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다] "장시간, 불안정 노동’ 그대로 두고 저출생 대책?"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19일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을 주제로 열린 2024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회의에서의 일이었다. 정부는 ‘일가정 양립’, ‘양육’, ‘주거’ 등 3대 핵심분야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여 저출생 추세를 반전시키겠다고 밝혔지만, 대책의 내용은 그 방향성에서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6.8%인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을 임기 내 50% 수준으로 대폭 높이고, 70% 수준인 여성 육아휴직 사용률도 80%까지 끌어올리겠다”, “아빠 출산 휴가도 10일에서 20일로 확대하겠다” 등의 육아휴직 관련 예산 편성과, “출산 가구는 원하는 주택을 우선적으로 분양”하고, “신혼부부에게 저리로 주택 매입과 전세 자금을 대출”, “자녀를 출산할 때마다 추가 우대 금리 적용” 등의 주거 대책을 내세웠지만, 시민사회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을 거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특히 이번 정책은 ‘중산층, 맞벌이 부부, 정규직’ 등을 주로 타깃으로 하고 있어 양극화를 부추긴다는 비판이 높다. 또한 정부가 여성과 청년의 노동실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 성별 임금격차가 보여주는 ‘구조적 성차별’을 해소하지 않는 한, 여성들은 한국이 아이를 낳고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회라고 인식할 것이라고, 여성/노동계는 경고한다. 2024년 6월 25일 서울 고용노동청 앞에서 한국여성노동자회와 전국여성노동조합 주최로 ‘2024년 최저임금 인상을 위한 전국여성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출처: 한국여성노동자회) |
시민사회단체 연대체들인 여성노동연대회의, 이주가사·돌봄 시범사업 저지 공동행동, 주4일제 네트워크, 가족구성권연구소는 〈잘못된 방향의 정부 저출생 대책 비판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저출생 대책이야말로 국가비상사태다.”라고 선언했다. 7월 2일 서울 영등포구 여성미래센터 소통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선 “정부 정책 어디에서도 저출생의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노동시간 단축 없는 저출생 대책은 탁상공론
박시현 공무원노조 부위원장·성평등위원장은 윤석열 정부의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의 3대 분야 15대 핵심과제에 접근 가능한 사람은 과연 누구인지 질문했다. “자영업자나 비정규직에 대한 대책은 없다”는 것.
박시현 위원장은 지난 3월 6일 민주노총에서 발표한 남성 노동자의 육아휴직 사용 격차 내용을 언급하며 “남성이 육아휴직을 사용한 고용형태는 부모가 모두 정규직이었을 때 57.2%, 부모중 한명이 정규직인 경우 29.4%, 부모 모두 정규직이 아닌 경우 13.4%로,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이 쓰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점”을 짚었다.
또한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 정규직이 43.8%, 비정규직·무기계약직이 12.9%를 사용하였고, 299인 이하 사업장에서는 정규직, 무기계약직 모두 사용률이 낮았다”는 점을 들며 “현 육아휴직 제도는 고용이(해고 위험이 덜한) 안정적인 대기업 정규직이 쓰기에 적합한 제도”라 설명했다.
민주노총 발표에선 “남성이 육아휴직을 쓰지 못하는 이유로는 눈치가 보여서, 인사고과, 승진 등의 불이익 등”도 언급됐다. 박시현 위원장은 “사회 전반적으로 육아휴직을 쓰기 어려운 직장 문화와 제도가 개선되지 않으면, 활용도가 낮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종진 주4일제 네트워크 간사는 “이번 정부 발표에서, 지난 10년 사이 ‘일과 삶의 균형’ 논의와 맞물려 장시간 노동 개선이나 노동시장 고용의 질 개선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김종진 간사는 “한국은 연간 근로시간이 1,901시간”으로, “OECD 평균보다 약 149시간(1,752시간), EU 27개 회원국 평균보다 약 330시간(1,571시간) 더 많다. 48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은 17%나 차지, 연차휴가(평균 8.6일 사용) 소진율 66.1%로, 일과 삶의 조화 어려운 구조”라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는 오히려 주당 52시간 연장 근로 한도를 확대했다. “이는 퇴행적 정책일 뿐 아니라, 일과 삶을 파괴하고 저출생 정책에도 반하는 것”이다.
