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 몸을 횡단하는 역사와 삶의 회고록: 한국 여성 원폭 피해자들을 기리며
우리는 전쟁이 인간에게 남기는 심원한 고통에 관해 얼마나 아는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뿐 아니라 원폭 피해자와 사할린 잔류자의 인권 문제 또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배제되었다. 특히 원폭 피해는 전시 성폭력과 유사하게 몸에 직접 작용하여 성적 재생산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일종의 사회적 낙인으로 작용한다. 이에 웹진 〈결〉은 연구자 2인의 글에 원폭 피해자들의 일상을 담은 김효연의 사진 작업 ‘감각이상’을 병치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글: 오은정 X 사진: 김효연
1. 피폭의 횡단-신체성과 옹이 진 몸
김정순 씨는 1944년 규슈의 아키이케 탄광에 징용공으로 일하던 남편 주석문이 모범 광부로 선발되어 가족을 초청하면서 도일(度日)했다. 첫 아이 명순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945년 8월 9일, 김 씨가 나가사키역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남짓. 나가사키에 살고 있던 사촌 동생이 쌀을 마련해 준다고 하여 나선 길이었다. 아이를 등에 업고 역을 나선 순간 하늘에서 번쩍 섬광이 비추었다. 어디선가 불덩이가 달려든 것 같은 순간 정신을 잃었다.
남편 주 씨가 아내를 찾은 것은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난 후였다. 나가사키에 신형 폭탄이 떨어져 수만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과 자녀를 찾기 위해 나가사키 구석구석의 수용소, 시체 더미, 병원 등을 헤맨 끝이었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너무나 많았고, 중화상으로 부은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김 씨와 같이 일시 방문한 조선인들은 신원 파악조차 어려웠다. 대혼란 상황 속에서 드디어 마주한 부인의 왼쪽 눈에는 안대가 씌워져 있었다. 원폭 폭발 당시 튀어 나간 눈알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 이후로도 찾지 못했다.
등에 업혀 있던 아이는 다행히 큰 상처가 없는 듯했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조선으로 돌아와서 처음 낳은 사내아이는 낳은 지 몇 분 만에 약간의 경련을 보이더니 곧 숨을 거두었다. 뼈도 없고 살도 아닌 물렁대기만 한 어린 것은 사람이라기보다 흐느적대는 물체였다.”1 다음으로 낳은 사내아이는 다행히 죽지 않았지만 평생 빈혈을 달고 살았다. 만성 피로와 약한 체력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하는 데 곤란을 겪어 일용직 노동을 전전했다. 셋째 사내아이는 보통의 아이보다 반골밖에 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났는데 1·4 후퇴 때 열병을 앓다가 한 살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딸로는 둘째인 명자가 막내로 태어났다. 항상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가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972년 6월에 사망했다. 형편이 어려워 병원 검진 한 번 받아보지 못했다. 징용공 당시 탄광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 평생 구부정하게 다니면서도 가족을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던 남편이 시름시름 앓으며 여위어 간 것도 그즈음이었다. 척추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한 달이 되지 않은 1972년 9월에 딸 명자의 뒤를 이었다. 피폭 당시에는 큰 상처가 없었던 것 같은 큰딸 명순은 10대 후반이 되면서 점점 빛을 보기 어려워했고, 어둠 속에서 나오지 않으려 했다. 다락방에서의 삶이 지속되었다.
