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 사설/칼럼] 이준석 제명부터

     

    언어는 발화자와 수신자에 따라 움직인다. 누가 그 말을 언제 어디에서 왜 했는지를 소거하면 해당 언어의 의미를 왜곡하는 건 아주 간단하다. 특히 성폭력처럼 사회적 규범과의 관계에서 계속 의미가 급진적으로 변화해가고 있는 문제일 경우 정확한 언어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역사학자로서 성폭력에서 수치라는 감정을 연구한 조애나 버크는 많은 문화권에서 피해자들이 직접적으로 성폭력을 언급하기보다는 “나의 존엄”처럼 완곡어법을 사용했으며, 가해자들은 잔혹한 가해행위 자체를 구체적으로 떠벌린다면 피해자는 “사악한” 같은 감정적 묘사를 하는 경향을 발견했다. 일본에서 성폭력과 관련된 단어들이 “레이프”(rape)처럼 굳이 영어식 표현의 음가를 그대로 발음하는 것도 간접화법의 사례다.

  • [주간경향 |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나의 열두 번째 대통령

    1980년대 이후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계엄 포고문이 여러모로 나를 떨게 했다.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4시간 동안은 두려워서 떨었다. 열 살 먹은 딸이 울고 있는 옆에서 덩달아 울었다. 그땐 그렇게 살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입에 재갈을 물고 살거나 재갈을 풀고 죽거나, 나야 물고 사는 편을 선택하겠지만, 나보다 40년 늦게 태어난 딸이 나와 같은 성장기를 보낸다는 것이 서러웠다. 계엄이 해제되고 광장이 열리자 나는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홀로 광야에 선 듯한 고립감에 떨었다. 광장에 나의 자리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유사한 경험의 축적으로 나는 광장 이후 세상에 일말의 기대도 품지 못하는 비관주의자, 어쩌면 현실주의가 돼 있었다. 응원봉과 K팝, 전에 없던 광장의 미담과 남태령에서 날아든 기적 같은 이야기들로 마음이 녹을 만도 한데, 나만이 서 있는 이 광야에서 그저 먼 나라 소식을 보듯 광장을 관망했다. 4월 4일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읽어 내려간 윤석열 파면 결정문을 들으며 잠시 감동했지만, 광장이 닫히고 대선 공간이 열린 순간 두려움은 현실이 됐다.

  • [우리에게 지혜복 교사가 필요하다] 프레시안 연재 기사

     

    1

     

    이번 스승의 날에도 지혜복 교사는 거리에 있습니다. 지혜복 교사는 A 학교 성폭력 사안 해결과 부당전보·부당해임·형사고발 철회를 위해 500일이 다 되도록 거리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정근식 서울시교육감은 외면하고 있지만, 청소년과 학생과 말벌 동지와 양육자와 노동자들이 지혜복 교사와 맞잡은 손은 오늘도 굳셉니다. "우리에게 지혜복 선생님이 필요합니다"라는 이들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 [일다 기고 김선희 정치하는엄마들] 과학자에게 필요한 것이 ‘공감’이라면…캐런 매싱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읽다

     

    노동자에게는 자신의 노동 환경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고통을 공론화하기 위해 과학자의 증언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통계적인 유의미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과학적 결과를 판단하는 데에는 노동자의 삶에 공감하는 태도가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고통』 저자 캐런 매싱은 공감 없는 과학은 사람을 위한 과학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캐런 매싱은 자신이 노동자들의 삶을 관찰하고 그들의 노동 환경에 대해 문제 제기해 온 30여년 간 “학자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들과 사회적 지위가 낮은 노동자들이 분리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차이를 ‘공감 격차’로 명명하였다. 그 공감 격차를 인식하고 그 차이를 좁히려는 실천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일깨운다.