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애 낳으면 '무료'... 보기 좋은 정책 뒤에 숨겨진 뜻
▲ 세계여성의 날인 지난 3월 8일, 정치하는 엄마들과 페미니즘당 창당모임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대 앞에서 '여성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기자회견과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 이희훈
2021년 3월 8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정치하는 엄마들'과 '페미니즘당'의 공동 기자회견이었다. 드러누운 사람들의 옷에는 저마다 글자가 하나씩 쓰여 있었는데, 그 글자를 조합해 보면 이런 단어가 나왔다. '출·생·률', '자·살·률'. 누워 있는 이들 뒤에는 거대한 현수막이 펼쳐져 있었다. "대통령님 출생률 말고 자살률을 보십시오", 비혼과 비출산을 선언하는 여성들과 20대 여성 자살률이 폭증하고 있던 시기였다.
"우리는 셀 수 있는 '인구'이기 전에 살려야 할 '인간'임을 잊지 말라."
기자회견 중간, 마이크를 잡은 정치하는 엄마들 김정덕 공동대표가 외쳤다. '인간'이 '인구'가 되는 세상은 단순한 비유를 넘어 많은 것들을 함의했다. 더 많은 '인구(출생률)'에 집착하다가 출산이 '인간(여성)'의 문제임이 도외시되었다. 출산 행위는 유난스럽게 칭송되었지만, 막상 출산 후 여성이 겪는 문제들은 쉽게 이야기되지 않았다. 성별임금격차와 경력단절, 임신과 출산 이후의 몸의 고통, 출산 후 우울증을 겪는 여성들, '맘충'으로 상징되는 어린이와 여성들에 대한 혐오 등.
가정폭력과 데이트폭력은 여성들이 실제로 연애와 결혼, 출산을 선택하지 않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내 살해와 자신과 교제하던 여성을 살해하는 남성에 대한 기사가 연일 보도되지만, 9월 5일자 한겨레 기사(Not Found, 가장 가까이 있어도 셀 수 없는 '0촌 살인')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아내 살인에 대한 통계조차 없다.
축복 속에 태어난 아이도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8월 중순, 공식 SNS 계정에 "초등학생 사이에서 민식이법 놀이가 유행?"이라는 말이 담긴 게시물을 올렸다. 교통사고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어린이들을 '법을 악용하는' 대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행정안전부도 비슷한 게시물을 올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노키즈존의 문제도, 매번 반짝 논란이 되지만 예산 증액은 이루어지지 않는 아동학대에 대한 문제도 비슷하다. 태어남은 소중하지만, 그 이후에 일어나야 하는 성장은 무시되었고, 사회는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낯선 객체로서 마주했다.
그런데 얼마 전 '인구'와 '인간'을 바꿔치기하는 정책이 곧 현실화된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2년 전인 2019년 5월, 충남도에서 내놓은 '충남형 더 행복한 주택'의 청약이 곧 시작된다는 내용이었다. 충남형 더 행복한 주택은 입주 후 자녀를 한 명 낳으면 임대료의 절반을 깎아주고, 두 명을 낳으면 전액 면제해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정책은 '두 자녀 무료 아파트'로 불리고 있는데, '무료 아파트'라는 보기 좋은 정책 이름 속에 숨어 있는 말은 다음과 같다.
'억울하면 애 낳아라.'
출산의 대가 = 집?
▲ 충청남도가 시행중인 행복주택 사업. ⓒ 충청남도 더 행복한 주택 홈페이지
충남도지사는 해당 정책에 공급되는 행복 주택 이름을 꿈꾸다의 '꿈', 빛나다의 '빛', 사랑채의 '채'를 합성하여 '충남 꿈비채'로 지었다고 말했다. 주거 불안으로 결혼과 출산을 주저하는 청년과 신혼부부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정책이라는 것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거나 양육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다양한 사회 보조 정책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그 사회 보조 정책이 시민의 선택권을 늘려나간다는 취지가 아니라 이미 한 가지의 선택이 다른 선택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 하에 이루어진다면 조금 곤란하다. 아이를 낳을 권리가 있어야 한다면, 그 반대편에 아이를 낳지 않을 권리도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이들에게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아이를 낳는 것이 다른 선택지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하에 구성된 정책은 '인간'을 '인구'로 치환할 뿐 전체 국민의 삶을 나아지게 만들지 못한다. 그러한 정책은 국민의 재생산권에 대한 선택지를 늘리는 것 대신, 재생산권을 국가가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태어남' 이후의 '자라남'도, 여성이 겪는 다양한 차별과 폭력도 조명하지 않는 정책은 인간을 숫자로만 조명한다.
