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기업 다니면서 애도 잘 키울 수 있다는 건 착각일 뿐 (송지현)
아이를 잉태한 이래 일곱 번의 이사를 거쳐 여덟 번째 집에 살고 있다. 그 사이 여섯 번을 이직하여 일곱 번째 일하고 있다. 11년 동안이나 이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유랑의 삶을 살게 된 까닭은 단 하나, 지금까지의 그 어떤 환경도 ‘일-가정 양립’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 출산휴가 3개월 후 복직, 줄줄 새는 젖 짜러 ‘화장실’에 갔다
그 첫 번째 직장은 대기업이다. 상당히 남성 중심적인 산업군이지만 내가 속해 있는 신사업 관련 조직은 연령대가 낮고 기업문화도 유연한 편이었다. 본사 옆 별개의 건물을 쓰는 독립성 있는 조직이기도 했다.
신사업 조직에 속한 구성원은 150~200명 남짓이었는데, 기술 부서를 제외하고는 성비가 1:1에 가까워 여자 선배들이 많았다. 그 선배들이 퇴근 후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나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직장에서 마주하는 모습이 삶의 전부라고 여겼으니까. 나도 내 일이 나의 전부인 것처럼 살았으니까. 직장에서의 삶과 또 다른 삶이 공존하는 경우를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아이를 갖기 전까지는.
3개월의 출산휴가를 마치고 젖도 떼지 못한 채 복직을 감행했는데 그 때문에 난감한 일이 많았다. 아무리 수유패드를 여러 겹 붙여놔도 젖이 줄줄 새기 일쑤인 거다. 일하다 보면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았고 심지어 겉옷 바깥까지 스며든 적도 있다. 적어도 하루 두 번은 유축을 해야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는데,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늘 화장실 변기에 앉아 젖을 짜냈다.
임신 중인 한 선배가 처음으로 나의 화장실 유축을 알아챘다. 선배가 나서준 덕에 수유실이란 것이 새로 생겼다. 휴게실 네 곳 중 한 곳에 문패만 바꿔 다는 수준이었지만. 선배는 말했다.
“곧 나도 겪을 일이니까. 나는 화장실에서 유축하고 싶지 않아.”
조직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 가운데 아이 엄마인 구성원은 나를 제외하고 단 한 명뿐이었다. 그 한 명은 ‘미친’ 업무강도가 당연시되는 직종에 있다가 이직해 오신 분으로 애당초 시어른들과 합가해 살고 계셨다. 처음부터 자녀 돌봄을 부모님께 ‘아웃소싱’한 경우라고나 할까. 그 선배를 뺀 나머지 모든 여성 구성원은 미혼이거나, 비혼이거나, 기혼이더라도 자녀가 없었다.
남성 구성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기혼자 중에서는 자녀가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본인이 주양육자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 조직에서 유일한 ‘주양육자’였다. 그때라도 알아차렸어야 했다. 수유실이 없는 직장은 아이 키우면서 다닐 수 없는 직장을 상징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그 조직에 있으면서 출산하고 아이 키우는 사람이 없는 이유를. 곧 내가 양육자를 위한 사소하고도 수많은 일의 개척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아무리 버텨보려 해도 언젠가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갈수록 멀어지게 될 아이와의 관계를.
◇ 주양육자에게 적합하지 않은 노동환경… 결국 사표 썼다
그곳에 ‘칼퇴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일이 넘쳤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개인사가 있지 않은 이상 우리는 항상 다 같이 저녁 먹고 야근을 했다. 가끔 일이 빨리 끝나면 너무 당연하게 다 같이 저녁 먹고 술자리를 가졌다.
게다가 어차피 자리에서 일찍 일어나나 늦게 일어나나 귀가하는 시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쩌다 여섯 시 정각에 칼퇴를 한다 해도 서울 사대문 안에서 서울 바깥의 한 위성도시까지 죽음의 교통체증을 뚫고 귀가하면 이미 여덟 시가 넘어 있었다. 그 숨 막히는 광역버스에 넋 놓고 서 있느니 그냥 저녁 먹고 일 더 하다가 집에 가는 게 나았다.
