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스토킹, 돌봄교실 장기미제 공약의 행방
[탐사K] 스토킹·돌봄교실 ‘장기 미제 공약(空約)’의 행방
■ '장기 미제 공약'을 찾아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은 수십 년을 끌었던 대표적인 '장기 미제 사건'이었다. 유족과 시민들은 오랜 세월 괴로움과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범인은 결국 잡혔다. 그는 시효가 지나 처벌받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어서야 입을 열었다.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정의가 구현될 것일까?
2020년 4월 대한민국은 총선거(總選擧)를 눈앞에 두고 있다. 공약이 쏟아진다. 십수 년, 수십 년 묵은 내용도 눈에 띈다. '장기 미제 공약' 정도로 부를만하다.
KBS 탐사보도부는 그동안 뉴스9 리포트(4월 9일)와 총선기획 특집 방송(4월 10일), 디지털 연속기획으로 공약의 이면을 들여다봤다. 그 마지막 이야기다.
■ '기약 없는 공약(空約)' 스토킹 처벌법
2018년 미투 운동이 본격화됐다. 스토킹 행위 처벌 법이 없다는 것은 당연히 화두가 됐다. 오래된 주제다. 국회에 관련 법안이 상정된 지 20년이 지났다. 공약으로 발표된 역사도 유구하다.
20대 국회에 나온 관련 법안은 5건이다. 발의 정당도 다양하다. 여러 정당 사이에 별로 이견은 없다는 얘기다. 2년 전 정부가 입법 예고도 했다. 교섭단체 대표 연설 단골 주제다. 그러나 단 한 건의 법안도 상임위를 넘지 못했다. 회의록 봐도 별로 논의도 없다. 결국 공약으로 다시 나왔다.
입법이 안 된 이유가 뭘까? 공약을 낸 당 측에 물어봤다.
송기헌/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측 간사
"스토킹 범죄 처벌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여야 입장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다 동의합니다. 근데 어떤 범주까지를 처벌할 수 있느냐 개념 구성이 어려워서 법으로 규정 못 하고 있는 거죠. 공약을 제시할 때 기초 작업이 덜 된 상태였다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윤관석/더불어민주당 총선공약기획단장
"부처 간 이견도 있고 하다 보니까 조정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는데 법이 오래 걸리는 법도 있더라고요. 바로 한 2년 내 되는 것도 있고 또 국회를 몇 번 거쳐서 되는 법들도 있고. 저희가 21대 국회에서는 잘 통과되지 않을까 이렇게 기대를 하고 노력을 하겠습니다."
이번엔 미래통합당도 관련 공약을 내놨다. 다음 국회에서는 잘 될까?
고미영/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데이트 폭력 근절하겠다, 스토킹 처벌법 사람들이 관심이 많으니까 하겠다. 선언만 남아있고, 선언에 걸맞은 이행을 하기 위한 절차나 이런 것들을 진행하고 있지 않죠. 그래서 사실 21대 총선을 앞두고 나온 각 당의 공약도 보면 저는 그걸 보면서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아, 참 성의 없다. 20대 총선, 지난 대선에서 나왔던 공약을 그냥 그대로 쓰고. 그럼 저희도 몇 년 동안 똑같은 이야기를 해야 하고... 그런 상황들이 참 많이 아쉽습니다."
고통은 오롯이 피해자들 몫으로 남아있다.
■ 저희 아빠는 재판을 받은 적이 없어요.
이세빈 씨(가명)는 10대 때부터 아버지의 폭력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술을 먹고 때렸다. 나중에는 그냥 때렸다. 물건을 부수고 난동을 부려 경찰이 출동하기 일쑤였다.
"하루는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고 경찰서에 갔고, 저희는 응급실로 갔어요. 거기 해바라기센터라고 생겼더라고요. 상담도 받고 그분들이 아버지 상황도 알려주셨어요. 그런데 상담선생님이 아버지가 벌써 집에 갔다는 거예요. 저희는 뭐 들고 나온 것도 없는데 짐도 챙길 수 없고…."