나가사키 원자폭탄 폭발 당시 노출되었던 방사선은 김정순 씨가 일본을 떠나 조선으로 돌아와서도, 자녀를 낳아 기르는 동안에도 그의 몸속에서 많은 것들을 변형시키고 있었다. 빈도 높은 유산과 사산, 기형아 출산, 빈혈, 갑상선암이나 혈액암을 비롯한 각종 암, 위장병, 만성 피로, 체력 저하는 방사선에 피폭된 이들이 흔히 경험하는 만발성 후유증의 일부다. 방사선에 노출된 인체의 각 세포 속 유전자는 돌연변이를 일으키는데 그 정도에 따라 회복되는 시기도 증상도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일공동연구기관인 방사성영향연구소(RERF)의 연구에 따르면 백혈병, 유방암, 폐암, 위암, 결장암, 다발성골수종 등이 방사선량과의 상관관계가 인정되었다. 이외에도 고혈압, 척추질환, 백내장 등과 같은 질환이 대표적인 피폭 후장해에 속한다. 후장해는 평생 진행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신체를 횡단하는 방사선에의 노출 영향은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짧은 순간이나 그것이 폭발한 폭심지 부근의 장소에 머물렀던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원자폭탄 폭발 이후 다양한 종류의 잔류방사선은 인체에 여러 세포의 재생산에 작용한다. 폭발 당시에 폭심지 근처 4~5km 정도 이내에 머무르며 원폭의 영향을 받은 사람 이외에도, 폭발 이후 2주 이내에 구호나 가족 수색 등을 위해 이 지역들에 들어간 사람들(입시피폭자), 원거리에 피난 온 피폭자들을 간호했던 사람들(구호피폭자), 그리고 피폭자의 몸속에 있었던 태아들(태아피폭자)의 몸에서도 방사선 노출은 중요한 작용을 한다. 남편 주 씨가 아내를 찾기 위해 나가사키 시내를 10여 일 동안 돌아다닐 때 엄청난 양의 잔류방사선에 노출되었고 그의 몸에도 방사성 물질이 쌓였다.
신체의 세포 조직에 한번 들어온 방사성 물질은 피폭자들의 몸을 횡단하고 장기 지속한다. 광산에서 추출되어 정제되고 폭발하여 투과하는 방사성 원소의 횡단-신체적 물질성은 피폭자의 몸속에서 “위태롭고, 우발적이며, 우연적이고, 불확실하며, 고분분투하는 역동적인 삶의 회고록”2을 써 내려갔다. 원폭 피해자의 자녀들이 모두 후유증을 겪는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피폭자 2세들이 만성 피로나 체력 저하 등 면역계 증상을 경험한다는 사실도 부정하기 어렵다. 신체를 횡단하는 방사성 원소는 피폭자의 몸에 원폭을 기록하고, 역사를 기억하게 하며, 삶의 옹이를 만들어냈다.
김효연, 감각이상 005, 2018 ⓒ김효연
2. 민족/국가, 장애, 가족, 그리고 여성이라는 굴레
방사성 물질에 노출된 몸은 단지 하나의 생물학적 신체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크게는 20세기 초의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적인 아시아 확장과 전쟁 그리고 강제동원과 이주를 통해 삶을 개척해야 했던 피식민 조선인들의 신산한 삶을 기록하는 것이자, 인류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무기로서 핵 개발의 역사를 상호 연결한다. 또한, 이들의 몸을 횡단하는 방사성 물질은 이들의 몸속 세포만을 변형시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딸이자 아내, 그리고 엄마로서의 삶을 요구받는 여성들의 삶을 굴절시켰다. 한국 여성 원폭 피해자의 생애사의 많은 부분은 그들의 신체에 갊아 있는 민족과 국가, 원폭증 장애, 그리고 가족과 여성이라는 굴레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엄마, 엄마는 왜 유명해졌지? 그놈의 원자탄이라고? 원자탄을 맞은 사람이 한국에서 엄마 한 사람이야? 그게 어느 세월인데 이제 와서 엄마 혼자 유명해졌느냐 말이야?” 저는 압니다. 자식들의 눈 속에서 일고 있는 그 숱한 힐문(詰問),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하면서 엄마 역시 거지꼴로 찌든 주제에 이름 석자는 무슨 이유로 떠벌여 가지고······. 그 혐오와 원망에 찬 항변을······저는 뼈아프게 압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이렇게 내친 걸음으로 입을 떼고 있는지 모릅니다.
-박수복,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 182쪽. 손귀달의 「저는 罪人이 아닙니다」 중에서.