주말에 출근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면 아이를 사무실 한쪽에 데려다 놓고 TV를 틀어줬다. 그 덕분에 얻은 게 있다면 아이가 나의 부재와 직업인으로서의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거다. 아, 또 얻은 게 있다. 아이의 미디어 중독이다.
자녀의 주양육자인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노동환경임에도 나는 그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직장에서의 책임이 커질수록 더 그랬다. 나는 99%의 비양육자 동료들처럼 일했다. 아니, 나만 주양육자라는 소수자 콤플렉스에다가 출산휴가 공백에 대한 죄책감이 콤보로 발동해 보란 듯이 남들 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99%의 비양육자 동료들과 어울려 놀았다. 역시나 나만 소수자라는 이유로 직장 내 ‘아싸’가 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동료들과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직장에서 존재가치를 느꼈고 직장에서 성취감을 얻었다.
매일 아침 7시 15분에 집을 나서 빠르면 밤 9시, 늦으면 자정께 귀가했다. 운 좋게 아이가 깨어 있으면 보고, 자고 있으면 못 봤다. 그래서 몇 날 며칠 자는 모습만 본 적도 많았다. 아이와 함께 식사다운 식사를 하는 일은 적어도 평일엔 없었다. 그렇게 나는 ‘90년대 아빠’가 되어 갔다. 돈만 벌어다 주고, 일밖에 모르고, 맨날 늦게 들어오고, 자식에게 얼굴이나 비추면 다행이고, 집안 돌아가는 사정엔 별 관심이 없는 그런 90년대 아빠.
아예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긴 날, 여섯 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스를 탔다. 어린이집 마지노선은 일곱 시 반. 그것도 네 시쯤에는 모든 아이들이 귀가하고 아이 혼자 남아있는 시간이었다. 시간은 일곱 시를 넘어가는데 아직도 서울에 발이 묶여 있었다.
무슨 사정이었는지 그날 엄마는 안 계셨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우리 아빠에게 처음 전화를 했다. 아이를 좀 찾아서 데리고 있어 달라고. 나는 아무도 앉지 않는 만원 버스 뒷문 계단에 주저앉아 울었다. 서럽게 펑펑 울었다. 얼굴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됐다. 나름대로 일말의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가 반복됐지만 단 하루도 예외 없이 실패로 끝났다.
그러는 사이 아이가 세 돌이 넘었다. 3년을 같이 보냈는데도 우리 모자의 관계는 단절적이고 피상적이었다. 두 집 살림하며 나를 대신해 아이를 돌보던 엄마는 3년 만에 안 아픈 데가 없는 늙고 병든 할머니가 돼 있었다. 우리 중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다. 이 직장에선 절대로 일과 가정 사이의 균형을 찾을 수 없음을 이제라도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좋아했던 동료들을, 열정을 다 바친 일을, 번듯한 직장을 포기하기로 했다.
◇ ‘아이 하나’ 있는 게 그렇게 큰일이라는 걸, 그때까지도 몰랐다
사직서를 받아든 보스는 내년이면 사내 어린이집이 만들어지니 조금 더 버텨보자고 했다. 당시 ‘상시 여성 근로자 300명 이상 또는 근로자 500명 이상 기업은 직장어린이집을 의무적으로 설치하게 돼 있지만 대부분 지키지 않고 있다’라는 보도가 이어졌고, 회사에서는 부랴부랴 이행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리 회사도 다른 대다수 대기업처럼 도심 한가운데 있었다. 사내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 왕복 세 시간 반쯤 되는 지옥 같은 출퇴근길을 아이와 동행하는 건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직장 근처로 거처를 옮기자니 우리 집 보증금으로는 원룸이나 구할 수 있을까 말까 할뿐더러 부모님 댁과 떨어진 곳에서 홀로 독박육아를 할 자신도 없었다.
그날 사 년 반 만에 처음으로 보스에게 성질을 부렸다. “댁에서 여기까지 애 데리고 출근하실 수 있으세요?” 그 뒤엔 많은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남 일이니까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게 매일 야근하며 직장생활 십수 년 하시는 동안 사모님이 댁에서 아이들 양육 도맡아 하신 거잖아요. 저는 제가 다 해야 한다고요.’