아버지는 제대로 벌을 받은 적이 없다.
"처음 경찰에 신고했을 때 짧게 구치소인가에...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한 며칠 계셨던 것 같고요. 6개월 정도 알코올 중독 치료받는 곳에 지내셨어요. (재판받으신 적이 없는 거죠? 아버님은?) 네 그렇죠. 재판받은 적은 없어요."
이때 적용된 제도가 바로 가정폭력처벌특례법 상 상담조건부 기소유예제다.
"아버지가 상담받고, 어머니도 상담받고, 그리고 아버지 술 먹는지 안 먹는지 전화해서 점검하겠다. (효과가 있었습니까?) 알코올 문제랑 폭력이 연결돼있는데 워낙 오랫동안 드셨고. 이게 좀 효과는 별로 없어요. 계속 반복되니까요."
■'여성계 숙원' 상담 조건부 기소유예 폐지, 왜 안 지키나
상담을 전제로 기소를 유예해주는 제도가 법으로 도입된 건 2008년이다. 가정폭력을 무조건 처벌하는 것이 실효성이 떨어지고 가정 회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도입 취지였다. 가정폭력 사범을 기소해 처벌하더라도 보복 폭력을 행사해 피해자들을 두 번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배경이었다.
그러나 여성계에서는 사실상 가정폭력에 면죄부를 주는 제도라며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대검찰청 자료를 보면 가정폭력 사건 접수 대비 기소율은 약 9.4%이다. 범죄 전체를 놓고 보면 기소율이 30% 수준인 것을 고려하면 가정폭력 사건 기소율이 상대적으로 매우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여성계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20대 총선 공약으로 상담조건부 기소유예제 폐지를 내걸었지만 이행하지 않았다. 같은 공약은 이번 21대 총선에서도 반복됐다.
이행 노력은 어느 정도나 기울였을까? 20대 국회에서 관련 내용이 담긴 법안은 3건이 제출됐다. 이 가운데 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은 2건으로, 모두 상임위 소위 단계에서 멈춰있다. 가정폭력처벌특례법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20대 국회에서 제출된 가정폭력처벌특례법 개정안은 32건에 이르지만, 법안이 통과된 것은 1건에 불과하다.
역설적인 점은 상담조건부 기소유예제 도입 법안을 만든 사람이 과거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우윤근 전 민주당 의원이라는 점이다. 이제 와서 민주당이 이 제도를 폐지하겠다고 공언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여성계 시각에서는 '병 주고 약 주고' 같은 상황이다.
송기헌/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측 간사
"피해자가 화해를 원한다는 답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 대답이 100% 본인 의사가 아닐 경우가 많다는 얘기예요. 강요된 대답일 수가 있죠. 사회 관습적으로 강요되는 거예요. 2008년도만 하더라도 이런 것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달라졌죠. 그것을 미리 못 봤던 점을 분명히 반성해야 합니다. 선도적으로 못한 점에서 여성들한테 사죄해야겠죠. 지금이라도 고쳐야 하는 겁니다. 여성의 관점에서, 피해자의 관점에서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는 거죠."
분명히 이 제도가 목표로 하는 것처럼 가족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사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때로 작다고 내버려둔 가정폭력이 끔찍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 단골 공약 '돌봄 교실'…입법·정책은 실종
취재진은 지난 2월 중순 경기도 수원의 한 초등학교에 돌봄교실 추첨을 앞두고 취재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이미 열 군데 가까운 학교에서 협조를 거절한 뒤였다. 이 학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신규 입주 아파트가 많아 신입 학생도 많은 곳이었다.
학교 관계자
"저희도 약간 경쟁이 세서 어머님들이 다 약간 예민해지시거든요. 그 부분에 관해서도 그런 부수적인 일을 만들고 싶진 않으시다 그러셔서요."
경기도 남양주의 또 다른 학교. 코로나19로 추첨장에는 학생 한 명 당 학부모 1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 추첨장 입구에 길게 줄 선 학부모들 사이에는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학부모 A
"몇 명 뽑는데 몇 명인 거지요?"