1930년 4월 22일, 일본 오사카시에서 태어난 손귀달 씨는 열세 살에 부모님을 따라 히로시마시로 이사를 갔다. 히로시마시립제2고등여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열여섯 살 여름.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전황이 기울대로 기울어진 상황에서도 학도 동원이 이어졌고, 손귀달 씨는 학교가 아닌 미쓰비시조선소 히로시마 공장으로 매일 출근해야 했다. 1945년 8월 6일 아침, 원자폭탄 폭발과 함께 공장의 유리가 깨지며 날아든 파편에 이마에 큰 부상을 입었다. 피폭 당시 나이 47세로 히로시마 체신국에서 기술직원으로 일하던 손 씨의 아버지가 중상을 입어 3년 후 사망하였고, 히로시마시청 앞에서 전신선을 까는 작업을 하는 인부를 관리 감독하던 오빠 손진두도 왼쪽 허벅지에 큰 중상과 화상을 입었다.
해방 이후 고향인 경상남도 사천으로 돌아온 손 씨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그해 이른 봄 사천에서 순경을 하던 한 사내와 중매로 결혼을 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없는 집안 형편에 밥숟가락이라도 하나 덜자는 심정으로 서두른 결혼 생활이 파탄 난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혼 2년 만에 첫 아이를 사산하고, 둘째 아이가 태어난 이후 손 씨의 몸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고, 의사는 원폭의 후유증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손 씨의 남편은 원폭 피해자임을 숨기고 사기를 쳤다며 결혼 생활을 끝내고 싶어 했다. 이 사실이 친정까지 알려지면서 오빠인 손진두 씨 또한 부인과 헤어지게 되었다. 손 씨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아들과 조카(손진두 씨의 아들)를 데리고 부산으로 홀로 나와 생계를 꾸려나가야만 했다.
해방 이후 조선으로 귀환하여 다시 전쟁의 참화를 겪은 한국의 원폭 피해자들에게는 원폭으로 인한 각종 질환들을 치료할 길이 없었다. 원폭증의 장애를 안고 행상 일로 근근이 돈을 벌던 손 씨가 일본에서 원폭증을 치료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은 1965년 한일회담 전후였다. 한국 원폭 피해자들 사이에서 구호협회를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었고, 부산에서는 엄분연, 손귀달 등 여러 여성 원폭 피해자들이 전단지를 붙여가며 회원들을 모아 나갔다.
1968년 9월 손귀달 씨는 일본에서 원폭증 치료를 받기 위해 행상을 해서 번 돈 5만원(당시에 부산에서 전셋집을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고 한다)을 내고 밀입국을 시도한다. 밀선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작은 통통배 수준으로 그 배에 의지해서 일본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일본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원폭증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이 아니라 경찰서였다. 한국 원폭 피해자의 존재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손귀달 씨의 밀항과 체포는 일본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손귀달 씨는 밀항 직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당시 일본 시민사회의 도움으로 송환 조치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일본 시민사회에 한국 원폭 피해자의 존재를 각인시킨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 그의 오빠였던 손진두 씨는 손귀달 씨와는 달리 일본 시민사회와의 연대 속에서 계획에 따라 밀항과 체포 그리고 구금을 ‘재한 피폭자 구호’라는 일본 시민사회의 운동 차원으로 전환시켰다. 손진두 씨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원폭피폭자건강수첩 발급 소송은 한국 원폭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재외피폭자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인용된다.
