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아이 없는 세상, '노 키즈 존' (윤정인활동가)
아이 없는 세상, ‘노 키즈 존’
- 기자명 윤정인
[비마이너X다이애나랩 기획연재] 차별 없는 가게의 조건
인간은 자신의 위치가 약자로 떨어지기 전까지는 자신이 사회적 강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살면서 단 한 순간도 내가 약자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 내가 스스로 약자일지도 모른다고 고민하기 시작한 시점은 엄마가 된 순간이었다.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나는 갈 곳을 잃어버렸다. 양육자가 된 순간, 단순한 외출에도 큰 준비가 필요했다. 아이의 욕구를 실시간으로 충족해줄 짐덩이가 점차 크고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출 시 필요한 것은 물리적 짐뿐이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죄송합니다”를 이야기할 수 있는 마음의 짐 또한 단단히 갖춰야 했다. 그러니까 내가 엄마가 된 시점, 스스로 약자임을 고민하기 시작한 시점은 스스로 위축되어 살게 된 시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양육자가 아이와 이동하려면 많은 짐이 필요하다. 유아차를 타고 가게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가게 안에 유아차가 들어갈 공간, 혹은 가게 앞에 잠시 주차할 공간이 필요하며, 유아차가 잘 굴러갈 수 있도록 인도 또한 홈이나 문턱이 없어야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근거리 이동의 얘기다. 아이를 데리고 장거리는 힘들다. 먼길을 가려면 유아차뿐 아니라 유아차도 싣고 갈 차를 몰아야 하고, 그러한 관계로 주차장이 필수다. 주차장도 넓을수록 좋다. 아이를 안전히 차에서 내리고 다시 태우려면 양육자가 차문을 활짝 열어 두 사람분의 안전거리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첫 스탭부터 험난한 여정을 거쳐 가게에 도착하면, 다음 미션이 기다리고 있다.
가게에 도착함과 동시에 양육자는 아이를 안거나 아이 손을 꼭 쥐고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대개 자기 주변의 상황을 위험하다고 인식하지 못한 채 호기심에 다가가곤 한다. 그러다 뛰어가 다치거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다. 특히나 물건이 전시된 공간에서는 아이를 안고 있는 편이 마음이 더 놓인다. 만지지 말라고 해도 아이는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혼자서 식사하지 못한다. 따라서 어른의 케어가 필요하다. 어른이 아이를 케어하기 위해서는 아이용 식탁의자나 아이용 식기가 있는 편이 용이하다. 과거와 달리 요즘 어지간한 식당은 아이용 식기와 의자를 비치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동네나 지역마다 다르다. 가령 내가 사는 신도시는 아이를 둔 젊은 부부가 많이 산다. 그러니 어느 식당을 가든 어린이 메뉴가 있고, 아이 의자, 식기 등이 대부분 갖춰져 있다. 그러나 바로 옆 도시만 나가도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기가 제한되는 가게가 종종 있다. 불을 사용하는 음식점들이 그러하다. 거절의 이유도 다양하다. 대개 ‘미성년자 출입 금지’라며 제한한다. 그럴 때는 좀 난처하다. 차라리 가게 측에서 (주어가 생략된) ‘안전의 문제’로 출입을 제한한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다. ‘아이가 다칠까 봐 모두 우려해서’라고 가게의 입장을 설명하기 용이해서다. 그저 “어려서 불가하다”는 말은 아이를 이해시키기 충분하지 않다.
그 외에도 양육자들이 외출하며 겪는 불편함은 다양하다. 특히 화장실 출입 문제가 그렇다. 가장 난감한 상황은 자녀와 성별이 다를 때다. 일곱 살 아이도 혼자서는 용변처리를 잘 못한다. 발달상 그런 생활 속 행동들을 이제 막 배워나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를 혼자 화장실에 덜렁 보내는 것은 마음이 참 불안하다. 최근 이러한 대안으로 나온 것이 바로 ‘가족형 화장실’인데, 안타깝게도 그 수가 적다.
