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 책&생각] 국어학자의 말매무새 탐구…윤 대통령, 이랬으면 어땠을까
‘바이든-날리면’ 사건이 집필 계기
어법·문법보단 ‘소통’ 중심 말 강조
말씨, 말투, 말매무새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말할까
한성우 지음 l 원더박스 l 1만7000원
“이런 XX인데, 어떻게 믿냐”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 쪽팔려서 어떡하냐?”
언론에 보도됐던 윤석열 대통령의 말이다. 국정 운영 최고 책임자가 비속어와 욕설이 섞인 말을 서슴없이 하고, 이 말들이 정치적·사회적 문제의 씨앗이 됐다. 시민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말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시기이고, 품격 있는 말, 신뢰할 수 있는 말이 기다려지는 시기이다.
‘말씨, 말투, 말매무새’란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배경에도 윤석열 대통령의 ‘바이든-날리면’ 사건이 있다. 저자인 한성우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2022년 9월 전 국민이 ‘바이든’과 ‘날리면’을 구별하는 듣기 시험을 보아야 했던 날, 이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우리말을 꾸준히 연구해온 저자는 “그 시점 그 자리에서는 무엇이 되어 어떻게 말하는 것이 좋았을까?”라는 질문을 품었고, ‘말씨, 말투, 말짜임’에서 답을 찾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이 세가지를 조화시켜 ‘말매무새’를 잘 갖추기 위한 방법을 책에서 제시한다. 특히 정치인의 말에 관해 논한 부분에서 ‘바이든-날리면’ 사건 때 대통령이 어떻게 말했으면 좋았을지에 대한 ‘모범 답안’을 제시하는데, 이 부분을 읽은 독자는 “맞아.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더라면!” 하고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책에 따르면, ‘말씨’는 어디서 태어나 성장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말의 씨줄이고, 말투는 무엇이 되어 살아가느냐에 의해 형성되는 말의 날줄이다. 그리고 이 씨줄과 날줄이 엮여 ‘무엇을 말할까’에 대한 ‘말짜임’이 만들어진다. ‘말씨, 말투, 말짜임’을 조화시켜 ‘어떻게 말할까’에 해당하는 ‘말매무새’가 완성된다. 저자는 이렇게 말을 ‘말씨, 말투, 말짜임’으로 나눠 말의 구성요소를 분석하고, 멋지고 아름다우면서 품격 있는 말매무새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생각해볼 지점들을 짚어 나간다.
어떻게 말을 잘할까를 다룬 책들은 이미 많다. 주로 그런 책들은 ‘경청하기’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강조한다. 또 으레 바르고 고운 말을 써야 한다고 당부한다. 그런데 이 책은 독자가 예상 가능한 이야기보다 기존에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말에 대한 통념을 깨뜨리면서 근본적으로 우리가 말을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가장 먼저 ‘표준어를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저자는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표준어는 소통의 편의를 위해 제정된 것이지 당위론적으로 써야 한다고 강요할 무엇이 아니라는 것. 표준어와 사투리를 구별하고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을 촌스럽게 생각하거나 ‘못 배운 사람’ 정도로 치부하는 태도에도 비판적이다. 사실 표준어의 역사를 보면, 표준어라는 것은 그때그때 정치적 중심지가 어디냐에 따라 경상도의 말, 함경도의 말, 평안도의 말이 표준어인 적도 있었다. 그만큼 정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이 땅의 모든 말들은 아름답다”는 태도를 취한다. 방언 연구자이기도 한 저자는 사투리를 잘 알고 적절하게 활용하면 오히려 어휘와 표현 측면에서 훨씬 더 풍성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드라마 ‘추노’에서 칼을 들고 각지를 누비는 상남자들끼리 서로를 부를 때 ‘언니’라고 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는 과거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이이거나 일가친척 가운데 항렬이 같은 동성의 손위 형제를 ‘언니’라고 불렀던 것을 드라마에서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호칭 체계에서 구별하는 요소가 많을수록 그 대상을 명확히 지정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별과 나이에 따른 굴레를 만들 수 있으니 ‘말의 주인’이 원한다면 ‘언니’라는 호칭을 현재에도 참고할 만하다고 권한다. 실제로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에서 회원들끼리 성별·나이를 불문하고 서로 ‘언니’라고 부르는데, 이 책의 설명을 읽고 나니 ‘말의 주인’인 회원들이 호칭에 대한 합의를 통해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로 발전시켜온 것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또다른 장점은 유명 가수나 정치인의 말,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말처럼 구체적 ‘말’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말씨, 말투, 말짜임, 말매무새’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는 점이다. 스페인의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방탄소년단의 멤버 알엠(RM)이 한 말을 보면, 알엠은 상대방이 궁금해하는 부분에 대해 대답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내용까지 잘 전달한다. 소통을 잘못하는 경우도 예시를 만들어 보여주니 ‘말을 잘한다는 것’에 대해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고개 살짝 들어 보실게요. 샴푸하고 드라이하실게요. 펌이 참 예쁘게 나오셨어요”라고 말하는 미용사들의 말이 어법에 맞지 않은 표현이라고 지적하고, ‘심심한 사과, 금일, 사흘’을 ‘지루하고 재미없는 사과, 금요일, 4일’로 이해하는 젊은이들을 무식하다고 비난하는 것에도 저자는 부정적이다. 어법에 맞지 않더라도 미용사와 손님이 소통이 잘 됐다면 문제가 없고, 일부 젊은이의 오해, 실수, 장난을 확대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말이라는 것은 관계, 상황, 태도, 내용에 따라 달라지고 의사소통이 잘 되었다면 어법이나 문법 등을 너무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것.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다 보면 해방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또 사회 구성원이라면 어느 정도의 규범은 당연히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논쟁의 여지도 있다.
유튜브 등 영상 매체가 발달하면서 말을 잘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나의 말 습관을 점검해보면 도움이 되겠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에게는 풍성한 한국어의 세계, 우리 말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이다. 마지막으로는 ‘말’로 인해 자꾸 설화가 빚어지는 대통령이 이번 여름휴가 때 읽어보면 좋을 책이기도 하다.
📰[한겨레 | 책&생각] 기자 양선아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487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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