김종진 간사는 “돌봄과 육아에 있어 노동시간 단축은 꼭 필요하다”며,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생활보장이 없는 저출생 정책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성평등’은 실종, ‘정상가족 신화’는 고수
저출생 대책에서 ‘성평등’이 삭제된 것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오경진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은 “대한민국은 2024년 기준 세계경제포럼 성격차지수 146개국 중 94위, 성별 임금격차는 2023년 31.2%로 OECD 평균의 2배를 넘는 수준이며, OECD가 통계 계측을 시작한 이래 27년째 1위를 지속하는 국가”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탄생 때부터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고 단언하며, “성별 갈등 프레임을 설정하고 부추겨 왔다”.
▲ 7월 2일 오전 10시, 서울 영등포구 여성미래센터 B1 소통홀에서 열린 〈정부의 저출생 대책이야말로 국가비상사태다: 잘못된 방향의 정부 저출생 대책 비판 기자회견〉 현장. 여성노동연대회의, 이주가사·돌봄 시범사업 저지 공동행동, 주4일제 네트워크, 가족구성권연구소가 공동 주최했다. (출처: 한국여성노동자회) |
오경진 사무처장은 윤 정부가 “24년 동안 일터에서 성차별과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최전선에서 지원해왔던 민간 고용평등상담실을 폐지”하고, “성평등 가치를 추구하는 여성단체들, 그리고 수많은 한국 시민들이 함께 지난 40여 년 동안 힘겹게 진전시켜 왔던 성평등 정책 추진체계를 순식간에 퇴보시킨 점”을 짚었다.
오 사무처장은 현재의 청년들, 특히 한국 여성들이 보는 우리 사회는 “이성애/가부장제 중심 전통적 가족규범, 가족 내 가사/돌봄 노동에서의 성별 불평등,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질서 속 여가와 쉼을 담보로 한 장기노동 관행과 일터 내 성차별, 소수자 집단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불평등의 심화, 여성이 최소 3일에 한번씩 파트너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회, 60%가 넘는 여성노인 빈곤율”이라며, “한 마디로 미래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사회, 아이를 낳고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회, 지속 가능하지 않은 사회”라고 진단했다.
지속적으로 변화해가고 있는 가족형태와 다양한 가족의 등장에도, 여전히 ‘가족’에 대한 상상력이 지극히 제한적인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출산은 혼인, 즉 이성애 법률혼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그 결혼과 그 출산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자산 형성을 지원하겠다고 하는 정부 정책의 방향은 이성애 법률혼 관계가 아닌 수많은 관계들을 사회적 불평등 속에 남겨둔다.”
이유나 가족구성권연구소 공동대표는 “정부가 말하고 있는 결혼-출산-양육-일가정 양립이라는, 도무지 변화하지 않는 이 인구정책의 세트구성은 오히려 어떤 양육자에게서 태어나는지에 따라 공동의 자원을 배분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함으로써 오로지 운에 의해서만 살아남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했다.
이유나 대표는 “우리는 이혼을 할 수도 있고, 결혼하지 않은 채로 아이를 키울 수도 있고, 친부모가 아이를 돌볼 상황이 되지 않아 위탁부모로서 아이를 돌볼 수도 있고, 조카를 돌볼 수도 있고, 친구의 아이를 함께 양육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가 아플 때 연락이 안되거나 올 수 없는 친권자를 찾아 발을 동동거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돌보고 있는 그 사람이 시급한 결정을 내릴 수 있고 행정적인 절차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가족돌봄 휴가’가 아니라 ‘돌봄 휴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지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돌봄 노동을 중시하는 ‘돌봄 경제’ 구상할 때
윤자영 충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저출생 현실이 “가족과 시장에서 돌봄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우하는지”를 보여준다고 진단했다. “물질적 생산과 소비에 모든 자원의 투입을 우선시하는 경제 패러다임은 돌봄을 위한 자원의 확보와 공평한 분배를 가로막음으로써 돌봄의 위기를 심화시켰다”는 것. “한정적인 시간 자원을 가진 개인에게 시장경제 참여를 통한 자립과 성공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타인을 돌보는 데 시간과 노력을 쓰려는 사람은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사회는 돌봄 노동을 “저소득층의 복지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 접근하면서, 돌봄 노동자의 노동권을 경시”해, “돌봄 노동자는 고용불안과 최저임금에 가까운 보상”을 받고 있다.