화장실의 불편함이 가장 극대화되는 때는 아이가 기저귀를 차는 시기다. 기저귀 찬 아이를 데리고 외출할 때 양육자는 아이에게 분유 먹일 곳과 기저귀 교체할 곳을 미리 찾아 확인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양육자가 외출 시 접하는 가장 깨끗하고 편의시설을 갖춘 화장실은 대개 고속도로 휴게소나 백화점, 대형마트 등 동네가 아니라 번화가에 존재한다. 지하철의 경우 많은 역사에 수유실과 기저귀 교환대가 존재하는데 흥미롭게도 수유실은 ‘엄마’만 출입이 가능하고, 기저귀 교환대도 ‘여성 화장실’에만 설치되어 있다. 양육자의 성별이 남성일 가능성부터 이미 배제된 셈이다. 아이와 함께 백화점으로만 외출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유아 휴게실에 남성이 출입할 수 있게 배치된 곳이 백화점뿐이었기 때문이다.
몸이 힘든 것은 차라리 낫다. 아이와 다니는 일은 정신적으로 피곤하다. 특히 타인의 시선에 내가 개념 없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가장 힘들다. 아이가 떨어뜨린 물건을 치우고, 아이가 흘린 음식을 닦고, 아이가 시끄러울까 저어되어 부모는 늘 긴장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가게를 이용한다기보다 그곳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바짝 긴장하다 쫓기듯 나올 때가 많았다. 식사를 식사답게 하고, 카페에서 조금 느긋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된 것은 아이가 취학연령이 다 되어서였다.
항상 난감한 일의 연속이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이 출입할 수 없는 곳들, 아이 눈높이에 맞지 않는 물건들, 그런 물건을 만지려 움직일 때 혹여 사고가 날까 아이를 잡고 있어야 하는 양육자. 아이는 잘못했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잡지 않으면 기억을 못 한다. 그런데 아이를 길에서 훈육해도, 그냥 두어도, 가만히 앉혀 두기 위해 핸드폰 콘텐츠를 사용해도 ‘개념 없는 부모’가 된다. 노 키즈 존은 이런 ‘개념 없는 부모' 때문에 생겼다고 한다. 양육자와 아이 모두 출구 없는 혐오의 원 안에 갇힌다.
노 키즈 존은 말 그대로 가게가 아이를 거부하는 것이다. 어차피 통제되지 않을 존재에게 오지 말라 선을 긋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수자를 배제의 대상으로 분류해 시야 밖으로 내모는 손쉬운 방편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한때 아이였다. 통제가 되지 않았고, 뛰어다녔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였던 우리는 어른과 동행할 때 가지 못할 곳들이 없었다. 그렇게 어른들과 다니면서 공공장소에서 지켜야 할 예절을 배울 수 있었다. 다른 어른들에게 혼이 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아이들은 아예 입장부터 거부당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이 사회적 경험을 통해 응당 누려야 할 기회들을 우리 편의를 위해 박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공공장소에서 까불다가 혼쭐이 난 기억이 아니라, 가보지 못한 곳들을 더 기억하게 될까 우려된다. 누군가 쉽게 거부할 수 있고, 배제할 수 있음을 먼저 배워, 훗날 자신들이 경험했듯 다른 누군가를 쉽게 거부하고 배제하게 될까 두렵다. “고작 이 정도쯤이야”라고 생각하는 거부와 거절들이 사회적 혐오로 번질 수 있다. 지금은 약자인 아이들이 언젠가 우리와 같은 어른이 되었을 때, 노인이 되어 사회의 중심에서 멀어진 우리에게 반대로 거부를 행사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모든 경험은 상대적인 것일 테니 말이다. 굳이 ‘기브 앤 테이크’의 사회계약에 호소하고 싶지 않다. ‘노 키즈 존’은 ‘아이 없는 세상’과도 같다. 그들의 존재를 지울 때 우리의 존재 역시 위협받는다. 우리가 소수자인 아이들을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대한다면, 아이들도 그러한 상식 속에서 차별을 경계할 것이다. 사소한 대물림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 바로 지금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몫이 아닐까.
출처: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42
필자 소개 윤정인. 칼럼니스트. 대학원생 엄마, 취준생 엄마, 백수 엄마, 직장맘 등을 전전하며 엄마 과학자로 살기 위해 '정치하는엄마들'이 되었고,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에서 젠더다양성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프로불만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은 회사 다니는 유기화학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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