학교 관계자
"저희 66명 뽑는데 100분 지원했어요. 1, 2학년 합쳐서"
학부모 B
"합쳐서 60명이에요?"
학교 관계자
"네. 열심히 뽑으시면 돼요."
곧 추첨이 시작되고 표를 뽑은 학부모들이 하나둘 학교를 나섰다.
"망했어 하하" "몇 번이야 00 엄마?" "나 81번"
취재진이 찾은 경기도 고양시의 또 다른 학교는 비교적 작은 학교라서 그런지 미달자가 많지는 않다고 했다.
학교 관계자
"학급이 특이하게 늘고 몇 명이 더 신청해서 지금 추첨을 부득이 하는 거에요. 다른 학교는 돌봄교실도 정원이 다 안 차거나 교실도 남아도는 상황인데 일반적인 학교 상황이 아니라고."
학교 건물 밖에서 추첨이 끝나길 기다렸다. 어머님 몇 분을 만날 수 있었다.
학부모
"여기는 워낙 학교가 작아서 그런지 항상 제비뽑기했거든요. 대부분이 맞벌이인데 그런 걸 늘렸으면 좋겠어요.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낳고도 편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주면 좋죠."
돌봄교실 추첨 전쟁은 이제 연례행사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돌봄교실 이용 학생 수는 2017년 24만 5천여 명에서 올해 30만 4천여 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약 2만 명가량이 추첨에서 탈락한다. 전체 학생 수를 고려하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박영선/더불어민주당 의원(2018.4.11. 지방선거 정책 발표 기자회견)
"서울시에 전체 초등학생 수가 42만 8,333명인데 이 가운데 초등돌봄 이용자 수는 30,706명으로 8.1%밖에 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관련 민원 1,467건 가운데에도 초등돌봄 민원이 862건으로 58.8%를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 수치만 봐도 지금 워킹맘들이 얼마나 힘들게 일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러한 수치라고 생각됩니다."
정당들의 공약을 살펴보자.
공약을 분석하던 중 한 가지 드는 의문이 있었다. 돌봄교실 정책에 국회가 어떤 역할을 했을까? 돌봄교실은 일선 학교와 교육청이 운영하고 교육부가 총괄한다. 예산도 지방비다. 국회가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입법 활동을 통해서인데 정작 돌봄교실은 법적 근거가 없다.
20대 국회에는 돌봄교실의 법적 근거 마련을 위해 더불어민주당 김한정 의원이 대표 발의한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2017년 9월 발의한 이 법안은 국회 교육위원회 법안소위에 13차례 상정된 기록만 남아있을 뿐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물론 20대 국회 처리 전망은 불투명하다.
백운희/정치하는 엄마들 공동대표
"돌봄교실 문제를 들여다보면서 가장 놀란 게 관계 법령이 없습니다. 법 속에서 체계를 잡아야 하는데 학교마다 다르고 교육청마다 다르고. 저희들이 이런 문제의식을 느끼기 전에 국회가 법을 만들었어야죠. 기본부터 바꿀 의지가 있었는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21대 총선 공약으로 '온종일돌봄특별법 제정'을 내걸었다. 돌봄교실 관련해 국회의원 선거 공약이라고 부를 만한 첫 공약이 2020년에야 나온 셈이다.
■ 공약, 이번엔 믿어볼까요?
KBS 탐사보도부는 지난 석 달 동안 주요 정당들의 공약 이행 의지를 검증하고자 했다. 여기 담긴 내용은 취재를 마치고도 미처 방송에 담지 못한 이야기들이다. 중요하지만 소외된 주제들이 많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취재하면서 책임 있는 답변을 듣기 쉽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공약의 시효'가 끝나야만 입을 열 것인가?
이번 21대 총선을 앞둔 각 정당의 공약 이행 의지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시사기획 창『공약, 이번엔 믿어볼까요?』다시보기로 시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