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플랫] 엄마반란
엄마반란
2023.01.09 10:49 입력 2023.01.09 11:00 수정
내가 저분을 지키려 했다니. 지금 내 눈앞에 펼치어 계신 분, 그분의 털끝조차 너무 거대해서 한눈에 담기는 법이 없는, 저 바다. 그리고 저분마저 품고 계신 어머니, 지구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부처님 손바닥이란 말이 딱 알맞을 뿐이지만, 초등학교 1학년인 우리 집 어린이도 학교에서 ‘지구를 지키자’라고 배워 온다. 누가 누굴, 지키긴 뭘 지킨단 말인가! 쇠파리(소의 피를 빨고 거기에 산란하여 그 애벌레는 소의 피하에 기생)가 소를 지킨단 말보다 더 우습다.
서귀포 문섬. 게티이미지뱅크
정동칼럼 마지막 원고를 쓰기 위해 바다가 보이는 카페(해안도로를 따라 카페와 편의점이 부지기수로 있는 내 고향 제주)에 자리를 잡고 앉은 순간 돈오했다. 마흔여섯 해를 살아오며 광활한 수평선을 수천 번은 보았는데, 오늘 느닷없이 바다를 지키고 지구를 지키겠다는 나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우스운지를 깨달았다. 이처럼 ‘만물의 영장’스러운 인식체계부터 전환하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거란 사실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어린이들을 앞장세운 채 절벽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쓸데없는 희망은 당장 버리자. 이건 결코 내리막길이 아니라 천 길 낭떠러지다. 내가 내 딸의 조그만 등을 떠밀고 있다. 작년 11월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회의(COP27) 정상회의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우리는 가속 페달을 밟은 채 기후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We are on a highway to climate hell with our foot still on the accelerator)”라고 말했다. 작년 6월부터 시작된 홍수 사태로 국토 3분의 1이 물에 잠긴 파키스탄은 COP27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보상을 요구했고, 유엔은 전 세계가 힘을 모아 지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대한민국은 같은 달 저먼워치 등 독일의 기후연구단체가 발표한 ‘2023 기후변화대응지수(CCPI, Climate Change Performance Index 2023)’에서 60개국 중 57위를 차지하면서 기후 악당 국가임을 재인증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COP27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작년 12월에 열린 제15차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총회(COP15) 개막식에서 “인류는 대량 멸종의 무기가 되었으며 각국 정부는 ‘파멸의 난교(섹스 파티)’를 종식해야 한다(Humanity has become a weapon of mass extinction and governments must end the ‘orgy of destruction’”라고까지 말했다. 그의 표현이 과격한 게 아니라 우리가 극악무도한 상황에 부닥친 것인데, 대체 누가 뭐라고 이야기해야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일지 새해를 맞는 직업 활동가의 머릿속은 새하얗다.
멸종 반란
멸종 반란 운동가들이 지난해 10월9일(현지시간) 호주 멜버른에 있는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에 전시된 피카소 명화 ‘한국에서의 학살’에 접착제를 바른 손을 붙이는 시위를 벌였다. 로이터연합뉴스
작년 10월 멸종반란(Extinction Rebellion·XR) 활동가들은 호주 멜버른의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에 전시된 피카소의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에 접착제를 바른 손을 붙이는 시위를 했다. 11월에는 런던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에 토마토 수프를 뿌렸고, 12월에는 오스트리아의 기후운동가들이 빈에 소재한 레오폴트 박물관에 전시된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죽음과 삶>에 검은 페인트를 뿌렸다. 이 기사들을 보면서 나는 ‘오죽했으면’ 하고 감정을 이입했지만, 세상은 이들을 테러리스트 취급했다.
지난 12월31일 XR은 홈페이지를 통해서 대중들의 지지를 얻는 방식의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으나, 지켜볼 일이다. 사람들은 암 발병률이 높아진다고 해도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그러나 기후 문제는 내가 술을 마시면 딸이 ‘반드시’ 암에 걸리는 상황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암 발병률 같은 확률 게임이 아니라, 수천의 과학자들이 25년 이상 연구한 결과대로 지금 이대로 간다면 우리의 직계 후손들은 더위와 추위, 온갖 기후재앙과 부딪쳐 싸울 것이고 대다수는 질 것이다. 싸움이라는 표현조차 어불성설이지, 지구는 우리가 지키고 말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듯이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어쩔 건데? 나 자신에게 물었다. 일단 박물관 근처에서 뭘 할 생각은 없다. 내가 경향신문 대표라면 1년 365일 1면에 기후 기사를 실을 테지만, 난 정치하는엄마들 사무국장이니까. CCPI 꼴찌답게 신규 석탄발전소를 짓고 있는 한국, 공정률 70%를 넘긴 포스코의 자회사 삼척블루파워(블루 같은 소리하네)를 막으려 한다. 얼마나 힘든 싸움인지 잘 안다. 그런데 딸을 포기하는 엄마가 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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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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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1091049021
🙋🏻♀️ 정치하는엄마들이 궁금하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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