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뉴스] 학교도서관에 유해 성교육 책이 500여 종? 폐기된 책 목록 봤더니
경기 초중고, '유해 성교육 도서'라며 2,528권 폐기
경기도교육청, 보수 학부모 단체 주장 인용해 지침
우수도서까지 517종 폐기…간윤위 지정 '청소년 유해도서'는 1종뿐
"모든 성교육 책 없앴다" 초등학교에서 집중 폐기
지난해 경기도의 학교도서관에서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성교육 도서'라는 명목으로 2,528권이 폐기 처리됐습니다. 성교육 도서가 이렇게 다양했나 싶어 폐기 도서 목록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한눈에도 성교육과 무관한 교양·과학 분야의 책 제목이 다수 눈에 띄었습니다.
도서관 서가에서 1년 새 50여 권을 빼버린 학교도 있습니다. 학교 측에 도서관에 어떤 성교육 도서가 남았는지 물어봤더니, '모든 성교육 도서를 폐기했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경기도 학교 도서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 경기 초중고, '청소년 유해 성교육 도서'라며 2,528권 폐기
경기도교육청이 더불어민주당 강민정 의원실에 제출한 '성교육 도서 폐기 현황'을 보면, 학교 도서관에서 집중적으로 폐기된 책들은 성교육과 성평등 도서입니다. 그런데 집중 폐기된 책들이 정말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도서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국내외에서 우수도서로 평가받은 책들이기 때문입니다.
80권 이상 폐기된『사춘기 내 몸 사용 설명서』는 2013년 독일 올해의 과학도서상을 받은 성교육 책입니다. 국내에 소개될 때는 아동인권 전문가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감수를 거쳤습니다. 『10대들을 위한 성교육』은 영국 교육전문지에서 올해의 지식상을 받았던 우수도서입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출판 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인 『어린이 페미니즘 학교』와 국내 도서 전문 단체에서 추천도서로 선정된『성교육 상식 사전』,『니 몸 ,네 맘 얼마나 아니』,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도 폐기 목록에 올랐습니다.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된『안녕, 내 이름은 페미니즘이야』도 학교 도서관에서 제적됐습니다.
이상한 점은 또 있습니다. 폐기 목록에는 성교육과 무관한 철학, 문학, 과학 분야의 서적도 포함됐습니다. 부커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채식주의자』를 비롯해, 이상문학상을 받은 최진영 작가의『구의 증명』같은 현대 문학작품이 성교육 도서로 분류됐습니다. 50만 부 넘게 팔린 정재승 교수의 학습동화 시리즈 중『인간은 외모에 집착한다』편도 폐기 도서 목록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경기도 학교 도서관에서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성교육 도서'로 분류돼 폐기한 책은 517종에 이릅니다.
■ 경기도교육청의 유해성 기준은 '보수 학부모 단체 기자회견 기사'?
어떤 기준으로 이 책들은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성교육 도서'로 규정돼 폐기된 것일까요? 여러 학교 담당자들에게 물어보니, 경기도교육청의 지침대로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지난해 11월 경기도교육청에서 '성 관련 도서를 폐기하는 것을 권고한다'는 내용의 공문이 각 학교에 내려왔다는 겁니다. 두번째 공문에선 성교육 도서의 처리 현황을 보고하라면서, '제적 및 폐기' 도서를 입력할 엑셀 파일이 내려왔습니다. 경기도교육청이 학교 도서관의 성교육 도서 현황을 요구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문제는 경기도교육청의 공문에도 유해성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경기도교육청은 관리가 필요한 도서 목록을 명시하지 않은 채 '청소년 유해 매체물 심의기준'과 '관련 기사 목록'을 참고하라고 첨부 문서를 보냈습니다. 지난해 9월 보수 학부모 단체가 "학교 도서관에서 부적절한 성교육 도서를 폐기하라"며 연 기자회견을 다룬 기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성교육 도서가 무분별하고 선정적"이라면서 "학생의 나이와 이해도에 따른 올바른 성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학교 도서관과 공공 도서관에 있는 부적절한 성교육 도서의 대출과 열람을 즉시 중단시키고 도서 심의를 강화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이어 이들은 자신들이 임의로 정한 '청소년 유해도서' 목록을 각 학교에 공문 형식으로 보냈는데, "성교육 책의 그림과 표현 일부가 적나라하고 자극적이어서 성범죄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습니다.
2023년 11월 경기도교육청이 학교에 보낸 ‘학교도서관 유해한 성교육 도서선정 유의’ 공문의 첨부 자료.
교육청이 보수 학부모 단체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자, 학교 현장에서는 이 단체가 임의로 정한 '청소년 유해 도서' 목록을 교육청의 기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A 학교 관계자는 교육청의 공문을 받은 뒤 "교사 커뮤니티에서 이 단체가 정한 유해도서 목록을 찾아, 이를 토대로 관리 대상 도서를 추렸다"고 말했습니다.
B 학교는 "조금이라도 애들이 장난을 치거나 대화하다 음란성으로 번질 위험이 있는 책은 이 기회에 다같이 폐기하기로 했다"고 전했습니다. C학교 역시 "유해성 판단과 별개로 성과 관련된 책은 전부 서가에서 제외하기로 하고, 책들을 폐기했다"고 밝혔습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학생을 위한 성교육 도서를 전부 치워버린 겁니다.
