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국회에 더 많은 류호정과 장혜영을 (이고은)
국회에 더 많은 류호정과 장혜영을
지난 4일 분홍색 원피스에 운동화 차림으로 국회 본회의장에 등원한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모습을 본 당신의 첫 반응은 어땠습니까? 며칠 동안 정치권과 언론에서 여러 가지 평론이 쏟아진 뒤인 현재 이 시점이 아니라, 아무런 정보 없이 처음 그 복장을 접했던 그 순간 당시에 말입니다. 자신이 류 의원의 모습을 처음 보고 든 생각이 무엇이었나를 되돌아볼 때, 자신이 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혹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드러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곧바로 ‘장소에 안 맞는 옷 아닌가?’, ‘나라면 저렇게 입고 못 갈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심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 조금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국회라는 공간, 국회의원이라는 직책에 알맞은 스테레오 타입을 상정하고, 류 의원이 그러한 정형과 다르다는 것에 감정적으로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논란 직후 류 의원은 이 문제를 여성의 문제로 공론화했습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성들이 일터에서 흔히 겪는 일을 저 또한 국회라는 일터에서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복장에 대한 성희롱적이고 인신공격성의 시선, 그런 문화는 일하는 여성들이 ‘사회생활’로 감내할 게 아니라 공론장에서 비판받아야 할 대상”이라고도 했습니다. 사소한 문제를 침소봉대한다는 비난의 여론도 일었지만 류 의원은 이 일을 사소하지 않은 20대 청년 여성의 문제로, ‘공공’의 의제로 끌어올렸습니다.
과거 국회의원의 의상과 관련한 이슈들과 비교하자면 류 의원의 의상 논란은 분명히 여성, 특히 청년 여성에 대한 혐오를 바탕으로 합니다. 유시민 전 의원의 ‘백바지’ 등원은 진보정치인의 ‘탈권위’ 행보로 평가받았지만, 류 의원에게는 입에 담기도 민망한 여성 폄훼가 쏟아졌습니다. 정의당은 “정치인다운 복장과 외모를 강요함과 동시에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행태”에 대해 논평으로 대응했습니다.
과거 강기갑 전 의원의 한복이나 단병호 전 의원의 점퍼는 농민과 노동자로서의 계급과 그 당사자성을 보여주는 정치적 의상으로써 대중에게 수용되었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20대 여성의 모습을 했던 류 의원에게는 정치적 당사자성이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국민을 대의하는 국회에서 20대 여성을 대의하는 일이 낯설고 이질적인 일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성 정치인의 의상에 대한 억압은 비단 한국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미국, 영국, 캐나다 등 해외에서도 의회 내 여성 정치인의 의상을 두고 다양한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우리 사회는 여성이 여성이라는 생득적 조건을 공적인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터부시합니다. 대신 유사남성 혹은 무성의 존재로서 역할하고 기능하기를 기대합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분류된 타자”라고 설명합니다. 류 의원의 분홍색 드레스는 국회라는 남성적 공간에서 ‘타자’로 분류된 여성의 몸(복장)이 왜 그 공간 속에 ‘주체’로서 존재하면 안 되는지 질문합니다.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억지로 유사남성이나 무성인 것처럼 속이지 않고, 여성으로서 있는 그대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겠다고 선언합니다. 젊은 여성의 몸이 무차별적으로 대상화되는 현실을 고스란히 증명합니다. 그것은 20대 여성인 류 의원이 아니라면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정의당 장혜영 의원의 ‘절름발이’ 표현 지적도 눈여겨볼 이슈입니다. 지난달 28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이광재 의원이 홍남기 경제부총리에게 “경제부총리가 금융 부분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 정책 수단이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 데서 논란이 촉발됐습니다. 장 의원은 “절름발이라는 표현은 사실 명백하게 장애를 비하하는 표현”이라면서 이 의원의 발언을 지적했습니다.
절름발이라는 표현은 국어사전에도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설명되어 있을 정도로 장애 비하 용어임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미디어에서도 이러한 표현을 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전에도 “사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조화되지 아니한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써 설명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때문에 장 의원이 지나치게 미시적인 문제를 지적했다던가,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를 보는 시각을 보였다는 등의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사회적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의도 없이, 관행적 표현이라고 해서 그런 표현을 무분별하게 쓰는 것을 무결하다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혹은 가족이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라고 생각해본다면 문제는 쉬워집니다. 누군가를 명백하게 비하하는 말을 해놓고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서, 당사자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사회가 2류, 3류 인간을 분류하고 그 편견을 무심결에 공고화하는 일은 폭력이 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본 이라면 관행이라는 말만으로 쉽게 이런 말들을 사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국회와 같은 공적 공간에서 국회의원과 같은 공인은 이런 표현에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다행히 이 의원은 “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드린 점을 진심으로 사과 드린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장 의원은 장애를 가진 동생과 함께 지내면서 영화를 만든 영화감독으로도 유명합니다. 장애 비하 표현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장 의원은 당사자에 준하는 입장에서 수없이 고민하고 살아왔습니다. 정치권에서도 그동안 장애 비하 표현으로 문제가 된 일이 많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문제의식을 갖고 이에 대해 지적한 이들은 모두 장애인으로서 대표성을 갖고 국회에 입성한 당사자 정치인이었습니다. 장애라는 소수자성은 정파를 떠난 문제였습니다. 우리의 의회가 소수자에 대한 공감 능력이 낮은 주류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소수자의 의제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정치적으로 의제화하기 힘든 문제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면에서 어느 정도의 사회적 소수성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신의 주류성과 소수자성에 대해 뚜렷하게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저자 김지혜는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고정관념을 갖기도,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김지혜는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차별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경청함으로써 은폐되거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하고 싸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려져 있는 존재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때문에 무엇이 차별이고 무엇이 불평등이며 무엇이 폭력인지에 대해, 가려져 있는 존재들이 더욱 많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여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정치적 당사자들이 자신의 문제들을 공공의 의제로 우리 앞에 제시하는 사건들을 기다립니다. 우리 국회에는 더 많은 류호정과 장혜영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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