손귀달 씨의 이야기는 1984년 당시 미국 메릴랜드대학의 교수(예술철학박사)였던 한국인 홍가이(영문 이름 Kai Hong) 씨의 영어로 쓴 희곡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일본에 있다가 귀국한 한국 여성인 영주의 비극적 삶을 통해 전쟁의 책임과 반핵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주인공 영주의 일본 밀항과 이 사건이 한일 양국에서 정치외교적 문제로 비화되거나 한일의 좌익계열 운동단체의 반정부 시위 구실이 되지 않도록 수습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현해탄아, 현해탄아 / 우리 영주가 세 번째로 현해탄을 건너는구나
이번엔 다정히 대하지 않을 테냐 / 현해탄아, 현해탄아
너를 건널 때마다 비극이 우릴 기다렸다 / 세 번째엔 우리 영주를 즐겁게 맞아 다오
현해탄아, 넌 우리에게 빚이 있다 / 현해탄아, 현해탄아 / 부당한 현해탄아
넌 우리에게 빚이 있다 / 넌 우리에게 빚이 있다
-희곡 〈I am a Hibakusha〉 중에서
밀입국과 강제송환 이후 손귀달 씨의 삶이 순탄치 않은 것은 자명했다. 그는 이후에도 마약 밀매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투옥되는가 하면, 후원을 받기 위해 원폭 피해자라는 상징을 앞세운다거나 일본의 좌파 운동가들과 연결된 ‘빨갱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손 씨는 “내친 걸음으로 입을 떼”었다.
김효연, 감각이상 019, 2018 ⓒ김효연
3. 뚫고 나온 목소리, 공명하는 마음들
사단법인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 부산지부장 엄분연 등 회원 10명은 1일 오전 11시 대통령취임식에 참석하러온 일본 사토 에이사쿠 수상을 만나 피해환자들을 위한 의료시설, 생활대책, 자녀들의 교육대책 등을 세워달라는 호소문을 전달키위해 주한일본대사관으로 몰려갔다가 종로서로 연행됐다. (1971년 7월 2일, 동아일보)
여기 하나의 짧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기사에는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 부산지부라는 이름으로 나오긴 했지만 사실 원폭협회의 주요 간부들이 참여하지 않은 이 요망서 전달 시도는 부산에 거주하던 여성 원폭 피해자 엄분연, 손귀달 등이 감행한 것이었다. 당시 나이 마흔 전후의 중년 여성 원폭 피해자들이 경호도 가장 삼엄했을 대통령 취임식이라는 날을 잡아 광화문 한쪽에 자리 잡은 일본대사관 앞에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중앙 간부진의 지원도 받지 않은 채 국빈으로 방문한 일본 수상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신문 지면을 통해 짧은 단신 기사로 기록을 남긴 위 사건은 일본 누노가와(布川徹郎) 감독의 다큐멘터리 『倭奴へ』(한글 제목: 왜놈에게)라는 53분짜리 영상 속에서 보다 생생하게 그려진다. 부산의 한 언덕배기 좁다란 골목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허름한 판잣집들과 헐벗은 달동네 아이들의 모습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목소리의 일본 여성이 흡사 여행 가이드처럼 내레이션을 읊는 이 영상은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카메라는 사토 일본 수상에게 재한 원폭 피해자에 대한 원호를 바라는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서울을 다녀오는 한국 여성 원폭 피해자들을 따라다닌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경찰차에 호송되어 종로서로 향하는 모습, 작은 사무실에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을 전면에 걸어놓고 사무를 보고 있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서울 사무실의 모습도 비친다.