이 과정에서 보수 학부모 단체가 문제 삼지 않은 책들도 광범위하게 폐기됐습니다. 이들 단체가 분리 조치를 요구한 책은 43종이었는데, 실제로 폐기된 책은 517종에 이릅니다. D 학교 관계자는 문학 작품 중에서도 민망한 대목이 있는 책은 성교육 도서로 분류해 제적했다고 밝혔습니다. 성교육과 거리가 있는 과학, 철학 도서에서도 성이나 인체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면 서가에서 사라졌습니다.
한국학교사서협회 권혜진 사무총장은 "교육청의 입장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학교는 교육청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고 문제의 소지를 없애려고 한다"면서 "유해성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거나 민원이 우려되는 책들이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무분별한 도서 폐기는 예산 낭비이고, 학생들의 책을 볼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출판계에서 우수 도서로 추천했지만, 경기도 학교에서 ‘부적절한 성교육 도서’라며 폐기된 도서들.
이에 대해 경기도교육청은 "일부 단체가 학교에 무분별하게 공문을 보내, 성교육 도서 폐기를 요구한 상황이었다"면서 "교육청은 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현황을 단순 조사한 것이지 폐기하라는 지시가 아니었다"고 뒤늦게 해명했습니다.
또, "유해도서 여부는 간행물윤리위원회만 심의할 수 있고,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유해성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면서도 "학교 도서관에 있는 도서의 유해성 여부와 조치 사항은 각 학교 도서관 운영위원회가 자율적으로 판단할 일"이라고 도서 폐기의 책임을 학교 측에 넘겼습니다.
■ 폐기된 책들, 정말 청소년에게 유해했나…간행물윤리위 유해도서는 1종뿐
폐기된 책 2,528권 가운데 68%는 보수 학부모 단체가 임의로 정한 유해 도서 목록에 오른 책입니다. 이들 단체는 지난해 9월 140여 종의 책을 폐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해당 책이 유해한 이유를 설명하기는커녕, 저자와 출판사 정보 없이 책 이름만 나열돼 같은 이름의 책과 구분할 수 없고, 중복 도서와 오탈자까지 있는 조악한 목록이었습니다. 다음달 이들 단체는 목록을 43종으로 줄여 각 학교에 '분리 제거'를 요구하는 공문을 다시 학교에 보냈습니다.
이 책들은 정말 청소년에게 유해한 성교육 도서일까요? 간행물윤리위원회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보수 단체는 성교육 도서 140여 종에 대해 심의를 신청했는데, 4월까지 심의를 마친 66종 가운데 청소년 유해도서로 지정된 서적은 1종에 불과합니다. 그 책조차 스웨덴에서 최우수 청소년 도서상을 수상하고 15개국에서 출간된 책입니다. 대한출판문화협회는 유해도서 지정 기준을 알 수 없다며 '성교육 도서에 대한 마녀사냥'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배정원 박사가 감수한 성교육 책 ‘성교육 상식 사전’의 뒤표지.
■ 배정원 박사 "성교육 도서 맥락 봐야…도서 폐기로 학교 성교육 위축 우려"
폐기된 책들의 저자는 대부분 성교육과 성평등 전문가들입니다. 대한성학회 회장을 지낸 성교육 전문가 배정원 박사의 책도 폐기 도서 목록에 포함됐습니다. 배 박사는 "성교육 책들은 보편적인, 유네스코에서 정한 정보와 가치의 기준에서 나온 책들이 많고, 교육을 위한 책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보수 단체가 성교육 책에서 시각 자료를 주로 문제 삼은 데 대해, "성교육 도서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시각자료는 해부학적 특징을 너무 단순화하면 구분하지 못할 수 있어 정확하게 그릴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보수 단체들이 "성교육 책이 청소년의 조기 성애화를 부추긴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서는 오독이라고 반박했습니다. 배 박사는 "어떤 성교육자도 이른 나이에 성관계를 하라고 부추기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이 이른 나이에 성애화되는 걸 미루기 위해서, 시기를 미루고 준비가 된 다음에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하라는 게 성교육 책"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배 박사는 특히 성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지는 시기에 성교육 책이 대량 폐기된 데 대해 우려했습니다. 청소년들은 소셜미디어와 유튜브, 웹툰 등을 통해 자극적인 성을 부추기는 문화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고, 사춘기 연령이 빨라져 초등학교에서 성교육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성교육 도서를 폐기한 341개 학교 가운데 초등학교가 61%로 가장 많았습니다. 배 박사는 "학교에서 성에 대한 논의를 활발하게 토론하며 다양한 가치를 접하고, 이를 통해 청소년들이 성을 건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길러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과 교사, 부모, 전문가들과의 접촉 속에서 성교육이 이뤄지는 게 바람직한데, 성교육 도서의 폐기로 교사들의 성교육 활동이 굉장히 위축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이어 경기도교육청에 "성교육 도서를 관리하고자 한다면 객관적인 전문가 집단을 꾸려서 유해성을 가리도록 하고, 연령별로 적절한 도서를 선정하는 등 교육청 차원에서 관리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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