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심층K | 창+] 레미콘 여장부도 퇴근 후엔 된장국을 끓였다
올해 일흔이 된 정정숙 씨는 일터에서 여장부로 불린다. 외항선을 타던 남편이 레미콘 차를 구입해 일을 시작했다가 다시 배를 타러 가자 '차를 헐값에 파느니 내가 한번 해볼까' 해서 시작한 일이 올해로 26년째다.
26년 전에는 물론 지금도 건설 현장에서 여성 레미콘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취재진이 갔던 부산 현장에서도 여성은 정정숙 씨가 유일했다. 직장 동료들은 "이 업계가 여자 분이 잘 없는데 항상 모범적이시다" "여자로서 아주 대단하고 독립심이 투철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일터에서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레미콘 여장부'도 칠십 평생 살아오면서 결코 피할 수 없었던 일이 있었다. 바로 집안 살림과 육아, 가사노동이다. 1998년부터 레미콘 기사로 일하면서 맞벌이하며 아이 셋을 키웠다. 새벽잠을 줄여가며 도시락을 싸고 밥과 반찬을 준비했고, 퇴근 이후엔 빨래와 청소, 밀린 집안일을 했다. 지금도 퇴근 후 일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정정숙 씨는 "남편이 가사노동을 도와준 건 좀 없었다. 나름대로 다 터득해서 혼자서 해냈다"고 웃으며 얘기했다.
■ 정부 통계 '한계'…가사노동 핵심 '기획 노동' 누락
한국 사회에서 가사노동을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한다는 건 정부 공식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2019년 통계청 조사를 보면 이 노동은 여성이 남성보다 3배 더 많이 하고, 맞벌이 부부여도 그 격차는 줄지 않았다. 그런데 정부 통계는 가사노동 실태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을까?
가족 생활 전반에 대한 계획을 짜고, 구상을 하고, 정보를 모으는 '기획 노동'은 가사도우미나 외부에 맡길 수 없는, 가사노동의 핵심이다. 특히 아이를 키울 때 기획 노동이 가장 많이 필요하다. 당장 뭘 먹이고 입힐지, 육아용품이나 식자재 재고를 파악해 미리 준비하는 일, 성장 과정에 따라 챙겨야 하는 일에 대한 정보를 모은 뒤 단기, 장기 계획을 짜는 일이 대표적인 '기획 노동'이다.
그런데 정부에서 측정하는 가사노동시간에는 이런 기획 노동은 빠져있다. 통계청 생활시간조사는 하루 24시간 동안 실제 '행동'을 한 시간이 얼마였는지만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위해, 가족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준비하는 ‘기획노동’ 시간은 분명히 가족을 위해 쓰는 중요한 시간인데도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과적으로 누락 된다. 실태가 파악 안 되는데,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 수 있을까?
■ 정부 통계가 놓친 '기획 노동'...남녀 격차 3.4배
KBS 시사기획 창은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가사노동 실태를 정확히 알아보기로 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자문을 받아 한국갤럽에 의뢰해 50세 미만 기혼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통계청이 조사하고 있는 가사노동 항목 외에 실제 가정에서 이뤄지는 기획 노동, 관계적 노동 항목 등을 추가하고, 항목별로 이 일을 얼마나 자주 하는지,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 상세히 조사했다.
그 결과 가사노동 시간 남녀 격차는 3배로 나타났다. 주목할 부분은 '기획 노동'에 대한 남녀 격차다. 현재 통계청에서 조사하고 있는 항목, 즉 실행 노동에서 남녀 격차는 2.9배였지만, 통계청이 측정하지 않는 노동인 '기획 노동'에서 남녀 격차는 3.4배로 더 벌어졌다. 지금처럼 기획 노동을 빼고 조사하면, 그 실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아이가 갑자기 아플 때 직장에 휴가를 내고 아이를 돌보는 사람은 대부분 아내였다. (아내 76%, 남편 24%) 또 맞벌이 부부여도 가사노동 시간 남녀 격차는 2.9배로 나타났고, 특히 한참 손이 많이 가는 10세 미만의 자녀가 있을 때 격차는 4배까지 벌어졌다. 여성이 노동 시장에서 쉽게 밀려나는 이유다.
<가사노동 실태조사> 조사기관: 한국갤럽 조사대상: 전국 만 50세 이하 기혼남녀 1,000명 표본추출: 패널 할당 추출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랜덤 추출 가정) 조사방법: 온라인 조사 조사기간: 2024.1.15~1.24 |
■ 아내가 더 벌면 가사노동 다시 증가...왜?
과거엔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며 된장국을 끓이던 어머니의 모습이 흔했지만, 이젠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크게 늘었다. 맞벌이 584만 가구 시대. 50대 이하 부부 절반 이상은 맞벌이다. 만약 아내가 남편보다 돈을 더 많이 벌면, 남편이 가사노동을 맡게 될까? 주익현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이 2004년부터 15년간 맞벌이 부부의 가사노동 시간을 분석한 결과는 예측과 달랐다.
아내의 소득이 거의 없을 때 아내의 가사 시간은 가장 길었고, 소득이 조금씩 높아질수록 가사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아내의 소득이 남편과 비슷한 지점을 넘어 남편보다 더 많이 벌게 되면 그때부터 아내의 가사 노동 시간은 다시 증가하는 'U자형 관계'로 나타났다. 대체 그 이유는 뭘까?
주익현 연구원은 " 아내가 남편보다 소득 수준이 높다는 사실이 한국 사회에서 젠더 규범을 벗어나는 일종의 '일탈'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그러한 일탈을 중화시키기 위해서 아내들이 더 많은 시간을 가사 노동에 사용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분석했다. 아직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가부장제가 맞벌이 부부의 가사노동 시간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뜻이다. 주 연구원은 " 슈퍼우먼이라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가부장제의 희생자들"이라고 짚었다.
전업주부여도, 맞벌이해도, 심지어 남편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도 가사노동의 짐을 더 짊어지는 한국 여성들. 대체 언제쯤, 어떻게 하면 이 과도한 가사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김영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 여성들이 가사노동을 위해 얼마나 많은 부담을 지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한 실태 파악을 하고 그에 맞춰 정책이 추진되지 않는다면 2030 세대들이 결혼, 가족을 기피하는 추세는 계속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OECD 꼴찌를 면하지 못하고 있고, 특히 지난해 4분기엔 0.6명대까지 추락해 또다시 역대 최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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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908472&re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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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방송: 2024년 3월 5일(화) KBS 1TV 시사기획 창 <어머니의 된장국_가사노동 해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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