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장하나의 눈_그 길 (장하나)

[장하나의 눈]그 길

 

1996년 늦봄이던가? 대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워크맨’을 사기 위해 용산전자상가에 갔다. 제주 출신인 나에게 ‘그 길’은 초행이었다. 신용산역에 내려 전자상가까지 가는 ‘그 길’. 나는 여태껏 단 한 번도 그날의 일로 울어본 적이 없는데, 몇 자 적다 보니 25년 만에 눈물이 흐른다. 그날은 오늘처럼 덥고, 오늘처럼 건조하고, 오늘처럼 불쾌한 날이었다. 록을 즐겨 듣던 시절이라 ‘소리가 칼칼한 산요 제품을 사야지’, ‘어떻게 하면 바가지를 안 쓸까?’ 같은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예상도 없이 신용산역에서 내려 왕복 8차선 대도로의 바로 다음 이면도로에서 성매매 집결지를 보았다. 대낮에 버젓이 아무런 숨김도 거리낌도 없이 양쪽으로 늘어선 거대한 선홍색 진열장의 행렬. 분노도 아니었고, 슬픔도 아니었고, 역겨움도 아니었다. 형언할 수 없는 생소한 감정이 나를 순식간에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난 터벅터벅 걸었고, 파란색 산요 카세트플레이어를 샀고, 음악을 들으면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나의 동족이 상품처럼 진열된 광경을 보고는, 비로소 이 사회에서 나의 위치와 가치를 파악하게 되었다. 내가 자유인이라는 사실이 의심스러웠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스치는 남성들을 보며 ‘저들에게 나는 얼마나 낮은 존재일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또한 친구로 어울리던 남성들을 보면서 ‘저들은 얼마나 낮은 존재일까?’ 궁금했다. 그들이 포르노를 즐겨 보거나 여성의 외모와 섹시함을 평가하는 것에 스스럼없다는 건 알았지만, 스스로 또는 집단으로서의 ‘남성’에게 얼마나 관대한지 어느 선까지 허용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손정우의 미국 송환이 무산되고 손정우의 범죄사실과 형량이 재조명되었다. 나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무지한 나 자신에게 벌을 내리고 싶을 정도로 원망스럽다. 미국 컬럼비아특별구 연방검사가 법원에 제출한 기소장을 보면 손정우가 운영한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에서는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끔찍한 아동 성착취 범죄가 자행된 사실이 세세하게 열거돼 있다. 손정우는 이미 징역 18개월로 모든 죗값을 치르고 나왔다.

18개월… 그게 나의 목숨값이다. 25년 전 신용산역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이제 보니 모멸감에 가깝다. 5년 뒤면 손정우는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에 취업할 수도 있다. 이게 2020년 한국 사회에서 나의 위치, 나의 가치다. 나나 내 딸은 가져다가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그런 벌레 같은 존재다. 대통령은 성범죄자 안희정의 모친상에 국민세금으로 조화를 보내고, 유력 대선주자인 이낙연 전 총리를 필두로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많은 정치인이 안희정을 만나 위로했다. 동시에 나에게 모멸감을 주었다.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이 집단적으로 성범죄에 무감각하다는 사실이 평범하고 힘없는 여성들에게 얼마나 큰 불안감을 주는지 결코 모르는 것 같아 공포스럽다. 정치 아무나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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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202007101459471&code=124#c2b#csidx53f8bfacf36bd1e90ce291b888458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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