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플랫] ❝어린이에게 실패할 '경험'을 주자…아이는 그렇게 자란다❞

어린이에게 실패할 '경험'을 주자…아이는 그렇게 자란다

 

언니에게, 최근 다녀온 카페를 공유하며 함께 가자고 했다. 언니가 바로 되물었다. “노키즈존 아니야?” 언니는 작년에 아기를 낳은 후, 출산 전 다니던 많은 공간으로부터 출입을 금지당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동거부업소임을 표기하지 않은 업장도 많으니까. 황급히 찾아보니 다행히 아니었다.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관광지에서 방문했던 베이커리 카페가 생각난다. 들어가는 곳 어디에도 아동거부업소라는 표시가 없었다. 빵을 다 고른 후 계산대 쪽으로 돌아서자, 그제야 큼직하게 써둔 표시가 보였다. 알았으면 애초에 안 들어갔을 텐데, 집게로 집어 쟁반 위에 올린 빵을 다시 내려놓을 순 없어서 계산했다. 비겁하고 치사한 ‘꼼수’에 당한 게 2박3일 정도 분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이에게 실패할 '경험'을 주자…아이는 그렇게 자란다[플랫]

최근 10년 사이, ‘노키즈존’이라는 이름으로 아동을 거부하는 업장이 늘어났다. 사유는 보통 공개하지 않거나 두 가지 정도로 나뉜다. 어린이가 다칠 수 있어서, 혹은 운영상 편의(매장이 협소하다, 1인 업장이라 세심한 응대가 어렵다 등) 때문이다. 하지만 펄펄 끓는 뚝배기가 오가는 식당은 보통 아동거부업소가 아니고, 운영상 편의를 위해 특정 손님을 ‘거절’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차별이다. 아동거부업소가 보통 어떤 분위기의,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 매장인지 생각해보면 결국 이유는 하나다. ‘어린이는 시끄럽고, 주변을 어지럽힐 수 있으며, 보호자는 이를 제지하지 않으니 민폐다. 조용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다.’ 2019년 유엔 아동권리위원회가 “한국은 아동을 혐오하는 국가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하면서 언급한 여러 쟁점 중 하나가 아동거부업소 문제다. 인권위 역시 2017년 노키즈존 방침이 차별 행위에 해당한다고 봤다. 공간은 강력한 권력과 통과의례가 작동하는 곳이다. 출입을 제한할 수 있는가, 누가 그것을 결정하는가, 그리고 여러 가지 불편한 요소가 있을 때 무엇을 고려하고 누구의 욕망을 우선시하며 누구를 배제하는가는 아주 정치적인 문제이다. 학교 근처에서 자동차 속도를 시속 30㎞로 제한하는 ‘스쿨존 제한속도’를 완화하려는 움직임 또한 드세다. 안전은 원래 불편한 것이고, 스쿨존을 제외한 온 세상이 어른의 영역인데 어린이에게 ‘조금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심보가 우려스럽다. 아동 보행자 보호를 위한 ‘민식이법’을 빌미로 한 운전자의 아동혐오 발언도 온라인상에서 만연하다. 이렇게 어린이가 서 있는 곳을 땅따먹기하며 야금야금 갉아먹어가는 2022년, 넷플릭스에서 <나의 첫 심부름>이 공개되었다.
 

<나의 첫 심부름>은 1991년부터 비정기적으로 방영된 일본 리얼리티 쇼다. 생후 만 5년 이하의 어린이가 혼자서 첫 심부름에 나서고, 그 과정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프로그램이다. 한 편당 12분 내외인지라 가볍게 보기 좋은 <나의 첫 심부름>은 어린이가 등장하는 콘텐츠답게 ‘힐링’이라는 말이 붙기도 하며 인기를 끄는 중이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방송 출연 의사를 직접 결정할 수 없기에 어린이가 출연하는 방송에 언제나 회의적인 편이다. 그러나 ‘노키즈존’이라는 이름으로 순화한 ‘아동거부업소’가 창궐하고, 많은 어른이 아동 배제를 옹호하는 동시에, 미디어에 편집되어 등장하는 귀여운 아기만 좋아하는 세계에서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곳은 따로 있다. 바로 어린이가 어떤 환경 속에 있는가이다. 카메라의 줌 아웃처럼, 조금만 시야를 뒤로 당겨보자. ‘귀여운 어린이’보다, 그 어린이가 걷고 말하고 움직이고 부딪치는 동안 서툴지만 용감한 시도에 반응하는 주변의 환경과 어른에 집중해야 한다. 어린이에게 ‘경험’을 허용하는 사회와 환경, 그리고 이를 구성하는 어른의 역할 말이다.
 


