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 다시 꿈의 노예가 되자 ❞

다시 꿈의 노예가 되자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2022.03.01 03:00 입력

 

“여러분들은 미래로 가십시오! 더 이상 울지 않고 더 이상 죽지 않는, 단결의 광장이 조합원들의 함성으로 다시 꽉 차는 그 미래로 거침없이 당당하게 가십시오!”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여덟 살 날 딸과 연달아 코로나19에 걸려 꼬박 열하루를 자가격리하던 중이었다. 작은방에 틀어박혀 일주일 넘게 먹고 자고 애니메이션 보기를 반복하다 보니, 현실과 괴리되고 감각은 둔해지고 무기력에 우울감까지 찾아왔다. ‘정치니, 선거니, 내가 마음 써 봤자 달라질 것 있나….’ 그런 쓸모없는 나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김진숙 지도위원의 갑작스러운 복직 소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확히는 복직 기사를 읽던 중에 ‘여러분은 미래로 가라’는 그의 쩌렁쩌렁한 음성이 귓전을 때리는 듯하여 깜짝 놀란 것이다. 그 소리에 나는 오랫동안 갇혀 있던 긴 잠에서 깨어났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번 대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과거로 돌아갈 수도, 과거를 바꿀 수도 없는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 전후의 시기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정치 상황을 덧없이 되뇌기만 했다. ‘그래 미래로 가자! 다시 광장에 서자! 희망의 버스를 타자!’

2011년 나 또한 한 사람의 외부세력이었다. 타인의 정리해고 문제, 군사기지 건설 문제, 재개발·강제철거 문제, 송전탑 건설 문제에 개입하는 사람들을 외부세력이라고 지칭할 때는 그들에게 불순한 의도를 가졌다는 낙인을 찍고자 함이겠으나 나는 늘 그 이름이 자랑스러웠다. 사람이 내 문제만 신경 쓰고 남의 문제는 등한시해서야 되겠는가? 연대의 정신에 입각하면 필연적으로 외부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 무한경쟁 각자도생의 시대, 넘쳐나는 혐오와 차별에 맞서려면 연대와 공존으로 인간다움을 회복해야 한다. 연대는 단지 투쟁의 수단이 아니라 ‘오징어게임’을 끝낼 새로운 질서, 투쟁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지난 주말 변희수 하사의 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1년 전 전해진 그의 부고에 많이 자책했었다. 일면식도 없었던 그였지만, 그를 너무도 지지하고 그의 행동에 정말 고마워하는 사람이 여기도 있다고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던 것이 끝내 아쉬웠다. 변 하사가 떠나기 며칠 전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었던 트랜스젠더 인권활동가 김기홍님의 부고가 있었기에 더 비참하고 암울했다.

더 이상 울지 않고, 죽지 않는 미래는 대체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일까? 그것이 모든 차별이 해소되는 날이라면 아주 먼 미래다. 하지만 광장을 함성으로 채우는 그날이라면 얼마든지 앞당길 수 있다. 그 또한 쉬운 목표는 아니지만, 실현 불가능한 꿈도 아니다. 연대로 모든 죽음을 막을 순 없지만, 그래도 연대에는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다고 나는 믿어 왔다.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때, 살아갈 힘이 생길 거라는 믿음이다.

하마터면 정치판에 질려서 정치를 외면할 뻔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도 정치를 외면하거나 등한시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생존을 위해,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정치투쟁을 펼치는 사람들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와 차별금지법제정연대(차제연)는 내가 길을 잃고 염세에 빠져드는 동안에도 대정부 투쟁, 대국회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언론의 절반은 코로나19 관련 보도, 나머지 절반은 정치 공방으로 채워져 시민운동이 시민에게 목소리를 전달할 마이크를 상실한 지 오래다. 거리 두기 때문에 우리끼리 결속하기도 어려운 데다가, 늘 하던 기자회견이나 퍼포먼스로는 우리의 주장이 이슈화되지도 않아서 나는 지레 의욕을 잃었던 거다. 회원의 회비로 급여를 받는 비영리민간단체의 상근활동가로서 진짜 부끄럽다. 외부세력 노릇에 소홀했던 점도 반성한다. 그래서 김진숙 동지의 외침이 주저앉은 나를 향한 일침처럼 그토록 따갑게 들렸나 보다. ‘미래로 가세요! 멈춰 서 있지 말고 움직이세요. 지금!’

나는 내 직업이 공익활동가라는 사실에 자부심이 크다. 세상은 이름난 정치인들이 아니라 나 같은 이름 없는 활동가들, 연대자들이 바꿔 왔다고 믿는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상상한다. 여성도 투표해야 한다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놓은 첫 사람들을, 동성인 부부도 결혼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을 세상에 펼친 첫 사람들을, 세상은 그들을 미쳤다고 말하고 그들의 육신을 짓밟아 놓았을 것이다. 난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이제 상식이 되고 일상이 되었다. 나도 그런 사람들을 닮고 싶다. 다시 꿈의 노예가 되련다. 비호감 대선 따위 아랑곳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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