사실 보스를 탓하거나 야속하다고 할 일은 아니었다. 그가 아니라 이 사회가 온통 다 그랬던 것뿐이니까. 그래도 그땐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렇게 첫 직장과 이별하면서 수백 가지 변명을 스스로 늘어놓았지만, 그 무엇도 억울하고 슬픈 감정을 다스려주지는 못했다. 아직은 20대, 직업과 직장이 나를 상징하는 전부인 것만 같은 나이. 나도 똑같이 열심히 사는데. 그동안 잠을 쪼개가며 할 만큼 했는데. 친구들은 다 자리 잡고 사회에서 꽃 피우기 시작하는데. 나는 왜 이 일 하나조차 지켜낼 수가 없는 거지? 단지 아이 하나 있어서? 단지 남편 하나 없어서? 그게 그렇게 큰일이야?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건 ‘그렇게 큰일’이라는 걸. 직장을 잃거나 직업을 바꿀 일이 아직 수두룩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경력이 쌓임에도 임금은 더 낮아질 수 있다는 것을. 잠깐의 경력단절 때문에 멸시받고 울 날이 올 거란 것을. 아이가 자랄수록 더 커지는 돌봄 공백 때문에 직장에서 난처해질 일이 다반사라는 것을. 양육자와 비양육자 간의 삶의 격차를 다시는 좁힐 수 없다는 것을. 단지 아이 하나 있어서. 단지 남편 하나 없어서.
◇ 한 회사의 노동환경 궁금하거든, 그곳 ‘주양육자’의 삶을 보라
대기업의 장점도 물론 있다. 일단 국가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제도적인 변화를 발 빠르게 따라가는 편이다.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 장시간 노동 및 고강도 업무였는데 그것도 옛날얘기다. 특히 지난해 주 52시간제 시행을 거치면서 유연근무제와 칼퇴근 문화가 급속도로 자리 잡았다.
정말 고무적인 것은 당시 나의 동료들 여럿이 현재 그 직장에서 아이 낳고 기르면서 산다는 거다. 부모님 합가나 상주 도우미 등 보조 양육을 위한 사적인 장치 없이 그저 유연근무제,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 사내 어린이집, 육아휴직 등 제도적 범위 내에서 말이다. 불과 7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대기업의 높은 급여 수준도 간과할 수 없다. 돈으로 모든 종류의 시간을 살 수는 없지만, 일부는 ‘아웃소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으로 가사도우미 쓰고 택시 타고 밥 시켜 먹는 등 다른 시간을 사라. 그 단축된 시간을 아이와 보내라. 그게 돈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라 장담한다.
물론 같은 대기업이라 해도 노동환경과 기업문화는 완전히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하지만 가장 정확한 가늠자는 다른 주양육자 동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이다. 혹시 직장에 수유실이 없거나 수유실을 이용할 동료가 없는가. 주양육자인 동료의 탈락이나 소외를 지켜본 적이 있는가. 그런 직장에 다니면서 아이 가질 생각이 있다면 정말 촘촘하고 치밀하며 전환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반대로 그동안 아이 때문에 매일 칼퇴근하거나 수시로 휴가를 내거나 길게 휴직하는 주양육자 동료 때문에 억울한 적이 있었는가. 혹시 그러고도 그 동료가 고과를 잘 받아서 배가 아픈 적이 있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직장, 반드시 사수하시길. 다음 글에서는 프리랜서, 외국계, 중소기업, 공무원으로서의 ‘일-가정 양립 서바이벌 연대기’가 이어진다.
*칼럼니스트 송지현은 사회생활과 잉태를 거의 동시에 시작한 ‘11년차 워킹맘’이자 그동안 다섯 번을 이직(당)한 ‘프로 경력단절러’입니다. 한부모 가정의 가장으로서 2인분의 몫을 해야 하는 ‘시간빈곤자’이나 실상은 1인분, 아니 0.5인분조차도 할까 말까 하기에 스스로를 반쪽짜리 ‘파트타임 엄마’라 칭합니다. 신문방송학 전공 후 온갖 종류의 대필을 업으로 삼아왔지만 이번 연재를 통해 처음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쓰게 된 ‘생계형 글짓기 노동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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