어린이에게 실패할 '경험'을 주자…아이는 그렇게 자란다[플랫]

<나의 첫 심부름>에서 심부름 현장은 거대한 세트장이 된다. 안전을 위해 마을 주민으로 위장한 스태프가 촘촘히 배치되고, 어떤 어린이가 어떤 심부름을 맡았는지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이는 첫 심부름에 나선다. 슈퍼마켓에서 물건 사오기, 물건 배달하기, 세탁소에 빨래 맡기기…. 가족을 도울 수 있는 2~3개 정도의 과제가 어린이에게 주어진다. 심부름의 항목만큼이나 어린이의 환경이나 기질, 성향도 다양하다. 심부름해보고 싶어서 안달 난 어린이, 가기 전부터 겁을 먹고 피하는 어린이, 심부름을 까먹고 신나게 노는 어린이, 씩씩하게 나섰다가 겁을 먹고 길에서 20분 넘게 서 있는 어린이, 집으로 몇 번이나 되돌아가는 어린이…. 어린이는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열심히 묘안을 짜내기도 하며 생애 처음으로 혼자서 무언가를 해내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럴 때마다 힘껏 응원한다. 조금만 더, 할 수 있어! 왜냐하면, 곧 어린이를 반기며 기다려주는 세계와 마주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린이 손님에게 맞춰 응대하는 점원, 긴장한 어린이를 독려하는 이웃 주민, 시킨 것과 다른 물건을 사와도, 다 해내지 못해도 한껏 반겨주며 칭찬해주는 양육자는 매회 출연자가 바뀌어도 유지되는 설정이다. 기다림과 배려, 그리고 이해. 모두가 너를 응원하고, 또 거부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어린이를 보호막처럼 둘러싸고 있다.
 

심부름 두 개 중 하나를 완수하지 못한 어린이는 속상해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가 아이스크림을 주며 달래보려고 하지만, 어린이는 기어이 그 과제를 직접 해내고자 다시 집을 나선다. 작은 몸 안에 꽉 찬 책임감은 어른의 그것보다 절대 가볍지 않다. 주변 사람들이 어린이를 숨죽여 지켜보고 겁에 질렸을 때는 시식용 양갱을 먹여주며 독려한다. 가게 점원은 가게에 도착한 어린이가 입을 열지 못하면 긴장이 풀릴 때까지 물을 먹이면서 기다린다. 세탁소 사장은 장난기 많은 어린이가 세탁물을 꺼내기 전 한참이나 장난감을 자랑하며 딴짓을 해도, 일일이 감탄하며 아이가 마침내 심부름을 떠올릴 때까지 기다린다. 땀에 푹 젖어 도착한 어린이를 본 어른은 달려 나가 얼굴부터 닦아준다. 어린이는 종종 자신이 사와야 할 것을 잊어버리거나,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해 헤맨다. 아무도 다그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틀려도 괜찮고 무서워해도 괜찮다. 쭈뼛거려도 괜찮고, 낯선 어른에게 곧장 당당하게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해도 괜찮다. 마침내 심부름을 마친 어린이가 의기양양하게 돌아올 때, 그 얼굴은 집을 처음 나설 때보다 분명히 성큼 자라 있다. 중간에 포기한 어린이조차, 실패가 아니라 시도를 통해 성장한다.
 

📌[플랫]‘노키즈존’ 점주에게 아동을 차별할 자유는 없다
 

어린 시민은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무수한 시도와 실패 속에 몇 번의 드문 성공이 있다. 시도해야 실패와 성공을 경험할 수 있고, 실패를 허용받아야 또 시도할 수 있다. 실패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실패를 허용하지 않으면 시도를 가로막게 되고, 시도가 없으면 무엇도 배울 수 없다. “못하니까 하지 마.” 기회 자체를 박탈해버리는 것이다. 음료를 쏟거나, 떼쓰고 소리 지른다는 이유로 어린이가 어떤 공간에 머물기를 거부한다면 어린이는 공공장소에서 공존하는 방법을 경험할 수 없다. 요즘 양육자들이 자리에만 앉으면 유튜브를 틀어준다고 비난하지만, 그렇게라도 주의를 빼놓지 않으면, 다양한 것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어린이의 서툰 시도를 우리 사회는 너무나 미워한다. 서툰 시도와 당연한 실패를 곧장 ‘민폐’, ‘그렇기에 금지하고 지양해야 할 것’으로 치환하는 사고 구조가 얼마나 성인·비장애인 중심적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너희 중 날 때부터 커피에 시럽을 두 펌프 넣어달라고 주문할 수 있었던 자, 아동을 비난하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5월 4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원들 등 시민과 어린이들이 모여 노키즈존을 반대하고 차별금지법제정을 찬성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5월 4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원들 등 시민과 어린이들이 모여 노키즈존을 반대하고 차별금지법제정을 찬성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사회 전반적으로 강력하고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예를 들면, KTX에는 ‘유아와 동반한 고객은 어린이가 너무 떠들지 않게 주의’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항상 주의의 대상은 어린이와 양육자이다. 이런 환경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사람들은 조금만 불편해도 아이와 양육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애 좀 똑바로 봐라’라고 훈계할 자격이 있다고 착각한다. 이보다는, 어린이는 원래 좀 울거나 떠들 수 있다고 승객 전체에게 인지시키는 방향이 적절하다. <나의 첫 심부름>에서 어린이의 첫 독립을 지켜보는 주 양육자는 종종 눈물짓는다. 양육자가 아닌 이웃 주민들이 울컥하거나 감동하는 순간 또한 볼 수 있다. 어린이는 이런 다양한 정서적 지지와 연결고리 속에서 시도를 반복하며 자란다. 양육자와 집에 갇힌 채 어느 날 뚝딱, 전자레인지에 3분 돌린 것처럼 어른이 되지 않는다. 가족이 아니라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개개인은 서로의 환경이다. 어린이가 차별과 배제가 아닌, 배려와 허용 속에서 자랄 수 있는 최소한의 염치는 갖추자.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경향신문 플랫/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기사 전문 보기
https://m.khan.co.kr/culture/culture-bacgeneral/article/2022060715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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