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태원에서 교실로… 코로나는 '약한 고리'를 향한다(이민경)

[특별기고] 이민경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공인노무사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기준 이미 전국 어린이집 아동 열 명 중 여섯 명에 가까운 57.0%의 인원이 긴급보육을 통해 어린이집에 등원을 하고 있어, 사실상 어린이집은 정상등원과 유사한 형태로 변칙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초등돌봄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아 긴급돌봄 신청자 대비 참여율은 지난달 이미 80%대를 돌파했으며, 일부 지역의 경우 90%도 넘어서는 등 수용여력이 한계에 달한 모양새이다. 교육당국은 이제 와서 뒤늦게 돌봄교실 이용자격을 제한하고 이용 희망자들에게 대기순번을 부여하겠다고 밝혀 학부모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상황이 진전되면 진전될수록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역시나 하는 실망감으로 바뀌고, 결국 본격적인 등교개학을 코앞에 둔 상태에서 터진 이태원발 집단감염은 이제 돌봄과 노동에 대해 전혀 다른 차원의 논의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 학교가 방역의 최전선? 싸울 사람도 무기도 없는데

금번 이태원발 집단감염을 바라보는 워킹맘의 심경은 복잡하다. 아직 본격적인 등교개학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터져 차라리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동시에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다시 던지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아이들을 학교에 마음 놓고 보내지 못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학교가 방역의 최전선’이라 하면서 최전선에서 싸울 사람도, 무기도, 전략도 부재한 그야말로 총체난국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교사 1인당 학생 수가 너무 많다. 이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부터 초·중·고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교사가 지극정성으로 살핀다 하더라도 이는 교사 1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게다가 전통적 업무영역이던 학습과 생활지도에 추가로 위생 및 방역까지 막중한 책임이 교사 1인에게 집중되는 구조는 안 그래도 보수적인 교사들을 더더욱 몸 사리게 만든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학교라는 공간은 개별 교실 하나하나가 이미 ‘콜센터’ 수준의 밀집도의 환경인데다, 학교 내 식당, 세면대, 도서관 등의 다양한 공용공간은 그야말로 바이러스 전파에 있어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등교개학 재개 시 2차 감염은 이미 전문가들 사이에서 '디폴트'로 예견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학교방역의 실질적인 컨트롤 타워 역할을 수행해야 할 보건교사부터 태부족 상태이다. 보건교사가 있는 학교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보건교사가 없는 학교도 부지기수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가 방역의 최전선으로서 기능해주기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에 가깝다.

학교는 교직원과 학교 관련 업무 종사자들의 노동공간이다. 하지만 이 공간의 주체인 ‘노동자들’은 학교라는 공간 내에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고 있는가, 더 나아가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목소리(Voice)’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자신 있게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목소리(Voice)’기능의 부재가 결국 학교방역의 총체적 난국을 초래하면서 이제 ‘돌봄재난’에 이어 ‘학교재난’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 현실 세계를 닮아 있는 학교라는 ‘노동공간’

'타이트한 인력 운영, 열악한 근무환경, 한정된 예산으로 인한 선제적 개선 조치는 사실상 불가능….'

대한민국 여느 회사의 전형적인 노동환경이다. 하지만 장소를 학교로 바꿔 대입해봐도 놀라울 정도로 잘 들어맞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뼈아픈 공통점은 바로 그 현장의 주체들이 금번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상황에서 ‘목소리’를 잃고 강제로 음소거를 당한 상태라는 점이다.

그간 교육부의 수차례에 걸친 개학연기 및 온라인수업 결정과 실행에 대한 일련의 논의과정에 현장의 목소리는 빠져 있었다. 소수의 행정관료를 제외하면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들이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일례로 당초 긴급돌봄교실 운영방안 발표 시, 교육당국의 생색내기성 긴급돌봄에 대해 학부모 집단은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며 강하게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이 부분이 개선돼 긴급돌봄교실 운영시간과 이용가능대상이 확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자 이번엔 그 돌봄 수행의 주체인 돌봄담당 교사들이 긴급돌봄교실 확대운영에 따른 식사, 방역, 공간 및 인력부족 문제 등에 대해 교육당국을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식사 및 간식 제공 관련 문제 등에 있어서 부족하나마 일부 개선이 이루어졌다.

온라인 수업도 마찬가지이다. 애초에 온라인 수업을 할 준비가 미처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온라인 수업 및 온라인 개학이 전격적으로 결정되고 나니 부족한 IT 인프라 및 콘텐츠 문제는 물론 학생들 생활지도 등 다양한 부분에서 온라인 수업의 한계가 또 드러났다. 이 중 서버 증설 등 기술적인 문제는 이제 거의 해결됐지만 학교라는 공간이 가지는 교육적 함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 중이다.