연구자가 이제는 할머니가 된 이 영상 속의 세 중년 여성을 만난 건 2008년과 2011년이었다. 그들은 영상에 대해 이야기하자, “시위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잡혀간 것”이 아니라 시위는 당연히 못 할 것이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오히려 “잡혀가야 뉴스가 된다”고 생각해 그렇게 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국교 정상화 이후 처음으로 찾아온 일본의 수상에게 한국 원폭 피해자의 현실을 알리고, 원폭증의 치료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영상 속에서도 그들은 다른 원폭 피해자들에 대한 미디어 재현에서 일반적으로 비치는 수동적이고 비참한 모습이 전혀 아니었지만, 실제로 만난 이들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당차고 힘센 어조로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사실 한국 원폭 피해자 운동의 역사에서 여성 원폭 피해자의 존재는 잘 조명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귀달의 일본 밀입국 사건이나 위의 광화문 시위처럼 한국의 여성 원폭 피해자들은 시기마다 목소리를 내왔다. 그리고 여기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반전반핵’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한국원폭피해자협회와 함께 원폭 피해자 운동을 해온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활동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활동은 주로 원폭 피해자 구호를 위한 기금 마련과 홍보 등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한국 원폭 피해자 실태조사 활동이었다. 1974년 가을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의뢰와 협력으로 이뤄진 첫 번째 실태조사, 1977년 일본에서 열리는 반전반핵평화 국제심포지엄에 참여하기 위해 이뤄진 두 번째 조사, 그리고 1979년 ‘미국장로교여선교회’ 후원으로 진행된 조사까지 모두 세 번에 걸친 조사가 그것이다. 뒤의 두 차례 조사는 당시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이 결성한 동아투위가 수행하였다. 해직 기자들의 생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조사비를 지급함으로써 이들을 후원하는 일환이기도 했다. 그중 마지막 실태조사 결과는 10·26과 광주민주화항쟁 등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조사를 맡았던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으로 자료를 압수당하는 등 출간에 우여곡절을 겪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히로시마지부, 일본 히로시마시에 위치한 가와무라 병원, 재한피폭자를구원하는시민회(시민회), 재한피폭자문제시민회의 등 다양한 단체들도 한국 원폭 피해자의 권리를 요구하며 원폭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공명하며 연대했다. 이러한 연대의 흐름이 1987년 민주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23억불 보상청구운동으로 발전해갔다. 물론, 그 운동의 결과는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지만, 이는 냉전이 해체된 국제 질서와 맞물려 민주화 이후의 한국에서 일본의 전후 미처리 문제에 대한 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1990년대 일본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으로부터의 전후 보상 요구에 직면해야 했다. 민주화 이후 사할린 교포, 종군위안부, 전시노무자 그리고 일본군의 군인 및 군속 등으로 강제 연행된 사람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전쟁 피해 배상 요구 재판을 시작하는 가운데, 한국 원폭 피해자들도 다양한 소송 운동에 나서며 이 역사적 흐름에 동참하였다.
각주
1. 박수복,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 68쪽. 김정순의 「다락 속의 목숨」 중에서.
2. 스테이시 앨러이모, 2018, 『말, 살, 흙: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윤준·김종갑 역, 그린비.
참고문헌
-박수복, 1975,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 창원사.
-스테이시 앨러이모, 2018, 『말, 살, 흙: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윤준·김종갑 역, 그린비.
-오은정, 2013, 『한국 원폭피해자의 일본 히바쿠샤 되기: 피폭자 범주의 경계 설정과 통제에서 과학·정치·관료제의 상호작용』,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한국교회여성연합회, 1994, 『원폭피해자 돕기 및 반전반핵평화운동』.
- 글쓴이오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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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한국 원폭 피해자의 역사를 주제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BK21교육연구단 BK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논저로 「재난 지역 여성의 시민과학 실천을 통해 본 삶을 위한 연대: 후쿠시마 이와키방사능시민측정실 타라치네」(2021) 「재후(災後)의 시공간에 울려 퍼지는 ‘부흥’이라는 주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부흥의 사회 드라마와 느린 폭력」(2020), 「파괴의 보존: 유네스코 문화유산 히로시마 원폭돔의 보존과 ‘평화’의 문제」(2020), 「“완전 왜년이지, 왜년으로 살았제”: 히로시마 재일조선인 1.5세·2세의 귀환 서사와 해방공간」, 『과학, 기술, 민주주의』(갈무리, 공역) 등이 있다.
- 글쓴이김효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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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20대의 대부분은 현장에서 영화를 만들고 공부하며 보냈다. 현재는 잊혀지거나 감추어진 사건, 장소가 개인과 집단의 삶에 가져오는 변화에 관심을 두고 사진과 영상매체를 중심으로 작업하고 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와 그 세대를 추적한 작업으로 제12회 상상마당 KT&G SKOPF 올해의 최종작가(2019)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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