서, 하마가 됐다.
어쩌다 보니 전직 ‘전문직’이 총출동한 4월 22일, 그리고 두 번째 만남 5월 13일. 비슷한 사연으로 다 같이 ‘빡쳤던’ 우리는 세 번째 만남이 있었던 6월, 비영리 임의단체를 출범했다.
마침 엄마였는데, 전직 국회의원이고, 전직 마케팅 전문가였고, 전직 과학자이자 전직 연예인 팬클럽 운영자였고, 전직 기자였고, 전직 디자이너였다. 그날 모인 우리들의 경력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아니 왜 이런 사람들이 여기에 있어?”라고 할 정도였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무궁무진했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다. 고립된 섬에 살며 안절부절못하다가 옆 섬에 사는 동료를 만난 기분이었달까. 어떤 언니는 이것을 ‘육아둥둥섬’이라고 표현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원래 ‘파이터’였다. 대학-대학원 생활을 거치며, ‘남초 집단’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다 보니, 대학교 1학년 때보다 성질머리가 많이 죽긴 했지만, 굳이 싸움을 피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엄마가 된 뒤, 싸우는 게 싫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위협받을까 싶었고, 내가 타인에게 나쁜 마음을 먹으면 그게 내 아이에게 업보처럼 올까 무서워, 항상 착하게,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렇게 산다고 좋아지는 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정치하는엄마들’이 되기로 했다. 왜 우리는 양육자로도, 직업인으로도 사는 게 어려운지, 왜 우리는 늘 정신적으로 벼랑 끝에 서야 하는지, 함께 물어볼 사람들이 생겨 묻기로 했다. 그게 우리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하마’라고 부른다. ‘정치하는엄마들’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하는’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하는 엄마’, ‘하마’라고 칭한다.
하마는 매력적이다. 우성 야행성이다(‘육퇴’를 즐기는 양육자들처럼). 잡식성이고(애 키우다보면 늘 배가 고픈 것처럼), 영역 침범에 예민하며, 아주 무시무시한 동물이다. 그게 ‘육아둥둥섬’에 표류 중인 양육자들의 현실과 왠지 비슷하다 느꼈다.
평소엔 가만히 있다가도, 빡치면 흉폭해진다는 점이 특히 그렇달까. 내가 정치하는 엄마가 된 이유는 정말 단순하다. 평범히 살고 싶어서다. 비범한 능력을 갖춘, 대단한 능력의 과학자로 살고 싶어서가 아니다. 나는 그저 엄마이길, 과학자이길 바란다. 엄마로도 살 수 있고, 직업 과학인으로도 사는 삶이 평온하길 바란다.
이런 삶이 당연해져야 왜 나에게 다른 동료들보다 더 많은 평가가 따라야 했는지, 왜 나에겐 더 많은 능력이 필요했는지 다시 질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하루 평범한 엄마, 과학자가 되고 싶다. 이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칼럼니스트 윤정인은 대학원생엄마, 취준생엄마, 백수엄마, 직장맘 등을 전전하며 엄마 과학자로 살기 위해 '정치하는엄마들'이 되었고, ESC(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에서 젠더다양성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프로불만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은 회사 다니는 유기화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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