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성 고정관념을 걷어내면 본질이 보인다
성 고정관념을 걷어내면 본질이 보인다
경찰 마스코트 ‘포순이’가 바지를 입는다. 1999년 포순이가 탄생한 지 21년 만이다. 경찰청은 여경을 상징하는 포순이가 치마 대신 바지를 입도록 바꾸고 속눈썹도 없앴다. 그간 포순이의 복장이 성별 고정관념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있었다. 포순이가 입은 셔츠는 분명 근무복인데 실제 여경들은 현장에서 바지를 입고 일하기 때문이다. 여경의 상징을 치마에 고정할 필요가 없었다.
신생 저비용항공사 에어로케이의 ‘젠더리스 유니폼’도 화제다. 오는 8월 청주공항에서 운항을 시작하는 이 항공사의 유니폼은 남녀 모두 상의는 티셔츠, 하의는 바지다.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는다. 디자인 자체에 남녀 구분을 최소화한 건 국내 최초다. 항공사가 가장 중시해야 할 가치인 ‘안전’을 고려해 디자인했다고 한다. 유니폼의 활동성을 늘리려다 보니 자연스레 여성성을 강조하던 업계 관행에서 벗어나게 됐다.
‘여성은 치마, 남성은 바지’ 또는 ‘여성은 분홍, 남성은 파랑’ 같은 성별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들이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런 거 따지지 않습니다
지난 연말 한 방송국 연예대상 시상식. ‘펭수’는 화관을 쓰고 흰색 드레스를 입었다. 그는 남자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펭수는 사람들이 종종 성별을 물어볼 때면 “그런 거 없습니다”라고 응수했다. 펭수는 펭수일 뿐. 팬들도 그의 정체를 밝히려는 대신 존재 그대로를 존중한다.
이미 패션계에서는 성별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오롯이 ‘나’를 표현하는 젠더리스룩이 대세다. 유니섹스가 여성이 착용해도 무방한 ‘보이시’한 스타일에 가까웠다면, 젠더리스는 남성성·여성성의 경계를 벗어난다.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진 하이힐·핸드백·리본 등이 남성복에도 차용되는가 하면, 성별 구분을 두지 않은 제품을 내놓는 브랜드도 있다. ‘젠더리스 모델’로 활동하는 음혁진씨는 “나를 표현하고 싶은 대로 입을 수 있는 범위가 넓다”고 했다. 그는 “국내에서도 페미니즘 등의 영향으로 남성스러움·여성스러움이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있다”며 “젠더리스 트렌드는 꾸준히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화장품도 경계를 뛰어넘는다. 국내 최초 젠더뉴트럴 메이크업 브랜드를 표방한 라카(LAKA)는 ‘컬러는 원래 모두의 것’이라는 카피를 던진다. 광고에는 립스틱을 바르는 남성과 여성 모델이 함께 나온다. 향수도 성별 분류 방식을 탈피하고 있다. 그간 여성은 꽃이나 과일처럼 달콤하고 상큼한 향, 남성은 나무나 풀에서 온 시원한 향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영국의 시장조사업체 민텔에 따르면 성 중립적인 향수는 2010년 전체 시장의 17%에 불과했지만 2018년 51%까지 성장했다.
20여 년 전 제품의 성 구분을 없앤 영국의 향수업체 ‘오르몽드 제인’의 설립자 린다 필킹턴은 <가디언>에 자신의 경험을 전했다. “한 남성이 꽃과 재스민, 프리지어향을 선택했을 때 깜짝 놀랐다. 다른 남성은 장미향을 사가더니 여자의 향수를 팔았다며 전화로 항의했다. 나는 ‘당신이 그 향이 맘에 들었다면 무엇이 문제냐’고 했다. 그때 성별로 분류하는 철학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성을 구분하지 않는 미국의 그루밍 제품브랜드 ‘메이드 포 유’를 운영하는 빅(BIG)의 스피로스 그라시아스 글로벌 개발센터 부사장은 <월스트리트저널>에 말했다. “발목 주변과 턱을 면도하는 것이 서로 비슷하고 겨드랑이 면도는 목 아랫부분을 면도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고자 하면 성별은 사라진다.”
작은 변화가 모이면
내년 개봉을 앞둔 영화 <신데렐라> 속 요정 대모 역할은 남성 배우인 빌리 포터에게 돌아갔다. 그는 지난 3월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마법에는 젠더가 없다”고 말했다. 레드카펫 위에서 상반신은 턱시도, 하반신은 드레스인 의상을 선보이는 등 젠더리스 패션으로 유명한 그는 “사람들이 옷에 너무 많은 제한을 둔다. 바지가 강하고 원피스가 약하다는 식의 대화에는 관심 없다”며 “내가 새로운 대화에 앞장서고 싶다”고 말했다. 국내를 비롯한 공연계에서는 성별에 관계없이 배역을 정하는 ‘젠더프리’ 캐스팅이 활발하다.
올해 국가인권위에 접수된 첫 진정은 ‘영유아용 상품의 색깔별 성별 표기로 인한 차별’을 시정해달라는 것이었다. 진정을 낸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은 일부 영유아용 옷과 문구류에 여아용은 분홍색, 남아용은 파란색이 정해져 있어 아이들이 색을 고를 권리를 침해한다고 봤다. 인권위는 7월 20일 전원위원회에서 이 안건을 의결한다. 강미정 정치하는 엄마들 활동가는 “당장 눈에 띄게 바뀌진 않더라도, 대형업체 한두 곳이 문제 제기를 받아들여 상품 색깔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구분을 없애나간다면 업계 전체에 점진적인 변화를 이뤄내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장난감·아동복·동화책 등에서 고정관념을 지워나가는 시도는 늘고 있다. 지난해 바비인형을 만드는 마텔 사는 남성 또는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에서 벗어난 성중립 인형을 출시했다.
‘젠더리스’는 일종의 트렌드로 소비되고 있다. 현실로 눈을 돌리면 여전히 이분법적 성 고정관념은 단단하다. 지난해 1월 덴마크의 언론인 니콜린 라슨은 몇 달간 ‘성중립 층(floor)’을 선보인 핀란드의 스톡만 백화점을 다녀온 뒤 온라인매체 바이스에 글을 썼다. 백화점의 시도가 일회성 마케팅이라는 느낌을 받은 그는 핀란드의 성소수자·인권활동가 미나 코르테스마에게 “이 캠페인이 정말 변화를 불러올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코르테스마의 답은 ‘그렇다’였다.
“유명 백화점이 젠더 다양성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면, 사람들은 그저 성가신 활동가들이 생각해낸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인식을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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