윤 교수는 “저출생은 돌봄이라는 공공재를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그 책임과 의무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그에 따른 불이익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를 보다 근본적으로 고민하지 못했기에 나타난 결과”라고 분석하면서, 더 취약한 여성 계층, 이주 노동자에게 낮은 임금으로 돌봄 노동을 떠넘기려는 정부의 정책은 “임기응변은 될지언정 장기적으로는 위기를 지연시킬 뿐”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일부 근로자에만 유효한 일·가정 양립 정책, 저렴한 돌봄 서비스 공급, 돌봄과 양육을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특권’으로 만드는 정책은 여성과 남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내국인과 이주민, 저소득 가구와 고소득 가구 간 갈등만 조장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윤자영 교수는 “돌봄을 무보수나 싼값으로 여성과 취약계층에게 전담시키는 시장경제 중심의 사고를 지양하고, 가족, 시장, 기업, 국가가 가정과 시장의 돌봄을 조화롭게 연결하고 북돋을 수 있는 ‘돌봄 경제’를 중심에 놓고, 돌봄의 책임과 의무를 공유하는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아이가 집구입 할인쿠폰인가? 주거빈곤을 해소해야
▲ 2024년 3월 5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민달팽이유니온은 청년들의 세입자 정치선언 및 2024 총선 세입자 정책 요구안을 발표했다. 참여자들은 “전세사기 이제 그만!” “월세, 전세 집에도 기준이 필요해”, “모두를 위한 집을 만들자!” 등의 피켓을 들고 있다. (출처: 민달팽이유니온) |
정부의 저출생 ‘반등’을 위한 주거지원 대책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지수 민달팽이유니온 활동가는 “정부가 제시한 대책은 주거불평등을 보다 공고히 하는 부동산 정책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이라며, 이렇게 반문했다. “9억짜리 주택을 매수하는 이에게 최대 5억을 대출해주는 게, 집값 문제 해결에 어떤 도움이 된답니까. 자녀를 하나 낳고 또 하나 낳을 때마다 금리를 깎아주겠다는 발상은, 아이를 그저 집 구입 할인쿠폰 취급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지수 활동가는 “정부가 정말 아동의 주거권 보장을 논하고자 한다면, 한국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아동들이 겪고 있는 ‘주거빈곤’을 먼저 살펴야 했을 것”이라며, “아동 주거빈곤 가구에 대한 즉각적인 지원 대책이 절실하지만, 정부의 시선은 9억 주택을 매수하는 이들에게만 꽂혀 있는 것이 참으로 규탄스럽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불어 전세사기 피해를 겪게 된 세입자 청년들이 “결혼을 포기합니다. 임신 계획을 포기합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보려 했지만 글렀습니다. 이민 갈 겁니다. 이 나라에서 도저히 못살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며, “빚 내서 집 사라, 빚 내서 세 살라 라는 정책은 결국 세입자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이미 가진 이들의 자산을 부풀리는 정책이었다는 것이, 전세사기라는 사회적 재난을 통해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아동 주거빈곤과 전세사기 문제를 방치하면서 또다시 주택구입자금대출과 청약 범벅의 대책을 제시하는 건, 이 정부가 저출생 위기를 말하지만 정녕 무엇이 위기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한 지수 활동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집 구입 할인쿠폰이 아니라 ‘주거권’이라는,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사회적 권리, 존재할 자리에 대한 권리”라고 강조했다.
📰[일다 | 기자 박주연] 기사 전문
https://www.ildaro.com/9946
🟣[보도자료] "정부의 저출생 대책이야말로 국가비상사태다" 기자회견문 & 발언 전문
https://www.politicalmamas.kr/post/4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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