더군다나 출산의 대가가 '집'으로 제시되었다. 우리가 사는 곳은 내 집 마련은커녕 2년짜리 전세방 하나 구하는 것도 어려워지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이 때, 두 자녀 출산 시 10년 동안 살 수 있는 주택의 임대료를 무상으로 해주겠다는 정책은 출산을 '성과'로 바라보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심지어 그 정책이 이미 두 자녀를 양육하고 있다가 행복주택에 입주한 집에는 적용되지 않고, 입주 후 두 자녀를 출산하는 조건으로만 부여된다면 더더욱 그렇다. 입주 후 태어난 아이의 숫자로 '실적화'할 수 있는 기준을 충남도가 선택했다는 것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는 것이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사회 인식을 강화하는 것은 덤이다.
다르면서도 같은 두 가지 사례
여성의 임신과 출산 등 재생산권을 통제하기 위한 시도는 예전부터 이어져왔다. "셋 부터는 부끄럽습니다", "둘도 많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라는 표현들로 요약되는 '산아제한정책'이 대표적이다. 시대 흐름에 따라 바뀌는 '출산 정책'에 따라 여성의 출산은 장려되기도, 억제되기도 했다.
인공임신중지에 대한 내용도 마찬가지다. 출생률 저하로 인해 지금은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말로 인공임신중지를 금지하거나 낙인을 찍으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분명 한국 역사 속에는 정부가 '낙태 버스'를 운영하여 인공임신중지를 장려했던 시기도 있다. 소록도에서는 한센인들에 대해 강제 인공임신중지 수술이 진행되기도 했다.
▲ '2021 가족사업안내 책자'에 포함되어 있는 서식
재생산권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통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정부가 펴낸 '2021년 가족사업안내 책자(Ⅱ)'에 포함된 '다문화가족 국민주택 특별공급 신청자용' 서식 중 하나인 '임신증명 및 출산이행 확인각서'는 충남도의 주택 정책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다(이 서식은 '다자녀가구 및 노부모부양주택 특별공급 운용지침', '신혼부부 주택 특별공급 운용지침' 등에도 별지로 포함돼 있다).
"성실하게 출산을 이행할 것을 약속합니다", "허위임신·불법낙태"라는 말에는 재생산권이 여성의 권리로서 보장되어야 한다는 상식이 깃들어 있지 않다. 심지어 2020년 12월 31일 '낙태죄'가 형법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낙태가 불법이 아니란 사실도 누락돼 있다.
주택 가산점을 받기 위해 임신을 하고, 그 후에 낙태를 하는 여성이 있을 수 있다는 사고를 기반으로 출산 '확약서'를 받는 것은 인공임신중지라는 여성의 선택에 죄책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임신도, 출산도, 임신의 중지도 모두 여성 개인의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전 생애적인 고민 끝에 내리는 결정이며, 어떠한 누구도 이익을 위해 임신을 했다가 다시 인공임신중지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국가 기관에서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다.
'각서'를 통해 정부는 누구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가? 정부는 '혜택'을 이용해 어떤 관점을 강요하고 있는가? 두 가지 사례는 서로 다르지만 사실은 완전히 같기도 하다.
우리는 아기 캐리어가 아니다
2019년, 트위터 계정 '임신일기'를 운영했던 송해나씨는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라는 책을 썼다. 출산 행위와 탄생을 축복하는 사회 뒷면에 놓여 있는 잔인한 여성의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 책에 이런 말을 썼다.
"임신과 출산, 산후 회복을 위한 몸조리, 양육까지 긴 과정을 경험하면서 한국에서 이 모든 것이 개인의 몫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임신과 출산, 인공임신중지, 보조 생식기술의 사용, 육아 등의 문제를 '자유롭게' 선택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더 많은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 여성에 대한 불평등과 모욕을 동시에 해결해야만 이 모든 것이 '선택'의 영역 속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보조 정책이 '출산'이라는 하나의 결정만을 옳은 것으로 사고하고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강요일 뿐 보조가 되지는 못한다.
송해나씨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아기 캐리어가 아니다. '인구'가 아닌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각서'도 '혜택'도 모두 거절한다. 집보다는 자유가 더 나은 까닭이다.
▼원문보기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772438&SRS_CD=000001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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