물론 금번과 같은 전무후무한 재난위기상황에서 그때그때 의견을 듣고 피드백을 이만큼 해온 것도 이미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일련의 과정이 ‘주체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이었고, 장기적인 비전과 계획에 입각한 합리적인 의사결정이었다기보다는 단기적인 미봉책의 연속이었기에 우리는 결과적으로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을 맞이하게 돼버렸다.

차라리 처음부터 온라인 수업을 기본 방침으로 삼고 준비했더라면,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긴급돌봄을 좀 더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현행의 학습진도 빼고 출결체크에 급급한 온라인 수업 방식 대신 학생들의 생활지도 및 취약계층 학생들에 대한 관리 위주로 온·오프 병행전략을 구사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집합금지명령'이 내려진 이태원의 한 클럽 앞 ⓒ베이비뉴스

다시 시계를 석 달 전으로 돌려보자.

코로나19로 인한 판데믹이 예견되던 초창기로 돌아가 교육부 소속 공무원뿐만이 아니라 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는 교사그룹, 학교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다양한 주체들, 학생과 학부모, 그 외 각 분야 전문가 그룹들을 모두 모아놓고 중장기 시나리오와 단기 액션플랜을 함께 구성한 후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단계마다 의사결정을 해나갔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학교는 그 정도로 민주적이지 않다. 오히려 굳이 따지자면 민주화가 가장 더디기로는 대한민국 '넘버원'이다.

대한민국은 독재정권으로부터의 ‘민주화’는 이룩했지만 직장민주주의로 대변되는 생활 민주주의는 아직 걸음마 단계이다. 학교민주주의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학생들은 ‘인권’이라는 기본권조차 아직 보호받지 못하고 있으며 교사들의 ‘노동권’ 역시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각 주체들의 ‘권리 주장’은 요원한 일이다.

안전한 ‘노동환경’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파워, 그리고 그러한 노동환경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 집단은 대한민국에서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러한 집단을 우리는 ‘갑’이라 부른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교육’이란 ‘갑’의 지위에 올라설 수 있는 가장 합법적이고 검증된 우아한 수단이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들 ‘갑’이 되기 위해 교육에 목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학교라는 공간을 둘러싼 코로나19관련 다양한 논의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와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점이 바로 본격적인 등교개학을 앞둔 교육현장에 방역상 구멍을 만들며 전 국민을 불안에 떨게 만들고 있다.

◇ 과외·학원·학교를 향한 집단감염이 의미하는 것

많은 이들이 실감하고 있듯 코로나19의 잔인성은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는 데 있다.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의 가장 약한 고리는 바로 ‘교육’이다. 금번 이태원발 집단감염은 우리가 ‘뭣을 중허게’ 여기고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들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이 우리 사회 전체를 어떻게 위험에 빠뜨리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공교롭게도 금번 이태원발 집단감염의 최악의 사례는 과외, 학원, 학교(특히 고3 수험생) 등 모두 ‘교육’을 매개로 한 공간에서 나왔다. 학교가 쉬니 부족한 학업을 보충하기 위해 과외를 하고 학원을 보낸다. 대입준비를 위해 일부 학교는 쉬쉬하며 고3 대상 등교수업을 강행했다.

입시지옥을 통과하고도 안정된 일자리를 위해 공무원과 전문자격사 시험을 준비하던 노량진과 대학가의 수험생들은 만에 하나 확진자가 되면 꽃다운 청춘을 바쳐가며 준비해온 시험 기회조차 박탈당할 위기에 놓여 있다. 아마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누군가는 증상이 있음에도 이를 숨기기 위해 해열제를 먹고 고사장에 들어올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또 다른 대규모 집단감염이 발발할지도 모를 일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목숨 걸고 공부할 수밖에 없는가. 만약 대한민국에서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누구나 원하는 꿈을 꿀 수 있으며, 각각의 꿈이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최소한의 인격권을 보장받으며,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대우를 보장받는 노동환경 하에서 일할 수 있다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지금과 같이 목숨 걸고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가 드러낸 대한민국의 가장 약한 연결고리는 사실 ‘교육’이 아니라 바로 ‘노동’일 것이다. 만약 직장 내에 누구든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수평적인 조직문화가 자리 잡혀 있다면 우리는 누구에게도 ‘갑질’ 당하지 않고 각자 꿈꾸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을 구성하는 주체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플 땐 아프다고 이야기할 수 있고, 일이 너무 많으면 많으니 사람을 더 뽑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고, 나의 노동환경이 안전하고 위생적이지 않으니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 낼 수 있어야만 우리는 근시일 내에 닥쳐올 것이 분명한 다음 위기상황에 훨씬 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부는 개학 일주일 연기할지 2주일 연기할지 고작 이런 결정을 내리는 주체로서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키워낼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조성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진 ‘민주시민’을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 교육부는 최소한 이런 고민을 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 토양이 갖춰졌을 때에야 비로소 학교는 방역의 최전선으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다시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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