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오늘을 생각한다] 선을 넘은 선의_장하나 활동가
[오늘을 생각한다] 선을 넘은 선의
지난 6월에 일어난 대전 아동성학대 사망사건의 가해자 신상공개 여론이 뜨겁다. 가해자에 대한 사형선고, 사형집행 여론도 일고 있지만 정치권은 잠잠하다. 8개월 전에 ‘#정인아미안해’라며 SNS를 도배하던 정치인들은 다 어디 갔나? 대통령도, 보건복지부 장관도, 국회의원들도 또다시 벌어진 참혹한 아동학대 성범죄 앞에 일언반구 없다. 사실 서울 양천구 아동학대 사망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2020년 10월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는 정치권이 반응하지 않았다. 올해 1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양천사건을 보도하면서 피해아동의 사진 등 인적사항과 범죄사실을 낱낱이 공개하고 국민 여론이 들끓자, 그제야 국회는 피해아동 이름을 딴 법안을 쏟아냈고 정부는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방송을 통한 피해아동 신상공개는 아동학대처벌법 위반이지만, 아동학대 사망사건이 그토록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나는 SBS가 저지른 범죄에 입을 다물었다.
대전사건 피해아동의 사진과 인적사항이 벌써 인터넷상에 떠돌고 있다. 출처는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라는 단체다. 아동학대의 경우 비밀엄수 의무자는 수사관계자, 신문사·방송사·출판사 등 언론매체 관계자, 피해아동이 다니는 교육·보육기관 등 종사자에 한정된다. 반면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의 경우 청소년성보호법 제31조 제3항에 따라 ‘누구든지’ 피해아동·청소년의 사진 등 인적사항을 인쇄물·방송·정보통신망에 공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난 8월 27일 첫 공판 때 학대·성범죄 내용이 언론에 보도됐다. 보건복지부 ‘아동학대 사건 보도 권고 기준’에는 학대방법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재연은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고 돼 있지만, 준수하는 언론사는 거의 없다. 보도를 통해 드러난 범죄사실과 인터넷에 유포된 피해아동의 사진이 결합해 가공할 인권침해, 2차 가해가 벌어지고 말았다.
피해아동이 사망했는데 침해당할 인권이 어딨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무덤에 침을 뱉어도 되는가? 사자명예훼손죄의 보호법익은 사자 자신의 명예라고 보는 게 통설이다. 사자는 인격자가 아니므로 법익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소수설도 있지만, 사자도 역사적인 존재로서 명예의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SBS, 대한아동방지협회, 네티즌들이 가진 선의를 안다. 피해아동의 유족이 없거나 유족이 가해자인 경우, 피해아동의 가족이 돼주고 싶고 가해자를 단죄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진짜’ 가족이라면, 내 딸이었다면 딸의 사진과 딸이 당한 학대·성학대의 내용을 공개하고 유포했을까? 오는 10월 9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대전사건을 보도할 예정이다. SBS가 성범죄 피해아동의 사진을 방송에 내보내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피해자 신상공개인지 양심적으로 자문해보라. 선의를 가지고 선을 넘을 때 악의는 조금도 없었는지 돌이켜보라.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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